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그녀, 붓다를 만나다] 2. “태어나는 세상마다 佛法 만나겠다”는 서원 담다

청신녀 아엄의 바람

광배 뒷면 불상 조성 기록서
고대인 신앙생활 엿볼수 있어
손바닥 만한 공간 속 바람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

〈‘건흥5년’명 금동삼존불 광배〉 앞면과 뒷면, 6세기, 높이 12.4cm, 국립청주박물관. 사진제공=국립청주박물관

“[소수림왕] 2년(372) 여름 6월에 진(秦)의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浮屠]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과 경문(經文)을 주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사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위의 글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록 2줄에 불과한 짧은 기사지만, 불교가 이 땅에 정식으로 전해졌을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기에 더없이 귀중하다. 이 기록에서는 불교가 중국에서 온 스님의 손을 통해, 불상과 경문(經文)이라는 구체적인 성보(聖寶)의 형태로 이 땅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나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정황을 알려주는 기록에서는 불상에 관한 언급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상황은 고구려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불상이 전해짐으로써 고대인들은 처음으로 부처와 대면하고, 점차 마음을 맡길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로 부처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이다. 

불보살의 광명과 불자들의 기원이 담긴 광배
고구려와 백제에 불교가 정식으로 전해지고 수용되었던 4세기 말, 우리나라 불교사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제작된 불상들은 지금까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금동불상의 상당수는 이보다 한참 후인 6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이들은 광배(光背) 뒷면에 불상 조성에 대해 기록한 명문을 지니고 있어 고대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알려준다. 

광배는 부처와 보살과 같은 존귀한 존재가 발하는 빛을 표현한 것이다. 광배는 불상의 중요한 형식적 요소 중 하나로, 이는 부처의 특별한 신체적 특징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는 전통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석존을 비롯한 ‘깨달은 이’들은 평범한 인간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인다는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대지도론(大智度論)〉과 같은 불교 문헌에서 32길상(吉相) 80종호(種好)란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광배는 32가지의 상서로운 큰 특징 중 열다섯 번째인 부처의 몸이 사방으로 모두 한 길의 광명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장광상[丈光相]’의 개념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불상을 봐도 광배는 범속한 인간과는 다른 불보살의 성스러움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작은 규모의 불상에서 광배의 역할은 빛난다. 예를 들어, 6세기에 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했던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을 살펴보자. 

‘일광삼존불’은 하나의 광배 안에 세 존격을 배치한 불상을 일컫는다. 현존하는 삼국의 사례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고, 광배는 끝이 뾰족한 나룻배 모양이다. 손바닥 정도 크기에 불과해 다채로운 표현이 제한되기 마련인 소형 불상에서, 커다란 광배는 세 존격을 하나의 그룹으로 통일성 있게 묶어준다. 광배의 중심에 배치된 본존은 머리 뒤에는 원형의 후광을, 몸 뒤에는 타원형의 후광을 갖추고 있다. 그야말로 겹겹의 광명으로 감싸여 있다. 본존과 좌우의 협시보살상을 제외한 광배 앞면의 공간은 작은 부처나 화염 문양 등으로 빈틈없이 장엄한다. 

광배 뒷면은 앞면과는 달리 매끈하게 다듬어 마감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글씨를 새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불상의 제작을 후원했던 한 명 한 명의 불자들은 분명 어딘가에 자신들의 소망을 새겨 항구적으로 기리고 싶었으리라. 상을 만들면서 남긴 이러한 기록을 ‘조상기(造像記)’라고 한다. 삼국시대 불상의 광배 뒷면에 남아 있는 조상기는 대체로 왕조의 연호나 간지(干支)와 같은 기년(紀年), 상을 제작한 목적, 발원자, 존격 명칭 등의 순서로 기록되었다.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일광삼존불인 〈‘신묘’명 금동삼존불입상〉을 살펴보자. 이 삼존상은 본존불을 따로 제작하여 광배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대좌는 전하지 않는다. 광배 뒷면에는 스님이 네 명의 선지식들과 함께 무량수불 1존을 만들며 빈 소망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님이 내세에 다시 태어날 때마다 여러 부처를 만나고, 자신들은 내세에도 함께 태어나 미륵의 가르침을 받길 원했다. 조상기에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이나 불상의 양식으로 보아 고구려의 불상으로 판단되며, ‘신묘(辛卯)’는 고구려의 평원왕 13년인 571년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나와 가까운 이들의 더 나은 내세를 비는 것은 6세기를 살아갔던 이들이 불상을 조성하는 주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세상을 떠난 아내를 위해 남편이 발원해 만든 〈‘정지원’명 금동삼존불입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광배의 전면 중앙에는 양쪽 어깨를 덮은 대의를 입은 부처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각각 보살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아내 조사(趙思)를 위해 금상(金像)을 공경히 조성하오니 빨리 삼도를 떠나게 해주옵소서”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불상을 만든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앞서 살펴본 〈신묘명 금동삼존불입상〉 등과 양식이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묘’명 금동삼존불입상〉 앞면과 뒷면, 6세기, 높이 15.5cm, 개인 소장, 국보. 사진제공=국가유산청 
〈‘신묘’명 금동삼존불입상〉 앞면과 뒷면, 6세기, 높이 15.5cm, 개인 소장, 국보. 사진제공=국가유산청 

작은 불상에 새긴 큰 바람 
삼국시대의 일광삼존불 중 〈‘건흥5년’명 금동삼존불 광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조상기를 통해 6세기를 살고 간 불교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이다. 그녀는 과연 어떤 마음을 담아 이 불상을 발원했을까. 

“건흥(建興) 5년 병진년에 불제자 청신녀(淸信女) 상부(上部) 아엄(兒奄)이 석가문상(釋迦文像)을 만드니, 바라건대 태어나는 세상마다 부처님을 만나 설법을 듣고, 모든 중생과 이 소원을 함께하게 하소서.”

명문에 언급된 ‘건흥’이란 연호는 사료에 보이지 않아서 삼국 중 어느 나라 것인지 단정하기 쉽지 않다. 다만 좌우 협시보살상과 광배 전반에서 보이는 양식이 앞서 살펴본 〈‘신묘’명 금동삼존불입상〉과 상통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근거해, 학계에서는 ‘병진년’을 536년이나 596년으로 추정한다. 발견 초기에는 충청도라는 출토지에 근거해 백제의 광배로 추정되었다. 근래에는 ‘건흥’ 연호의 사용과 조상기의 형식이 고구려 강역에서 출토된 광배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유물로 보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이 광배를 발원한 아엄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많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엄이 자신을 ‘청신녀’라고 지칭했다는 점이다. 청신녀는 출가하지 않은 채 재가에 머무르지만, 삼보에 귀의하여 5계를 받아 지키는 신심이 깊은 여자 신도를 뜻한다. 아엄은 곧 가족 내 위치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재가 수행자로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이승혜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이승혜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아엄은 가까운 사람들의 내세를 위해 불상을 발원한 동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다시 태어나도 일체중생과 함께 부처를 만나 법을 듣겠다고 원을 세웠다. 가족이란 가장 가깝고 절실한 대상이 아닌 모든 이들에게 불상 조상의 공덕을 회향한 것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광배의 뒷면에 새겨진 그녀의 커다란 바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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