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1. 혜초 스님

사막을 횡단하는 실크로드 상인들의 모습. 혜초 스님의 구법행은 이같은 험난한 길을 통해서였다.
연재에 들어가며

부처님 법을 쫓아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간 스님들의 전통이 있다. 한국 역사에 있어 이런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를 개척한 이들을 우리는 구법승(求法僧)이라 부른다. 온갖 위험이 기다리고 있던 미지의 세계에 그들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깨우쳐갔다. 21세기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새롭게 접하고 있다. 옛 구법승들의 치열한 인간 극복의 현장에서 우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5세 당·19세 인도로 떠난 청년정신
8대 영탑순례 등 당대 문화 선도
신라서 태어났지만 ‘세계인’으로 활동

15세 소년 혜초의 세계사 유례없는 도전정신

구법승 중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바로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 스님(704∼787년)일 것이다.
당시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불국토의 꿈에 부풀어 있었다. 불국토를 꿈꾸었던 15세의 혜초 스님은 719년 구법행을 결심한다. 그가 먼저 선택한 곳은 중국 당나라였다. 혜초 스님은 해로를 이용해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중국은 불교 선진국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아시아 전반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선진문물, 특히 불교문화를 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로 가는 길은 험했다. 교통로는 육로와 해로로 나뉘는데 해로가 더욱 선호됐다. 육로의 경우 고구려 고토(故土)를 지나 만주·요동성 등을 경유하는 길이었다. 8세기 고구려 멸망 이후 발해가 있었지만 이 지역은 숱한 이민족들의 각축장이었다. 따라서 육로 여행은 상당히 위험하였고, 신라와 당나라의 교역은 주로 해로가 이용됐다.

당나라에서 혜초 스님은 천축(인도의 옛 이름) 나란다사 출신 밀교승 금강지(金剛智)를 만난다. 금강지는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가 된 스님이다. 약관의 나이에 밀교를 접한 혜초 스님은 천축 본토로의 구법행을 결심한다.

밀교는 깨달음을 위해 그 자체의 진언과 주술을 강조하는 후기 대승불교의 흐름으로 당시 중국은 밀교에 심취돼 있었다. 19세이던 723년 경 혜초 스님은 ‘떠날 때는 100명이나 돌아온 자는 한 명도 없다’는 그 길을 통해 인도로 갔다.

〈왕오천축국전〉 내용을 보면 혜초 스님은 해로를 통해 갔다가 육로로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왕오천축국전〉은 앞과 뒤 일부분이 결손된 상태인데 남은 부분의 시작은 오천축(五天竺) 중 중천축(中天竺)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인도는 굽타왕조의 붕괴 이후 여러 제국들로 갈라져 있었다. 혜초 스님은 특정나라에 대한 묘사보다는 인도를 동서남북 사방으로 나누고, 거기에 가운데를 첨가해 다섯으로 구분했다.

〈왕오천축국전〉에서 북천축에 이어서는 인도 외 지역으로 이어져 중국 쿠챠까지 진행되기에 육로로 귀환한 것은 확실하다. 없는 앞부분은 동천축으로 추정되는데 혜초 스님은 동천축까지 해로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혜초 스님이 당시 해운의 중심지인 중국 광저우에서 출발한 것과 〈왕오천축국전〉에 동남아시아와 관련된 용어가 인용되기도 하는 점이 그 근거로 꼽힌다. 혜초 스님이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도착해 1년 동안 기후에 적응하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난 뒤 동천축에 도착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혜초 스님의 인도로의 구법행은 당시 항해술로는 목숨을 건 대장정이었다. 725년 초 동천축에 도착한 혜초 스님은 그때부터 4년 동안 인도 전역을 돌며 붓다의 탄생지, 득도처, 최초의 설법지, 최초의 절, 열반지 등을 돌아보았다. 특히 스님은 마하보리사 대탑을 비롯한 8대 영탑을 참배하고 기록으로 남겼는데 8세기 당나라 불교계에서는 밀교승들을 중심으로 이 순례가 수행 일환으로 강조된다. 혜초 스님은 이러한 수행풍을 선도했다.

