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 여왕, 불탑에 ‘군주의 위엄’ 담다
국왕 위엄 정치 상징 담긴 불탑
통치자 권한·위엄 드러낸 조형물
분황사 탑에 담긴 선덕여왕 흔적
신라 왕실, 석가족 후예임을 강조
경주 분황사(芬皇寺)는 634년에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에 의해 창건되었다. ‘분황’이란 독특한 사명에 대해서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절’, ‘세상의 괴로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분타리(芬陀利, 흰 연꽃)와 같은 부처님의 도량’, ‘향기로운 임금의 절’, ‘여왕의 사찰’과 같은 다양한 풀이가 있다. 어느 것이나 이 절이 선덕여왕을 위해서 건립되었다고 본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창건 당시 분황사 옆에는 왕실과 나라를 위해 창건된 황룡사가 이미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는 해, 선덕여왕이 막대한 인력과 재원이 필요한 토목공사를 벌여 굳이 자신을 위한 사찰을 건립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덕만우바이’처럼: 군주의 운명을 타고난 공주
신라시대에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했다. 신라의 제26대 왕인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대에 이르면 모두 8개의 신분 계층 중에서 가장 상위인 성골(聖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이 시기 신라 왕실에서는 석가모니의 권위를 빌려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는 이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진평왕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슈도다나, 즉 백정왕(白淨王)에서 따온 백정(白淨)이었다. 그의 왕비는 석가모니의 어머니를 본떠 이름을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했다.
분명 석가모니와 같은 아들을 바랐을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슬하에는 딸밖에 없었다. 진평왕은 아들을 얻고자 두 번째 왕비까지 맞이했지만, 끝끝내 바람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평왕은 맏딸을 덕만(德曼 혹은 德萬)이라 이름했다. 아마도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덕만우바이(德優婆夷)에서 따온 이름이리라. 중생들을 제도하려고 일부러 여인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덕만우바이처럼 신라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당시 신라에서 성골이란 특수한 신분 조건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이길 만큼 힘이 셌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자 덕만공주가 즉위했다. 우리 역사상 첫 번째 여성 군주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왕의 치세는 출발부터 순탄하지 못했다. 신라의 귀족 세력과 백성들은 물론, 이웃인 고구려와 백제, 중국의 당나라에서도 전례 없는 여성 통치자의 등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선덕여왕은 즉위 과정과 직후에 제기된 여러 반발을 적극적인 불교정책 추진을 통해 돌파하려 했다. 즉위 3년째인 634년은 이 같은 정책이 본격화된 해였다. 이해 정월, 여왕은 인평(仁平)이란 새 연호를 선포했다. ‘어진 정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개원(改元)에 맞추어 낙성된 분황사는 선덕여왕의 군주로서의 포부를 기념하는 상징물이었다.
탑으로 보인 국왕의 위엄
고대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사리는 곧 부처 그 자체로 믿어졌다. 사리를 호지(護持)하고 공양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부처가 함께한다는 증명이었다. 이 때문에, 고대 국왕들에게 있어 사리를 지니고 공양하는 일은 자신의 성덕(聖德)을 대내외에 알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런데 사리의 공양은 역설적으로 사리를 감추는 일이다. 일단 탑 안에 봉안된 사리는 지진이나 전쟁과 같은 이유로 탑이 무너져 우연히 그 존재가 드러나기 이전에는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사리가 아니라 불탑이다. 바로 이 같은 이유로, 고대와 중세의 동아시아 군주들은 경쟁적으로 웅장한 불탑을 세웠다. 불탑이야말로 이미 우리 시야를 벗어난 사리의 시각적이고 건축적인 연장이자 사리를 수호하는 국왕의 정당성과 위엄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었기 때문이다.
단층 건물이 주를 이루었을 고대 사회에서 하늘 높이 치솟은 장중한 불탑은 통치자의 권위와 위세를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탑인 분황사 석탑과 유례가 없는 최고 높이의 탑인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설이 시사하듯이, 선덕여왕은 누구보다도 불탑이 지닌 정치적 상징성을 잘 알고 있는 군주였다.
