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13. 조계종 종조 도의 스님

석남사 조사전에 모셔진 조계종 종조 도의국사 진영.
784년 문수보살 감응 받아
서당지장 스님 가르침 사사
백상회해 스님 선법도 이어
827년 37년만에 귀국길 올라

불립문자 등은 당시 파격
설악산에서 40년간 수행
보조체징 스님에 이르러 꽃펴
가지산문과 선불교로 이어져

도의 스님은 중국 6조 혜능 선사의 남돈선(南頓禪)을 신라에 최초로 전래한 스님으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고 있다. 도의 스님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라하대가 시작되는 제37대 선덕왕(780-784)대에서 제41대 헌덕왕(809-826) 사이에 활약했다.

〈조당집〉(祖堂集) 권7 〈설악산진전사원적선사전〉(雪嶽山陳田寺元寂禪師傳)에 따르면 도의 스님의 성은 왕씨(王氏)로 법호는 명적(明寂), 시호는 원적(元寂)이다. 북한군(北漢郡 또는 北漢山)에서 태어났다. 전기에 의하면 그 부친의 꿈에 흰 무지개가 집안에 드리우고, 모친의 꿈에는 고승을 친견하는 태몽을 꾸고 어머니가 임신한 지 39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도의 스님은 선덕왕 5년인 784년 당나라 오대산에서 공중으로부터 종소리를 듣는 등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 광부(廣府) 보단사(寶壇寺)에서 비구계를 받고 조계(曹溪)에 가서 육조(六祖)의 영당(靈堂)에 참배했는데 이때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한다.

다시 강서(江西)에 있는 홍주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스님에게 법을 물어 모든 의혹을 풀고 지장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서당 지장 스님은 도의 스님을 보고 말하기를 ‘마치 돌틈(石間)의 아름다운(美玉)을 취하고, 조개 가운데 진주를 줍는 것과 같도다. 진실로 가히 법을 전하는 데는 이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리오’(조당집)라고 했다.
도의 스님라는 이름은 이 때 지어졌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도의 스님을 지장 스님의 제자 4명 중 계림도의선사(鷄林道義禪師)로 표기하고 있다.

도의 스님은 이어 백장(百丈) 회해(懷海) 선사를 찾아가 법요(法要)를 강의받았는데, 회해 선사는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승(東國僧)에게 속하게 되었구나”(百丈曰江西禪脈摠屬東國之僧歟)고 칭찬하였다. 스님은 서당·백장 이대의 선법을 받은 후 당나라로 향한지 37년 만인 헌덕왕 13년(827년)에 귀국해 한국 선불교의 씨를 뿌린다.

한국 선불교의 씨앗을 남겨

도의 스님은 귀국해 선법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교학(敎學)만을 숭상하고 선수행을 이해하지 못했다.

도의 스님의 선법은 육조혜능-남악회양-마조도일-서당지장-설악도의로 이어지는 정통 남종선의 활발발한 면모를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는 화엄, 계율 등의 교학적인 불교가 유행했다. 이런 가운데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주장하는 파격적이고 자유로운 선법은 너무나 새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도의 스님은 아직 선법을 펼칠 때가 아님을 깨닫고 달마가 숭산에서 9년간 침묵 속에서 기다렸듯이,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40년 동안 수행을 했다.

도의 스님이 가진 선사상의 개화는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는 가운데 한 세대, 그 다음 세대의 기다림의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도의 스님이 지피려했던 선불교는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한 가운데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긴 침묵 속에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도의 스님의 법은 제자 염거(廉居) 스님에게 전해졌지만 염거 스님 또한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음을 알고 긴 침묵 속에 수행에 전념하다가 제자 보조 체징(普照 體澄) 스님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하였다.

그 뒤 보조 체징 스님이 법을 받아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짓고 종풍을 크게 떨쳐 일파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 때 도의 선사를 제1세, 염거선사를 제2세, 자신을 제3세라고 하여 도의 스님을 가지산파의 개산조로 삼았다. 이로 인해 그는 신라에 처음 선을 전한 가지산문의 개조로 일컬어진다.

지난 2008년 중국에 세워진 도의국사 입당구법비
문자를 세우지 않고 심인을 전하다

고려 말 진정(眞淨)국사 천책(天刎) 스님이 지은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는 도의 스님이 지원 승통(智遠僧統) 스님에게 한 법문이 수록돼 있다.

이 법문에서 도의 스님은 법계설(法界說)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또한 심인법(心印法)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도의 스님은 교종인 화엄의 사법계설(四法界說)을 들으면 주먹을 곧이 들면서 이것이 무슨 법이냐 묻고, 또 일대장경은 무엇을 밝히는 것이냐 물으면 또한 주먹을 들어서 대답하는 등 문자를 세우지 않고 심인(心印)을 전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신라 하대에는 신라 신분체계에 불만을 품은 육두품 이하의 많은 인재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 새로운 사상의 흐름인 선종불교를 배웠다.

이들이 귀국하자 당시 신라의 중심이었던 불교에도 큰 변화가 발생한다. 선불교의 도입은 당시 유행한 유가 내지 화엄교단으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시대의 흐름은 점차적으로 선불교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당시 분위기는 장흥 보림사의 ‘보조체징선사창성탑비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처음 도의대사가 서당에게서 심인을 전해 받고 뒷날 우리나라에 돌아와 선의 이치를 설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경의 가르침과 관법(觀法)을 익혀 정신을 보존하는 교종의 법만 숭상하여 무위임운(無爲任運)의 가르침인 선종에 모이지 아니하고 허망하고 황탄하다고 여겨 높이 받들거나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마치 달마가 양무제를 만났지만 뜻이 통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도의스님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산림에 은거하여 염거(廉居)선사에게 선법을 전하였다. 염거선사는 설악산 억성사에서 조사의 마음을 전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여니 우리 체징(體澄)선사가 거기에 가서 그를 섬겼다.’

도의 스님은 기존의 교종불교가 의례화·형식화되는 가운데 중국의 선불교가 수용되는 전환기에 사상적 선구자로서 인고의 세월을 살았다. 스님의 부도는 강원도 양양 진전사와 울산 석남사에 있다.

탑비문은 당시 선법이 허망하고 황탄하다 하여 신앙하지 않았던 모습을 전하고 있지만 한 세대 또 한 세대가 지나면서 새로운 선불교의 물결은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그 후 스님의 선사상과 수행법은 한국불교의 정통이 되면서 수많은 수행자의 눈을 뜨게 하고 깨달음의 불빛이 되었다.

조계종은 매년 도의국사 다례재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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