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2. 겸익 스님

불경(佛經)을 등에 얹고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 행각승(行脚僧)을 묘사한 구법승도(求法僧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병술(丙戌)년에 만들어진 백제 글이 쓰여진 기와. 겸익 스님은 백제에 율장 등을 가져와 계율을 중시하는 백제율종을 일으켜 세웠다.
〈부여읍지(扶餘邑誌)〉는 부여 대조사(大鳥寺)가 겸익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위는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우리나라 최초의 인도 구법승 추앙
정확한 사료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중인도서 ‘계율’ 공부, 백제 율종 세워
백제불교 계율생활화운동 전개 토대
 
구법승 중 널리 알려진 〈왕오천축국전〉의 혜초 스님이 있지만 그보다 200년 앞서 인도로 건너가 불경을 가져온 스님이 있었다. 바로 겸익(謙益) 스님이다.

겸익(謙益)스님은 백제 무령왕(501~523)과 성왕(523~554) 대에 활동한 백제 스님으로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로 인도에 가서 불교를 구해온 구법승(求法僧)이다.

백제의 불교 수용 및 발전은 신라보다 앞섰지만 사료의 빈약함으로 구체적인 모습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때문에 백제의 불교 수용과 발전 시기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직접 인도로가 구법활동을 한 겸익 스님은 백제불교 발전의 증거다.

겸익 스님은 백제 율종의 시조로 귀국 후 인도에서 가져온 계율서들을 통해 백제 불교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백제의 경우, 겸익 스님이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나기 전 100여 년 간의 사료가 드물다. 하지만 겸익 스님이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날 정도였으면 이전 백제불교의 성세가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겸익 스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사료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1917년 이능화(李能和) 박사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서 인용한, 현재 존재하지 않는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이 유일한 사료다.

〈미륵불광사사적〉에 따르면 겸익 스님은 백제 승려로 성왕 4년(526년)에 바닷길로 인도에 가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에서 수학하고 인도승려 배달다(倍達多) 삼장과 함께 아담장과 오부의 율문을 갖고 돌아와 번역함으로서 백제불교 발전에 큰 공을 세운다.
 
백제불교의 위기 속에 구법행 결심

겸익 스님이 당시 인도로 간데에는 백제불교의 위기감이 있었다. 백제는 384년 동진(東晋)에서 건너온 마라난타(摩羅難陀) 스님에 의해 불교가 도입된 이후 남조(南朝) 국가들과 교류하며 불교문화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475년 고구려 첩자였던 도림 스님이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해 백제의 정보를 고구려로 빼돌렸고, 고구려군에 의해 개로왕이 죽음을 당하는 등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다. 스님의 세작활동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이후 백제불교의 신뢰가 떨어졌으며 교단 운영의 문제점도 대두됐다. 위기에 처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를 결심하는데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는 역할 또한 불교계가 맡아 교단과 계율 정비의 필요성이 강해졌다.

특히 중국과 고구려 불교의 수입보다 백제 스님들의 구법활동이 필요했는데 특히 계율(戒律)을 엄정히 하며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욕이 커지며 더욱 이러한 활동이 절실했다.

사료를 보면 겸익 스님은 ‘율을 구하는 것을 마음으로 맹세하고(沙門謙益 矢心求律 航海以轉至中印度常伽那大律寺)’ 구법활동을 떠났다. 귀국 후 경전을 번역하는 데 있어 특히 율부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는 점으로 보아 구법동기에서도 율을 구하는 것이 큰 부분을 차지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인도에서 전해진 사대광율(四大光律)이 번역돼 있었다. 동진에서 남북조 초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오부(五部) 중 사부(四部)의 율이 중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근본유부율(根本有部律)을 제외한 이것들은 각각 번역돼 중국에서는 네 가지 광율이 확립됐다. 이 사대광율은 백제에 전해져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부율 중 음광부의 율 및 근본유부율은 찾지 못하여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백제도 얻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과 더불어 백제 스님들은 음광부의 율 및 근본유부율을 구하는 구법동기를 갖게 된다.
 
뱃길따라 인도 구법, 율서 갖고 귀국

〈미륵불광사사적〉에 따르면 겸익 스님은 백제 성왕 4년인 병오년에 인도에서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인도에 간 것은 526년보다 최소 10여 년 앞선 510년대로 추정된다.

