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지옥에서 온 판사’(2024)
기독교적 세계관에 불교 소재 가미
정의는 피해자 용서로 완성 메시지
불교적 판결은 처벌 아닌 구제 중심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쪽 손을 어느 쪽 무릎에 대고 있을까? 이 질문에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청동상 자세가 오른손 손등으로 턱을 괴고 그 오른쪽 팔꿈치를 왼쪽 무릎에 붙이고 있어서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몸이 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특이한 자세의 ‘생각하는 사람’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까지는 미처 모르는 사람이 많다.
로댕은 그 유명한 단테의 시 ‘신곡’의 ‘지옥편’을 형상화해 ‘지옥의 문’이라는 청동 작품을 만들었다. 6m가 넘는 이 거대한 작품에는 180명이 넘는 다양한 인물들이 표현돼 있는데, 지옥문 위에 앉아서 그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을 표현하고 있는 만큼 ‘생각하는 사람’이 실은 단테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로댕의 ‘지옥의 문’과 무척 닮은 문을 우리는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에서 만날 수 있다.
유스티티아(배우 오나라)는 살인을 저지른 인간의 영혼을 심판해 지옥(게헨나)으로 보내는 악마 판관이다. 그런데 어느 날, 거짓 지옥의 재판정에 가야 할 판사 강빛나(배우 박신혜)가 살인 지옥의 재판정으로 잘못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강빛나를 살인 지옥으로 보내 버린 유스티티아는 지옥의 총책임자 바엘(배우 신성록)에게 인간 세상에 올라가 살인을 저지르고 용서받지도 못하며 반성조차 하지 않는 죄인 10명을 1년 안에 지옥으로 보내라는 처분을 받는다. ‘지옥에서 온 판사’는 그렇게 강빛나의 몸에 깃들어 사는 악마 유스티티아가 악질적인 살인자를 지옥으로 보내는 이야기이다.
유스티티아가 살인죄를 저지른 죄인의 이마에 ‘게헨나’라는 낙인을 찍어 지옥으로 보내려고 할 때 로댕의 작품을 꼭 빼닮은 지옥의 문이 열린다. 여기에 악마들과 사탄이 등장하고 천사 가브리엘이 등장하는 등 드라마의 기본적인 세계관은 기독교적이다. 그런데 또 살인 지옥이나 거짓 지옥 등 여러 가지 지옥 세계가 있고, 또 그런 지옥을 담당하는 판관이 있다는 설정은 은근히 불교적이다.
사실 불교만큼 지옥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는 종교도 없다. 잠시도 쉴 틈 없이 고통을 받는다고 ‘무간지옥’이라고 번역하는 아비지옥을 시작으로 뜨거운 지옥이 여덟(팔열지옥)인데 그 각각의 지옥에 딸린 지옥이 수십 개씩이다. 또 뜨거운 지옥만큼은 덜 알려져 있지만 추운 지옥이 또 여덟(팔한지옥)이다. 그렇게 해서 대략 불교에서 설명하는 지옥이 140개가 넘는다. 그만큼 우리 중생이 저지르는 죄가 많다는 뜻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중생의 삶이 다양하고 또 다양한 만큼 세세한 교화가 필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교의 지옥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시왕(十王)이다. 사람이 죽은 뒤 7일마다 염라대왕을 필두로 열 명의 저승 재판관에게 차례로 심판을 받는데, 각 시왕은 살아생전의 업보를 심판하고 그에 따라 환생과 처벌 방향을 결정한다. 그래서 각 시왕은 특정 지옥의 형벌과도 연결돼 있다. 그런 점에서 ‘지옥에서 온 판사’는 기독교의 겉모습을 하고 있는 불교 교화 드라마인가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 같은 아이러니한 성격을 보여 준다.
드라마에서도 설명하지만 유스티티아는 ‘정의’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고 저울과 칼을 들고 있는 그 정의의 여신이 바로 유스티티아이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오직 죄의 무게로만 판결을 하기 때문에 드라마 속의 유스티티아는 모든 죄인의 변명이나 사연 따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고 일말의 선처도 없는 냉혹하고 잔인한 성격을 가졌다. 그런 유스티티아가 한다온(배우 김시우)을 만나 눈물을 배우면서 악마의 판사가 아니라 인간의 판사로 변한다.
이 드라마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역시 ‘정의’이다. 드라마는 가장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착한 사람은 행복하게 살고 나쁜 사람은 벌 받는 거 그게 정의”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이 정의는 피해자의 용서로 완성된다. 강빛나는 정태규(배우 이규한)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유가족들은 피고인에 대한 사형 선고로 지난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 받기를 원할 뿐이다. 법이 결코 자신들을 버린 적이 없음을 확인받고 싶을 뿐이다. 따라서 본 재판부는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기준으로 양형을 하고자 한다. 피해자와 피해 유가족이 용서하지 않는 죄는 법 또한 용서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강조하듯 피해자의 용서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와 반성에 달려 있다. 사과와 반성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참회일 테니 ‘지옥에서 온 판사’의 주제를 불교식으로 바꾸면 진정한 참회만이 제대로 된 판결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불교적인 판결은 처벌 중심이라기보다는 구제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던 데바닷타도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하고, 오역죄를 저지른 일천제마저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교이다. 심지어 목련존자는 지옥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구제하기도 하고, 지옥고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옥을 전담하는 지장보살까지 있다.
일상에서 늘 독송하는 <천수경>의 참회게를 통해 우리는 참회의 의미를 이렇게 알고 있다.
“죄는 자성이 없이 마음을 따라 생길 뿐이니/ 그런 마음이 없어지면 죄도 역시 사라진다./ 죄도 사라지고 마음도 없어져 모두 공해지면/ 이것을 진정한 참회라고 한다.”
죄라는 것의 실체가 없고 마음의 문제라고 하니 죄와 참회라는 것이 그저 마음만 바꿔 먹으면 해결되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여기에는 대단히 엄중한 경책이 담겨 있다. 행동으로 드러난 죄뿐만 아니라 그 행동을 하게 한 마음까지도 문제 삼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다는 결과만이 죄가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이미 죄를 저지른 것과 똑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참회 역시 입으로 사과하고 행동으로 사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진심의 문제가 된다.
진정한 용서는 처절한 참회를 바탕으로 한다. 참회하지 않는 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지만, 부처님의 교화로 자신의 죄를 처절하게 깨달은 앙굴리말라처럼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참회를 한다면 그 죄업이 한순간 녹아서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이 불교의 자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