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3. 인도 구법행

실크로드 3D조감도. 당시 인도로 향하는 육로는 사막과 높은 산맥을 넘는 험난한 길이었다 구법승들은 이길을 걸어 동아시아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싹틔웠다.
부처님 교화성지 참배… 불전 들여와
초기 간다라지역, 후기 인도 중 하부
한국출신 14명 중 귀국한 스님 2명 불과
일연 스님 “구름따라 돌아온 이 없어라” 묘사

인도로 떠난 구법승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다. 육로와 해로가 그것이다. 해로는 바람과 해류를 잘 타면 그나마 위험을 줄일 수 있었지만 육로에는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구법승들이 택한 육로는 거대한 산맥과 광활한 사막으로 오늘날에도 쉽게 지날 수 없을 정도로 험하다.

장안에서 서쪽으로 돈황으로 가면 파미르고원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이 펼쳐진다. 동서로 6천리, 남북으로 1500리라는 거대한 이 사막을 지나면 7000m가 넘는 산들이 수없이 펼쳐지는 힌두쿠시 산맥이 나온다.

이런 길을 걸은 구법승들에 대해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귀축제사(歸竺諸師)’란 글로 그 모습을 표현했다. ‘천축으로 돌아간 스님들’이란 뜻이다. 불교의 본고장인 천축으로 가는 것을 돌아간다고 표현하였다.
일연 스님은 여기서 ‘천축의 하늘은 아득히 겹겹산인데, 가련하게도 유사(遊士)는 허위허위 오르는구나’라고 기리는 시를 지었다. 유사들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떠난 스님들이다. 과연 구법의 길을 떠난 스님들 중 무사히 돌아온 이는 몇이나 될까.

〈대당서역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에 신라인 최초로 인도로 간 스님으로 기록된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 스님은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장안을 떠나 인도로 떠났다. 아리나발마 스님이 어떤 경로로 인도에 도착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스님이 장안을 떠난 것을 유추하면 육로로 인도에 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로를 택한 겸익 스님에 이어 육로의 아리나발마 스님은 인도 동쪽 비하르주에 위치한 나란다사에 도착했다. 아리나발마 스님은 당시 인도불교의 중심지인 나란다사에서 다양한 경전과 논서들을 보고 체득했다. 이를 패엽에 일일이 필사하던 스님은 신라로 돌아오는 뜻을 품는다. 하지만 그 바람도 헛되이 나란다사에서 7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혜업(惠業)·현태(玄泰)·구본(求本)·현각(玄恪)·혜륜(惠輪)·현유(玄遊) 등과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스님 등 총 14명의 한국 출신 스님들이 인도로 향했다. 이들 중 인도에 닿은 이는 9명에 불과하다. 이들도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정진했지만 대부분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인도에 닿은 9명 중 5명은 인도, 혹은 귀로에서 입적했으며, 3명은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중 백제의 겸익, 신라의 원표 스님 만이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 확인된다.

하지만 문헌에 기록된 것은 극히 소수의 예에 불과하다. 이름이 기록에 남지 않은 수많은 구법승들이 당시에 부처님 가르침을 쫓아 인도로 향했으며 구법여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이름이 없는 스님은 이러한 것들이 많았음을 생생히 전한다. 그들은 중국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파로사에 이르렀으나 병을 얻어 입적한다.

남해는 남중국해의 항구로 당시 남해군으로 불린 광주(廣州)를 일컫는다. 파로사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서북부 끝의 브루어(Breueh)섬으로 여기서 인도로 가는 항로는 둘로 나뉜다.

서쪽으로 향하면 스리랑카가 나오며 북쪽으로는 인도 동해안이 나온다.

인도를 지척에 두고 두 스님은 세상을 떠났다. 일연 스님은 이러한 수많은 구법승의 죽음에 대해 ‘달은 몇 번이나 외로운 배를 떠나보냈는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는 한 사람도 없어라’라고 노래했다.

