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5. 원광 법사

삼기산에서 유·불·도 수행
25세에 중국 금릉으로 유학
명성높자 진평왕 귀국 간청
돌아와 국서 제작 도맡아

現운문사에 주석하며 불법펼쳐
세속오계 등 백성 교훈 만들어
신라 으뜸 승려로 추앙받아
삼기산 금곡사에 부도탑 남아


원광법사가 창건한 경주 삼기산 금곡사에 남아 있는 원광법사부도탑
불교를 숭상한 신라는 삼국시절 한반도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어 중국과 소통이 힘들었다. 고립돼 자칫 나라가 어려워 질 수 있을 때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이은 스님이 있었다.

바로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다. 스님은 원래 신라 중기 진골 출신으로 스물다섯 살에 출가해 경주 삼기산에서 수도를 하다 중국에서 불교를 배워오기로 결심한다.

원광법사에 관해서는 당나라 〈속고승전〉에 전해진다.
‘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 씨로 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진한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이 땅에 살았으며 조상의 풍습이 면면히 이어져 왔다. 또한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하여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 연구하였다. 그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으나 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 오히려 부끄러웠다. 드디어 친척과 벗을 떠나 해외로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이 25살에 금릉으로 갔다.’

당시 중국은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원광법사는 진나라 금릉(남경)으로 가 장엄사의 승만 대사 밑에서 〈성실론〉 〈열반경〉 등을 공부한 뒤 소주 호구사에 들어가 〈구사론〉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연구하고 불경을 강의해 명성을 떨쳤다.

〈속고승전〉을 보면 ‘처음에는 전에 의심스러웠던 것을 묻고 생각하여 해답을 얻고 도를 물어서 뜻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으나 그는 본래 속세의 서책을 익히 배웠으므로 신비를 깊이 파고들어 연구하는 것만을 이치라 여겼는데, 불교의 교리를 듣고는 오히려 그것을 썩은 지푸라기처럼 여겼다. 헛되이 성인의 교훈을 찾는다는 것이 실제는 인생의 근심거리로 만들므로, 이에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하였더니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그가 처음으로 승려가 되어 곧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좋은 방도를 다하여 미묘한 글들을 이해하는데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원광법사는 장안에서 달천 대사의 〈섭대승론〉 강의를 듣고 혜원, 영유 대사에게 〈열반경〉과 〈반야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배웠다. 스님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수나라 수도에서 지내며 법회를 열고 섭론종을 일으켰다. 그 명성이 높아지자, 고국 신라의 진평왕은 원광법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수나라에 여러 번 청했다.

‘내가 갈고 닦은 학문을 내 조국, 신라를 위해 써야 하지 않겠는가!’하며 신라로 들어온 스님은 외교 문서를 도맡아 쓰고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국서를 도맡아 했다.

:〈삼국유사〉의 원광서편. 〈삼국유사〉에서 원광법사는 ‘의해(義解)’ 편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의해’란 불법의 의리(義理)를 깨달아서 안다는 뜻으로 이는 원광법사가 바로 신라에서 최초로 불법의 요체를 터득한 승려였음을 의미한다.
원광법사가 몇 십 년 만에 신라로 돌아오자, 왕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이 그를 성인이라 공경했다. 그때에 ‘귀산’이라는 화랑은 한 동네에 사는 취항과 서로 친구가 되어 항상 어진 이를 찾으며 도를 배울 것을 원하였다.
귀산과 취향은 원광법사가 머물고 있던 가슬갑사(지금의 운문사)로 찾아갔다.
“저희들은 세속에 살면서 몹시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평생 교훈으로 삼을 말씀을 알려주소서.”
"불교에서 보살계가 있어 크게 열 가지이지만, 그대들은 남의 신하가 되고 아들이 된 몸으로 능히 지키지 못할 것이다. 이제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의 계를 전할 터이니 잘 듣고 행하라. “
원광법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이어서 다섯 가지의 계를 일러 주었다.

“첫째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이니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길 것이며, 둘째는 사친이효(事親以孝)이니 효로써 부모님을 받들며, 셋째는 교우이신(交友以信)이니 믿음으로 벗을 사귀며, 넷째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이니 전쟁에서 물러서지 말 것이며, 다섯째는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니 살아 있는 목숨을 함부로 이지 말고 가려서 하라.”

귀산과 취향은 다른 것은 흔히 들어온 이야기이므로 쉽게 이해하였으나, 다섯 번째의 ‘살생유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의 가르침은 불교에서 으뜸가는 계율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섯 번째 계의 뜻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원광법사는 살생에 있어 때를 가리는 경우와 대상을 가리는 경우, 두 가지를 설명했다.

“육재일(사천왕이 천하를 순행하며 사람의 선악을 살펴 제석천에 보고하는 날)에는 살생하지 않는 시기를 가리는 것이요, 작은 목숨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대상을 가리는 것이다. 또한 죽일 경우라 할지라도 쓸 만큼만 죽이고 함부로 많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세속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길이다.”