마하보리사 대탑을 보고자한 원을 이룬 혜초 스님의 기쁨은 <왕오천축국전>에 오언시로 남아있다.

不慮菩提遠 보리사를 멀다고 걱정치 않았는데,
焉將鹿苑遙 어찌 녹야원을 멀다고 걱정하리오.
只愁懸路險 단지 두려운 건 낭떠러지 험한 길뿐,
非意業風飄 거센 바람 불어와도 개의치 않노라.

디지털로 복원한 혜초 스님의 인도 마하보다 대탑 순례 상상도.
스님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님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옛 소련의 국경 지대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와 파미르 고원 등 총 8년에 걸친 만행을 이어간다. 혜초 스님이 중국으로 돌아온 길은 바로 실크로드였다. 육로로 실크로드는 해로에 버금갈 만큼 험했다. 편도에 약 2년이 걸리는 악조건이었다. 그 당시의 교통수단과 환경 등을 짐작해 볼 때 한마디로 스님의 구법순례는 죽음을 담보한 것이었다.

혜초 스님의 역작, 〈왕오천축국전〉

혜초 스님은 사막과 설산의 산맥을 건너 중국 장안으로 돌아오며 중요한 불교성지를 정확히 기록했다. 당나라 장안에 이르는 쉬지 않고 지속된 수만리 여정에서 혜초 스님은 인간의 삶 속에 다양한 모습을 기록했다. 하지만 혜초 스님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96년 전의 일이다.

1908년 둔황에서 프랑스 학자 펠리오가 찾아낸 〈왕오천축국전〉은 제목과 앞부분이 떨어져나간 길이 358.6㎝의 잔편 두루마리었다. 혜초 스님은 인도의 불교성지에 대해 〈왕오천축국전〉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불교의 대승이나 소승이 각각 어느 정도 행하여지고 있는지를 비롯해 전쟁에 관한 기록, 또 방문한 나라의 지리, 정치, 사회계급, 재판 등의 모습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또 인도뿐 아니라 티베트·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 등에까지 서술해 중요한 사료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또 오언시가 다섯 편이나 실려 있어 다른 여행기들과는 달리 ‘서정적 여행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만km 여정의 초인적 발걸음과 조용한 회향

혜초 스님은 왜 그 험난한 구도의 여정을 떠났을까? 혜초 스님의 구도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 째는 스님으로서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다. 수년 동안 스님이 초인적인 발걸음을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전심전력의 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탐구열이었다. 특히 인도의 대승문헌들을 구해서 한문으로 옮기는 일은 당시 학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은사인 금강지가 있었던 인도 중부 나란다사는 6·7세기 세계 최대 불교대학으로 5만 명의 승려가 수학할 정도였다고 한다. 혜초 스님으로서는 그 학풍을 견학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있었다.

혜초 스님은 727년 서안에 도착해 총 2만 km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여전히 30세 전후의 젊은 나이였다. 귀국 직후 스님은 경전번역에 매진한다. 서안 천복사(薦福寺)에서 스승 금강지와 함께 필수(筆受)의 역할을 맡아 밀교경전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大乘瑜伽金剛性海曼殊室利千臂千鉢大敎王經)의 번역에 들어갔다.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돈황 석굴
혜초 스님은 천축 구법행을 통해 얻은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지식과 문화적 배경을 통해 이 일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에 금강지가 입적하며 번역 사업은 중단된다.

금강지 입적 후 혜초 스님은 그의 제자였던 불공에게 다시 밀교 경전을 배운다. 혜초 스님과 불공은 동문수학의 처지지만 불공이 인도사람이고 또 연령차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법제자로 다시 입문하게 된 것이다. 혜초 스님이 불공으로부터 배우며 다시 역경을 시작한 것은 774년 가을 대흥선사(大興善寺)에서라고 기록돼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이미 불공은 대흥선사(大興禪寺)에서 입적한 것으로 기록돼 있어 연대의 혼란이 보인다.