10명 중 2~3명만 돌아온 길

비단 한국에서 출발한 스님들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중국 등 구법승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름이 알려진 구법승 170명 중 147명이 인도를 향해 떠났다. 이중 12명의 스님들이 인도로 향하는 중 병사하거나 난을 당해 입적했으며 110명이 인도에 도달했다. 나머지 25명의 스님들 중 18명은 도중에 귀국했으며 7명의 행적은 확실치 않다.

전체의 약 76%가 인도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지엄(智嚴), 현조(玄照), 법우(法遇), 회문(懷問) 스님 등은 2회 이상 인도에 갔다.

인도에 도착한 스님 110명 중 19명이 인도에서 혹은 귀로에서 입적했다. 나머지 68명이 중국으로 귀환했으며 24명의 행적은 불확실하다. 121회 중 74회 귀환한 것으로 살아서 돌아온 회수가 62%에 불과하다. 매우 험난한 길에 비해 비교적 많은 수가 돌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생환은 이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중도 귀환한 이들도 상당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404년 중국을 떠나 437년에 돌아온 중국 지맹(智猛) 스님의 일행은 총 15명이었으나 9명이 파미르고원에 이르기 전 귀환했으며 6명 중 1명이 고원에서 사망해 5명이 인도에 도착한다. 다시 인도 순례에서 3명이 사망해 2명만이 귀환했다. 420년에 중국을 떠난 담무갈(曇無竭) 스님의 일행도 총 25명이었으나 히말라야 산맥을 넘으며 12명이 사망했으며, 인도 순례에서 8명이 사망한다. 〈불조통기〉에는 25명 중 담무갈 스님만이 생환했다고 전한다. 극단적인 예 같지만 문헌이 살아서 돌아온 이들을 중심으로 기록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0명 중 2~3명만이 살아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다라 지방인 스왓의 스투파
인도에 간 스님들은 무엇을 보고, 갖고 왔는가

구법승들이 인도에 간 것은 율장 등 불교의 원전을 구하고 성지를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구법승들이 방문한 곳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간다라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 서북부지역이며 하나는 부처님 성지가 밀집된 갠지스강 중하류 지역이었다. 서북부지역은 페샤와르 일대의 간다라 외에 나가라하라, 웃디야나, 카슈미르가 있다.

갠지스 강 중하류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보드가야가 있으며 당대 교학의 중심지였던 날란다가 있다. 또 쿠시나가라, 바이샬리, 왕사성, 바라나시 등도 있다. 초기 구법은 주로 간다라 지역에서 진행됐지만 후기에는 인도중하부 지역으로 진행된다. 이때까지 늦게 밀교계통의 불교가 인도에서 성행했기 때문이며 이에 따라 중국과 한국에도 밀교가 전해진다.

스님들은 구법기에서 많은 물품을 챙겨 귀국에 올랐는데 먼저 경율론의 삼장이 있으며 불사리, 불상 등이 있었다. 이 밖에 보리수 잎, 염주, 인도비문도 갖고 돌아왔다.

특히 구법승들은 인도 불교건축양식을 중국과 한국에 전하기도 했는데 7세기 보드가야의 항마촉지인을 한 성도상이 장안으로 들어오며 널리 퍼지게 된다.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상도 보드가야의 원류가 흐르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있다.

한국에서는 7세기 이래 인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드러나는데, 겸익 스님 등 몇 명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구법승들이 이시기 집중적으로 인도로 떠난다.

구법승들이 인도로 떠난 이유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보다 부처님 가르침으로 뭇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지기 위한 더 큰 원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연 스님도 “모두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르며 석가모니의 교화를 보려고 인도에 갔다”고 썼다. 이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경전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를 가지고와 대중을 이롭게 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기록은 그들의 영향에 비해 미미하다. 그들 중 살아 돌아온, 특히 한국에까지 돌아온 이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적을 되짚는 것은 이 시대 불자들의 과제일 것이다.

교학의 중심지였던 인도 나란다 대학의 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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