귀산과 추항은 스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받들어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602년에 백제와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뒷날 세속 5계는 귀산과 추항 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청년의 생활규범, 또 화랑도의 근본 사상이 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지주가 됐다.

원광법사는 613년 신라 황룡사에서 고승들을 모아 놓고 불교 경전을 강의하게 하는 인왕백고좌회에서 가장 윗자리에서 주관하는 등 당시 신라 불교계에서 가장 뛰어난 고승으로 꼽혔다. 원광법사는 왕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는데, 나이 든 원광법사가 궁궐에 들어가자 왕은 친히 스님의 옷과 약과 음식을 준비했으며, 다른 사람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638년 84세의 나이로 입적했는데, 그때 왕이 원광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고 합니다.

〈속고승전〉에는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 전해진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9세였다.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 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그 후 속세 사람 가운데 죽은 태아를 낳은 사람이 있었는데, 세속에서 말하기를 “복이 있는 사람의 무덤에 그것을 묻으면 후손이 끊이지 않는다.” 하여 몰래 그의 묘 옆에 묻었더니, 바로 그날 죽은 태아에게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쳐졌다. 이 일로 불경스런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도 모두 그를 우러러 숭배하게 되었다.’

일연 스님은 원광법사의 입적에 대하여 고본수이전, 당속고승전 그리고 삼국사 열전을 인용하여 삼국유사에 적었는데 부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이 여든네 살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하였다.’ 〈고본수이전(古本殊異傳)〉
‘이레 만에 절실한 훈계로 유언을 남기고 거처하던 황륭사(皇隆寺)에서 단정히 앉아 죽으니 나이가 아흔아홉이요 당나라 정관 4년이다. 죽을 당시에 절 동북쪽 하늘에서 음악소리가 공중에 가득 차고 이상한 향기가 절에 충만하였으니 승려와 속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한편 그의 영감을 알고 경사로 여겼다. 마침내 교외에 장사지내니 나라에서는 장사하는 예절을 임금의 장례와 같게 하여 치러 주었다.’ 〈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나이 80여 살이 되어 전관 연간에 죽으니 부도(浮圖)는 삼기산 금곡사(金谷寺)에 있다. 지금의 안강 서남쪽 골짜기로서 명활의 서쪽이다.’ 〈삼국사 열전〉

안강에서 영천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에서 삼기산에는 금곡사라는 작은 절이 있고 이곳에 원광법사의 부도가 있다.

이 부도탑과 삼기산에는 원광법사와 얽혀있는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진다. 원광법사가 삼기산 깊은 골짜기에서 용맹 정진할 때였다. 여우 한 마리 가 다가와서 신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근처에 다른 스님도 수도하는 모양인데, 지나다니는데 방해가 되니 다른 데로 옮겨가라고 가서 전하라고 했다. 원광법사가 그 스님에게 가서 말하니 그는 어찌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여우 말에 미혹되느냐고 오히려 법사를 나무랬다. 그날 밤 여우는 산을 무너뜨려 그 비구의 절을 덮어버렸다.

그 여우는 스스로 3,000살이라고 하면서 천하의 일에 통달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그 여우는 법사에게 그곳에서 수행을 하면 법사 자신에게만 이로울 뿐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로울 것이 없으므로 중국으로 건너가 불법을 가져와 이 나라의 미혹한 무리들을 인도하라고 했다. 그러더니 중국에 갈 수 있는 계책을 알려주었다. 법사는 11년 중국에 머물면서 삼장(三藏)에 널리 통달하고 유학도 공부하였다.

법사가 다시 삼기산에 돌아왔더니 여우가 그 유학길이 어떠했느냐고 물었다. 법사는 여우의 은혜를 입었으니 그와 이 윤회하는 세상에 서로 구제해 주자고 약속을 했다. 법사는 그 여우의 실체를 보고 싶어 했더니 여우는 동쪽 하늘에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여우는 자신이 비록 그런 몸을 가졌지만 무상에서 오는 고통을 벗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한탄하면서, 어느 날 자신이 그 동쪽 하늘의 고개에서 자신을 벗을 테니 와서 자기 혼을 송별해 달라고 했다. 법사가 그 날에 가서 보니 옻칠한 것 같이 까만 여우 한 마리가 숨을 모두고 있었다. 일연 스님이 〈수이전〉에 있다고 소개한 내용이다.

법사는 여우의 말일지언정 그 속에서 보살의 목소리를 들었던 게 분명한다. 그리고 그 영물과 소통하여 그것의 생멸에서 오는 무상의 고통을 자비심으로 보듬어 주었다. 원광법사는 비구와는 달리, 자기에게 오는 것이 여우이든, 부처이든,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았으며 이러한 무차정신이 신라를 통일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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