불공은 입적하며 유지를 통해 밀교를 널리 펼 6대 제자 중 두 번째 제자로 혜초 스님을 거명했다. 불공은 혜초 스님에게 자신의 법을 이으라는 유촉을 남겼고, 또 혜초 스님에 대해서는 ‘신라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중국 밀교의 법맥은 금강지-불공-혜초로 이어진 것이다.

불공이 입적한 직후, 혜초는 자신의 동문, 제자들과 함께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다. 스승의 장례에 대한 감사였고, 또 불공이 세운 이 사찰을 존속시켜 달라는 청원이었다.

혜초 스님의 표문은 받아들여졌고, 그 후 스님은 몇 년을 장안에서 보냈다. 780년 경 혜초 스님은 오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래 머물던 곳으로 불공의 수제자 함광(含光) 스님, 즉 혜초 스님의 사형이 머무는 곳이었다. 혜초 스님은 그의 만년을 오대산에 있는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보냈다. 여기서 그는 오래 전 필수를 맡았던 〈천비천발대교왕경〉 한역을 다시 시도해 한역본을 다시 채록했다.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787년에 이곳에서 입적하였다.

중국 서안에 있는 혜초 스님 기념비(왼쪽)와 평택에 있는 혜초 스님 기념비
한국을 넘어선 ‘세계인 혜초’, 재조명 시작

한편, 불공의 유촉에도 ‘신라인’으로 명시된 혜초 스님은 80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국 신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중국에서 밀교 경전 연구에 전념했을 뿐이었다. 고국 신라 땅이 그리웠으나 그는 이미 세계인이었기에 국경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한 세계인으로서의 혜초 스님의 가치는 최근에서야 한국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신라에서 기록이 미미했기에 혜초 스님이 신라인이란 사실이 알려진 것도 최근이다. 국내에서는 1943년 최남선이 원문에 우리말 해제를 붙이면서 이런 사실들이 알려지게 됐다.

2001년 6월에는 이를 기리기 위해 서안 주지현에 ‘신라국혜초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조계종에서 보수를 지원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실크로드의 기점으로서 경주를 주장하며 혜초 스님을 선양하는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경상북도와 경주시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일환으로 경주와 이스탄불을 연결하는 5개국 6개소에 혜초 스님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설치하고 있다. 2013년 2월과 11월 경주시는 혜초 스님의 루트를 따라 중국 시안을 거쳐 터키 이스탄불까지 육로 탐사대와 중국 광저우를 거쳐 인도 콜카타와 이란 반다르아바스에 이르는 해양 탐사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해양 물류 중심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평택시는 2009년 5월 ‘UN 실크로드 메이어스 포럼’을 개최하며 혜초 스님이 광저우로 출발한 옛 나루터 자리에 ‘혜초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종립대학인 동국대도 2011년 교수와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동국 혜초원정대를 구성하고 실크로드 탐방을 진행했다.

최근 학계에서는 혜초 스님의 해로와 육로를 통한 여정에 대한 새로운 학설이 활발히 이뤄지며 다시금 혜초 스님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루이스 랭카스터 美버클리대 명예교수는 2013년 10월 29일 경주에서 열린 국제인문·문화축제에서 ‘혜초의 구법여행과 대순환로’ 발표를 통해 “혜초 스님이 신라에서 인도로 해상으로 간 뒤 내륙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육로와 해로가 함께 묶인 대순환로로서 실크로드가 있었다”며 육로에 한정된 실크로드에 대한 관념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혜초 스님은 1300여 년 전 16세의 나이로 당나라로 또 19세에 인도로 30세까지 불굴의 의지와 거칠 것 없는 도전정신으로 당대의 역사문화를 탐구했다. 이러한 스님의 끝없는 도전정신은 현대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주고 있다.

2011년 1월 왕오천축국전을 친견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을 비롯한 불교계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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