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슬기로운 의사생활’(2020)
병원 “생로병사 모인 인생의 축소판”
부처님, 방편·지혜로 번뇌 제거해
공감 바탕한 자비로 상대 아픔 위로
‘의학(메디컬) 드라마’라고 장르를 구분할 정도로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가 많다. 의학 드라마는 수술 장면과 같은 의료행위를 보여 주기도 하고 등장인물들의 갈등에 집중하기도 하며, 병원 시스템과 사회 문제를 다루기도 하는 독특한 특징을 갖추고 있다. 그중 한국에서 본격적인 의학 드라마로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종합병원(1994)’이 아닐까 싶다. 꼬박 2년 동안 92부나 방영됐던 이 드라마는 탄탄한 사전 취재를 바탕으로 병원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전문직 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뒤로도 ‘하얀거탑(2007)’, ‘뉴하트(2007)’, ‘골든타임(2012)’, ‘굿닥터(2013)’, ‘낭만닥터 김사부(2016)’, ‘중증외상센터(2025)’ 등 제목만 들어도 명장면들이 떠오르는 의학 드라마들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의학 드라마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도 있다. 많은 의학 드라마가 의사와 간호사, 또는 의사끼리의 로맨스로 진행되면서 이름만 의학 드라마이지 결국은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올 만큼 진중하게 의학 드라마 본연의 역할을 한 경우도 있지만, 꽤 많은 드라마가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독특하다. 드라마는 율제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 99학번 동기 다섯 명의 이야기이다. 간담췌외과 이익준(배우 조정석), 소아외과 안정원(배우 유연석), 흉부외과 김준완(배우 정경호), 산부인과 양석형(배우 김대명), 그리고 신경외과 채송화(배우 전미도).
진료과가 다섯이나 되는데도 이 드라마에서는 수술을 둘러싸고 다른 진료과와 갈등을 빚으며 표출되는 의사들 사이의 알력 다툼이나 병원 운영진과의 갈등, 마찰 등은 볼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는 20년 지기 동기 의사들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드라마에도 의사들의 로맨스는 있다. 하지만 그런 외적 요소가 의학 드라마 본연의 모습을 해치지는 않는다. 이들의 의사로서 면모를 잘 드러내기 위해서 제작진은 진료과별로 자문 의사를 두었고, 심지어 수술 장면에는 현직 간호사를 직접 출연시키기도 했다. 이런 세세한 준비 덕분에 현직 의사들마저 이 드라마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한다.
드라마의 시선에서 본 병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로병사가 모여 수만 가지 이야기가 녹아 있는 인생의 축소판”이다. 탄생의 기쁨과 영원한 헤어짐이 공존하고, 내 옆의 환자가 나와 같은 병을 가진 것만으로 큰 힘을 얻다가도 누군가의 불행이 내 것이 아님에 안도하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제작진은 “작품의 배경이 병원이고 주인공의 직업이 의사일 뿐 ‘메디컬 드라마’로 불리기엔 거창한 것 같다”며 “메디컬이라 쓰고 라이프라 읽는 우리네 평범한 삶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의사에 비유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뇌로 아파하는 중생들을 치유하는 약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처님은 온갖 방편과 지혜로써 중생들의 번뇌를 제거해 주시기 때문에 ‘의왕(醫王)’이라고도 불린다.
훌륭한 의사라면 환자의 상태를 잘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정확한 처방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의왕이신 부처님께서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무수한 방편을 흔히 ‘병에 알맞게 약을 준다[應病與藥]’고 표현한다.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는 머리가 낫는 약을, 허리가 아픈 사람에게는 허리가 낫는 약을 준다는 뜻이다. 또한, 똑같이 머리가 아프다고 해도 머리를 부딪쳐서 아픈 경우도 있고 열이 있어서 아픈 경우도 있다. 열이 나서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 타박상 치료제를 주거나 머리를 부딪친 사람에게 해열제를 줘서는 안 된다. 그러니 바른 처방에는 바른 통찰이 필요하다. 부처님의 방편에 반드시 지혜가 함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병에 알맞게 약을 준다’는 말은 준비된 100개의 약 중에서 고작 한 가지 약만으로 그 병을 치료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픈 사람 입장에서는 어느 한 곳이 아프면 그 아픈 곳에 온 신경이 집중되기 마련이어서 실제로 느끼기에는 온몸이 아프다. 내 발에 찔린 가시가 암 환자의 고통보다 더 아프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 통증의 속성이다.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크고 작은 고통이 따로 있지 않다. 그래서 한 군데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을 얻는다는 것은 아픈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통째로 해결하는 일이다.
부처님께서 주시는 약은 중생의 아픔을 전체적으로 통찰하여 근본적으로 치유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방편은 그냥 방편이라고 하지 않고 오묘하고 오묘한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고 한다.
의왕이신 부처님의 본질은 ‘자비’이다.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고통에 버거워하는 중생에게 자비의 손길을 건네주는 분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자부(慈父)’라고도 한다. 자비의 기본은 공감이다. 상대의 아픔과 고통을 내 것으로 여기며 동조와 위로를 전해 주는 것이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기획의도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언제부턴가 따스함이 눈물겨워진 시대.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작지만 따뜻하고, 가볍지만 마음 한편을 묵직하게 채워 줄 감동이 아닌 공감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결국은 사람 사는 그 이야기 말이다.”
기획 의도대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동기 의사들은 정확한 처방과 뛰어난 의학지식으로 환자들의 고통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공감과 위로를 전하며 그들을 어루만져 준다. 중환자실에 있는 아기의 상태에 따라 울고 웃는 안정원이나, 남편이 밉다고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에게 자신의 이혼담을 전하는 이익준이 그렇다. 그러니 실제 의사들이 감탄할 만큼 의사들의 면모를 철저하게 드러내는 현실적인 드라마이면서도, 현실의 병원에서는 만나기 힘든 의사들을 보여 주는 동화 같은 드라마이다. 마치 이 시대에 의왕 부처님이 출현하신 듯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5인방. 이런 의사들을 현실에서도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