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6. 원측 스님

현재 중국 시안(西安)의 흥교사(興敎寺)에 그의 탑묘가 남아 있으며 탑묘 안에 초상이 새겨져 있다.
7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의 경쟁관계는 치열해 졌다. 삼국은 국력을 극대화해 정세를 주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문화역량을 키우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7세기 초 중국 구법승들의 활동도 보다 활발해 지는데 원광 스님 이후 627년 경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원측 스님(613~696)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남북조 교학연구 성과를 종합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종파불교가 형성됐으며 천태종을 필두로 화엄종과 법상종이 형성돼 중국교학의 정립기를 맞이했다. 원측 스님은 이 시기 새로운 교학의 진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원측 스님은 유학 후 귀국하여 활동한 원광, 자장 스님과는 달리 신라에 귀국하지 않고 계속 중국에 머물며 사상을 선양했다.

원측 스님은 신라 진평왕 35년(613)에 신라 왕족으로 태어났다. 영민했던 원측 스님은 출가의 길을 택한다. 원측 스님이 언제 중국으로 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15세인 627년 고승들을 찾아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 중국으로 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는 현장 스님이 인도 유식사상을 익히고 경전을 구하기 위해 대장정을 나선 때였다. 원측 스님은 처음 법상 스님과 승변 스님 등 섭론의 대가들에게 수학했다. 이들은 당시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화엄종을 이룬 지엄 스님이나 법상종의 개창조 현장 스님도 이들에게 수학했다.

초상을 보면 스님의 얼굴이 무척 무섭게 그려져있다. 그림에서 어린시절 고국을 떠나 중국에서 수도자의 삶을 마친 스님의 고고함과 고독함 그리고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무척 엄격하였을 것 같다.
원측 스님은 총명해 많은 글도 한번 들으면 모두 기억했다고 한다. 원측 스님은 정관 연중(627~645)에 당 태종의 허락을 얻어 왕도의 원법사에 주석했다. 그리고 비담ㆍ성실ㆍ구사ㆍ비바사 등 논서를 익히고 화엄ㆍ법화 등을 두루 익혔다. 또 이시기 뛰어난 스님들이 그러하듯 어학도 널리 익혀 범어를 비롯한 6개 국어에 통달했다고 한다.

645년 현장 스님이 인도에서 새로운 경론을 가지고 귀국하자 중국불교계의 교학 분위기는 크게 바뀐다. 현장 스님이 <유가론>과 <성유식론>으로 대표되는 유식의 새로운 경전을 번역해 소개할 때 원측 스님은 누구보다 빠르게 이들 사상을 이해하고 수용했다. 여기에는 원측 스님이 능통했던 어학과 그동안 익힌 유식의 기반이 큰 도움이 됐다.

<송고승전>에는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현장 스님이 규기 스님에게 전수하는 유식론과 유가론 강의를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마루 밑에서 도청해 규기보다 먼저 대중들을 모아 강의했다는 기록이다. 원측 스님이 규기 스님보다 빨리 새 논서를 이해하고, 자신이 익혔던 섭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식을 전개한 것을 비방하기 위해 만든 일화다.

5조 홍인 스님이 야밤에 법맥을 혜능에게 주고 남쪽으로 가라고 한 것이라든지, 지공-나옹 선사로 이어지는 법맥을 그 직계제자들이 무학 스님이 잇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옆에도 못오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장 스님의 직계제자인 규기 스님은 뛰어난 원측 스님을 시기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중국에 전해진 부처님의 법이 동쪽 신라로 가는 것을 두려워 한 결과일 것이다.

고익진 선생님은 <한국고대불교사상사>에서 이러한 것에 대해 “규기(632-682)는 현장이 전래한 호법(Dharmapaala 530-561) 계통의 새로운 유식사상에 입각해서 법상종을 세운 사람이며, 원측과는 여러모로 학해(學解)에 대립되는 바가 있다. 그렇다면 <송고승전>의 모욕적인 기술은 그 파에서 원측을 비방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고 표현했다.

