발행일: 2025-11-26 11:37 (수)

[강소연의 수행 다이어리] 조건들이 만나, 불이 켜진다! 

18. 위빠사나 수행

 

위빠사나란 덩어리지는 환영의 실체(조건의 요소들)를 통찰하는 것.ⓒ강소연 
위빠사나란 덩어리지는 환영의 실체(조건의 요소들)를 통찰하는 것.ⓒ강소연 

알아차림을 계속할수록 현장 포착의 힘이 강해진다. 여기서 현장 포착이란 ‘조건들이 만나는 순간’을 말한다. 마치 확대경이라도 댄 것처럼 그 지점(조건들이 만나는 순간)이 크게 확대돼 보인다. 또 그것의 어울림(또는 섞임)이 슬로 모션(느리게 재생되는 영상)으로 전개된다. 찰나적으로 서로 들러붙어 부지불식 간에 고통을 만들어 내던 것들(요소들)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삿띠의 있고 없음의 차이 
‘알아차림이 있을 경우’와 ‘알아차림이 없을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몇 가지 체험적 사례(세 가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1)특정 느낌은 그저 특정 느낌으로 지나간다. 촉(만남)이 발생하면서 파장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왔다가 가는 생멸의 무상함만이 있다. 나는 그 느낌을 붙들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면 그저 자연 현상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만약 알아차림을 못했다면 느낌은 순식간에 기억의 바다[상온想蘊] 속 저장된 데이터와 연결되고,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번뇌 망상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대상에 ‘집착’이 따라붙는다면, 따라붙는 ‘집착’을 또 보면 된다.

(2)음식을 보는 순간, 그 음식의 맛을 기억하여 혀가 파르르 진동이 일어나며 침이 나오는 현상이 포착된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려는 의도와 집착이 발생한다. 

하지만 알아차림이 있으면 이러한 현상들을 초연히 관조하게 되는데, 그러면 몸은 전혀 그 음식을 원하지 않고 또 필요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결국, 음식으로부터 저절로 돌아서게 된다. 
이것이 석가모니 붓다께서 파세나디왕(코살라국왕)으로 하여금 다이어트에 성공하게 만든 비법이구나! 붓다께서 하신 비법의 한 마디! “(먹을 때) 알아차림하시오!”이다. 엄청나게 뚱뚱했던 왕은 얼마 후 날씬한 몸매로 붓다 앞에 나타났다. 
 

‘의식’이 만드는 전도몽상
(3)‘의식화’되는 과정이 보인다. 5근과 5경은 항상 만나서 돌아가고 있고 무의식도 항상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의식이 개입하면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갑자기 어두컴컴했던 방 안에 환한 불이 켜지듯 밝아진다. 마치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화면이 전환되듯, 수면 밑의 것이 수면 위로 올라오듯 갑자기 명확해진다. 맞지 않던 라디오의 주파수가 딱 맞았을 때 명확한 소리가 흘러나오듯, 그렇게 없던 소리가 들리고 없던 대상이 보인다. 

족쇄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본다면 현상이란 그저 삼합(근과 경+무의식+의식)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해프닝(우발적 사건)이다. 

하지만 알아차림이 없다면 에고(자의식)가 따라붙어 판단과 분별이 일어나고 결국 불선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일어난다. 이 경험을 통해 ‘중립적인 아는 마음’과 ‘판단 분별의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식(唯識) 사상에서는 중립적인 아는 마음을 전5식이라 하고, 판단 분별의 아는 마음을 제6식이라고 하여 구분해 칭한다. 이것을 체험하니 오도송(悟道頌, 깨달음의 체험을 시의 형식으로 읊은 것)이 절로 나온다. 

“이게 꿈이고 그게 현실이라는/ 잠들면서 꿈에서 벗어난다/ 일어나면 또 꿈이지만, 의식이 꾸는 꿈이지만/ 이제는 이게 꿈인 줄 안다/ 그 수승한 빛 덕분에” 

여기서 ‘이게’는 ‘의식’이고, ‘그게’는 ‘반야의 빛’이다. ‘의식’으로 아는 것은 모두 ‘환영’일 뿐이고, ‘반야’로 통찰하는 것만이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조건들의 만남과 해체
설탕 2스푼·간장 2스푼·식초 1.5스푼·참기름 1스푼 등이 만나 하나의 소스가 만들어지듯, 위빠사나란 무엇이 만들어지는 그 요소들과 그것이 섞이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의 역할은 대상과 대상과의 만남(촉)을 수면 위로 나오게 하여 (내 세상이라고 철석같이 여기는) 환영을 촉발하는 마음이다. 반야(통찰지)가 발사될 때는 찰나 삼매(순간적으로 바탕자리 또는 청정의식과 하나 된 상태)가 전제돼야 한다. 


그 투명한 바탕자리에서 발사된 반야의 빛은 대상을 투과한다. 이렇게 보다 보면 “안팎으로 흐르는 거대한 연기적 흐름 속에 ‘나’라는 의식을 갖다 붙이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라고 헛웃음을 짓게 된다. 반야의 빛이 더욱 깊어지고 미세해지기를 바라본다. 그 뿌리까지 투과할 수 있도록. 그래서 언젠가는 재탄생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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