분황사의 중심은 석탑이다. 현재는 3층탑이나 본래는 9층 또는 7층의 장중한 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을 네모난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이 탑은 기존에는 없었던 과감한 시도였다. 전례가 없는 여왕체제의 신라에 걸맞은 새로운 형식을 찾으려는 실험이 아니었을까. 한 변의 길이가 13m에 이르는 널찍한 기단의 네 모퉁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놓여 있다. 1층 탑신 안에는 감실을 만들고 네 면에 출입문을 만들었다. 네 문의 좌우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각각 한 구씩 배치되어 있다. 입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서 새 시대의 기상이 느껴진다.
탑 안에 담긴 여왕의 흔적
분황사 석탑의 사리장엄에 대해서는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東京雜記)〉 에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탑의 반을 허물어뜨렸고, 이후 승려가 이를 다시 고쳐 쌓으려다가 그만 또 그 반을 허물어뜨렸다는 것이다. 이때 탑에서 바둑알 같고 수정처럼 빛나는 구슬, 즉 ‘화주(火珠)’를 얻었는데, 이를 백률사로 옮겨 보관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의 문인인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남긴 ‘남정록(南征錄)’에 의하면 백률사에는 화주 외에도 은합과 거기 담긴 사리 등 여러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사리장엄구는 18세기 후반에 분황사 석탑이 중수될 때 탑 안에 다시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일본인들에 의해서 분황사 석탑이 해체 보수될 때 2층 탑신 중앙에서 석함이 발견되었다. 석함 안에서는 녹색의 유리병 조각, 사리가 들어 있는 은합, 수정(화주), 금바늘과 은바늘이 든 은제 바늘통, 가위, 옥과 구슬류, 집게, 패각, 금동 장식품, 동전 등 많은 수량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부분 유물은 창건기인 선덕여왕대에 봉안된 것으로 생각되나, 중국 송나라 때 주조된 숭녕중보(崇寧重寶)나 코일 형태로 말려 있는 유리구슬 등은 후일에 석탑을 중수할 때 추가로 봉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분황사 석탑 발견 사리장엄구에서는 다른 석탑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독특한 공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은제이전(銀製耳栓)’이라 지칭되는 원반형 귀고리이다. 초기 연구에서는 이 유물을 석함 안에서 나온 바늘이나 가위와 마찬가지로 재봉도구인 실패로 봤다. 그러나 근래에는 인도에서 유래한 귓불에 뚫은 구멍에 끼어 착용하는 귀고리란 해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었다. 5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 아잔타석굴 제1굴 벽화에서는 같은 모양의 귀고리를 착용한 인물들이 여럿 보인다.
원반형 귀걸이는 경주 안에서는 분황사 석탑과 황룡사 구층목탑지에서 발견되었다. 두 유적 모두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고, 두 유적에서 모두 귀고리가 한 짝씩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진평왕이 본인과 직계 왕실 가족에게 석가족의 이미지를 투영했던 걸 상기하면, 인도에서 유래한 원반형의 귀고리에는 단순한 장신구 이상의 의미가 담겼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의 신라 왕실 가족이 석가족의 후예임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장치였던 것은 아닐까.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유물은 금, 은 바늘이 담긴 바늘통, 가위와 같은 재봉도구이다. 여성이 사용하는 물품이자, 금과 은이라는 귀한 재료가 사용된 점으로 보아 아마도 분황사를 창건한 선덕여왕이 공양했을 가능성이 크다. 흥미롭게도 선덕여왕이 건립한 황룡사 구층목탑 터에서 발견된 공양품에도 청동바늘통과 철제가위가 포함되어 있다. 곁에 두고 사용했던 물품을 사리탑 안에 공양하는 것은 지역을 막론하고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분황사 석탑에서 보이는 새로운 조형감각과 내부에서 발견된 독특한 사리공양품은 이 탑이 안팎으로 모두 여왕이 이끄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물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승혜 리움 큐레이터
▶한줄 요약
분황사 석탑에서 보이는 새로운 조형감각과 내부에서 발견된 독특한 사리공양품은 이 탑이 안팎으로 모두 여왕이 이끄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물이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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