아무튼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원측 스님은 658년 서명사가 낙성되자 이 사찰에 대덕으로 초빙된다. 서명사를 중심으로 원측 스님은 <성유식론소>를 비롯한 많은 유식학의 저술을 펴내 현장 스님의 신역 불교를 널리 펴는데 이바지 했다.

그러나 외국인으로서 실력이 뛰어나면 현지인의 시기를 받기 마련. 원측 스님은 현장 스님이 번역한 ‘반야심경’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지적하자, 그 제자인 규기(窺基) 일파가 강하게 반발했다. 확인결과 원측 스님의 지적이 정확했음이 밝혀졌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원측은 종남산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칩거했다. 671년 무렵은 신라가 당나라와 전쟁을 하던 때로 이의 영향도 있엇을 것이다.

이후 다시 서명사에 돌아온 원측 스님은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고 후학들에게 <성유식론>을 강의하고 지도했다. 신라 신문왕은 여러차례 원측 스님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측천무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범어에 능통했던 원측 스님은 여러 번역에 참여해 증의 역할을 맡았고, 만년에는 낙양 불수기사에서 실차난타 삼장이 80권 <화엄경>을 번역하는데도 참가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 입적한 원측 스님의 법신은 향산사 부근에 다비를 치러 백탑이 세워졌다. 원측 스님의 제자들은 규기 일파의 해코지를 우려해 종남산 풍덕사에 따로 사리탑을 세워 그의 분골과 사리를 안치했는데, 1115년 송(宋)대에 지금의 흥교사로 옮겨졌다. 현재 흥교사 뜰에는 가운데 현장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왼쪽에 원측, 오른쪽에 규기의 탑이 세워져 있다.

원측 스님은 중국 불교의 번영에 엄청난 기여를 하는데, 이는 그의 사후 ‘사리탑명병서(舍利塔銘幷序)’에 적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서명사의 대덕으로 부름을 받고서 ‘성유식론소’10권, ‘해심밀경소’10권, ‘인왕경소’3권, ‘강반야관소연론’, ‘반야심경’ ‘무량의경’등의 소를 찬술하였으며, 현장법사의 신비로운 전적을 도와 당시 사람들의 눈과 귀가 되었다. 현장을 도와서 불법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고 무궁한 교법을 크게 일으키신 분이다.”

원측 스님이 주석한 경론은 신라와 일본, 그리고 티베트까지 전해진다. 원측 스님에서 비롯된 서명학파의 유식이론이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특히 원측 스님의 저서인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혜초(慧超)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함께 신라 고승의 3대 저작물로 세계 불교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그가 저술한 <해심밀경소>에 의하면 어떤 역자가 잘못 번역한 것을 자주 지적하고 있으며 교학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학문적태도는 아무라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원측 스님 만이 소신있게 할 수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원측 스님을 잇는 제자들인 승장, 도증, 도륜 스님들은 당 법상종과는 다른 별도 학파인 서명학파를 이루었다. 이 중 승장 스님은 범어 전문가로 유식 인명에 대한 여러 저술을 남겻으며 원측 스님 입적 후 사리를 나눠 종남산에 사리탑을 세워 숭모풍조를 확대했다.

도증 스님은 신라 효소왕 원년(692)에 신라에 귀국해 천문도를 바쳤는데, 도증 스님의 귀국은 신라 유식사상 전개에 큰 의미를 갖는다. 도증 스님의 사상은 태현 스님에게 계승돼 신라 법상종 성립의 사상적 배경을 이뤘다.

도륜 스님은 당대 유식사상을 집대성한 <유가론기>(705) 20권의 방대한 저술을 비롯한 18종 57권의 저작을 남겼는데 규기 스님의 법상종 정통설과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이처럼 원측 스님의 활동은 구법승들의 활동이 비록 본국에 귀국하지 않더라도 본국의 사상진전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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