겸익 스님은 배를 타고 인도로 간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서 양나라로 배를 타고 간 후, 다시 인도로 가는 코스는 당시에 이미 개척된 상태였다. 백제는 543년 부남(扶南, 캄보디아)과 교역한 바 있고, 554년에는 왜국에 보낸 물품 가운데 북인도 지방에서 산출되는 양모를 주성분으로 하는 탑등(taptan)이 포함된 것에서 보듯, 해양활동이 활발했다.

〈삼국사기〉를 보면 무령왕대 조공기록은 단 2건으로 무령왕 12년(512) 및 21년(521)에 각각 양나라에 조공사를 파견하고 있다. 따라서 겸익이 5년 이상 구법활동을 했다는 전제 하에 526년 귀국했으므로 무령왕 12년(512)에 출발한 조공사절단의 배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인도에 도착한 겸익 스님은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에서 산스크리트어를 5년간 익히고 율부(律部)를 전공했다.

겸익 스님은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 문헌을 가지고 백제에 귀국했다. 〈아비담장〉은 삼장(三藏 - 경장, 율장, 논장) 가운데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논장(論藏)이다. 당시 인도의 여러 부파(部派)의 특성을 잘 말해주는 논(論)을 구해왔다는 것은, 불교 최신 이론을 백제에 도입한 것이다.
 
귀국 후 역경사업 앞장, 백제율종 시조

그의 귀국 후 활동으로 주목되는 것은 역경작업이었는데 이는 국가차원의 사업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가 귀국하자, 백제 성왕이 직접 성문 밖으로 나와서 의장을 갖추고 북과 피리를 불며 성대한 환영 행사로 그를 맞이했다고 한다.

성왕은 겸익 스님에게 안주할 절을 제공했고, 이곳에서 그는 범본 72권을 왕실 및 국가의 후원으로 배달다삼장과 백제 승려 28명과 함께 역경사업에 매진했다. 특히 역경된 경전 중 설일체유부의 논장과 율장으로 생각되는 〈비담〉과 〈신율〉은 성왕이 직접 그 서문을 쓰고, 태요전에 보관할 만큼 불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매우 의의가 컸다. 〈미륵불광사사적〉에는 담욱(曇旭)과 혜인(惠仁) 스님이 율부에 대한 주석에 해당하는 소(疎) 36권을 써서 왕에게 바치자, 성왕이 번역된 새로운 율(新律)에 서문을 쓰고 태요전에 보관했으나, 이를 널리 보급하지는 못했다고 전해진다.

겸익 스님이 주도한 역경사업은 성왕 재위 기간 동안 대대적으로 행해졌으며 그 결과 백제 불교는 더욱 융성해졌다. 백제는 중국에서 수입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직접 배우게 된 것이다.
 
일본에 계율 전해, 비구니 계 전파도

그러나 안타깝게도 겸익 스님이 가져온 불경과 번역본은 현재 전해져 오지 않고 있다. 그와 관련된 기록도 〈미륵불광사사적(彌勒佛光寺事蹟)〉, 충남 부여군 성흥산(聖興山)에 위치한 대조사(大鳥寺)에 겸익 스님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는 정도다. 그가 언제 태어나고 입적했는지 또한 알 수 없다.

하지만 겸익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백제승들의 구법활동은 단지 선진적인 불교를 배워 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일본에 전하는 전법활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계율불교는 일본에 전해질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러 일본 계율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백제에서는 최초로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는데 성왕 31년(554년)에는 일본으로 승려들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율사를 파견해 일본 계율불교의 기초를 다지기도 하였다. 위덕왕 35년(588년)에는 일본 최초의 비구니 스님들이 백제에 직접 와서 계법을 배우고 계를 받아 일본으로 돌아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법왕 1년(599) 12월 살생금지령(令)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매를 방생하게 하고 어렵(漁獵)의 도구도 모두 불사르게 하였다.

당시 살생금지령은 자비(慈悲)와 계(戒)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정신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는 계율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이었다. 확대해 보자면 백제불교가 법왕 대에 이르러서는 범국민적인 계율생활화 운동을 전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보면 백제불교가 법왕 대에 이르러 비로소 대사회적 영향력을 갖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겸익 스님이 귀국한 제26대 성왕 대부터 백제불교는 계율 강화를 기치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높여온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가 법왕 대의 살생금지령인 것이다. 백제시대 불교에 대해 보다 정확한 모습을 살피기 위해서는 겸익 스님의 인도 구법활동과 그가 귀국 후 활동한 모습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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