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구법승 - 7. 무상 선사

중국 500나한도 중 455번째 조사에 올라있는 정중 무상 선사
신라왕자 출신…출가해 唐 유학
정중종 열고, 새 흐름 만들어
마조 도일에 영향, 구산선문 원류

중국 사천(四川)에는 남종(南宗)도 북종(北宗)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일문(一門)이 전해진다. 바로 정중종(淨衆宗)이다. 지난 일들을 되새기지 않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항상 지혜를 간직하는 것을 종지(宗旨)로 하는 정중종. 이 정중종을 일으킨 이가 바로 정중 무상(淨衆 無相, 684~762) 선사다. 정중종은 사천성 정중사(淨衆寺)에 머무른 무상 선사의 선법을 말한다.

사실 정중 무상 선사가 알려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908년 금세기 불교사의 큰 수확인 돈황의 발굴과정에서 무상 선사의 게송인 〈무상오갱전(無相五更轉)〉과 〈무상어록(無相語錄)〉이 발견되며 긴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돈황문서 속에서 이들이 발견되며 1930년대부터 중ㆍ일 학자들 사이에 무상 연구가 치열하게 이뤄졌다.

중국의 석학 호적(胡適)과 일본인 학자 야마구찌(山口瑞鳳) 등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의 무상 연구가 속속 나왔다. 그에 비해 국내 학계의 연구는 지극히 미미했다.

그는 놀랍게도 김(金)씨 성을 가진 신라왕자 출신으로 중국 500나한 중 455번째 조사(祖師)에 올라 있다.

2005년 쓰촨성 대자사에서 열린 첫 학술연찬회를 알리는 글이 대자사 산문에 걸려있다.
사천에서 지선 선사 문하로

무상 선사가 출가하게 된 계기는 막내 누이의 출가가 큰 영향을 미쳤다. 무상 선사에게는 막내 누이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 혼사(婚事)가 진행되자 스스로 칼로 얼굴에 상처를 내어 속가를 등지고 출가했다. 누이가 도를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을 보고 무상 선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녀자도 저와 같이 도에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 어찌 머뭇거리고 있겠느냐”며 부왕의 뜻을 거절하고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무상 선사는 신라 군남사에서 출가해 제방을 두루 참방하며 수도하다 46세이던 해에 바다 건너 당나라로 유학의 길에 올랐으니, 당 개원 16년(729)이었다. 그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 이르러 당 현종을 알현하고 선정사(禪定寺)에 머물렀다.

그 사이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물음을 구했다. 무상 선사는 장안을 떠나 사천지방으로 들어가 덕순사(德純寺)의 지선(智詵) 선사를 참알했다. 지선 선사는 5조 홍인 대사의 제자로서 신수, 혜능 선사 등과는 동문 법형제였다. 지선 선사는 홍인 문하에서 득법한 후에 사천지방에 와서 교화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연로하고 몸이 쇠약해 무상 선사를 그의 입실제자인 처적(處寂) 스님에게 안배했다.

하지만 처적 스님은 자신을 찾아온 무상 선사를 쉽게 맞아주지 않았다. 그때 처적 스님이 병을 핑계대면서 무상 선사를 만나 주지 않자 무상 선사는 손가락 하나를 태워 연지공양(燃指供養)을 올렸다. 처적 스님은 그의 신심을 보고 사중에 머물게 하였다.

당시 지선 선사의 문하에는 또 다른 한 사람의 처적 스님이 있었다. 그는 뒷산인 북산에 거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북산란야(北山蘭若) 처적이라 불러 두 사람을 구분하였다. 그는 육신통이 있었다.

북산 처적 스님이 대중들에게 내일 외국에서 온 스님이 참례하러 온다고 하니, 과연 그 다음 날 저녁에 무상 선사가 북산의 처적 스님을 찾아왔다. 북산 처적 스님은 자기의 가사를 벗어주고 무상(無相)이란 법호를 내렸다.

무상 선사는 이미 처적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나 한편으로 북산 처적 스님에게 더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최후에는 역시 처적 스님의 법을 계승하게 되었다. 무상 선사는 천곡산에 들어 두타행을 실천한다. 무상 선사는 처적 스님과 함께 지선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법형제가 된다. 주로 가르침은 처적 스님에게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계보상으로는 처적 스님과 함께 지선 스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2005년 10월 대자사에 세워진 <무상선사행적비>
정중종의 형성

무상 선사는 처적 스님의 문하에서 2년간 수학한 후, 천곡산(天谷山)으로 처소를 옮겨 거주하였다. 무상은 심산유곡의 암굴에서 홀로 두타행(頭陀行)을 닦았다. 며칠 동안 선정삼매에 들어 맹수들도 감복하고 호위할 정도로 수선에 몰두하였다고 전해진다.

안사의 난 이후 당 현종이 사천으로 파천해 왔을 때 무상 선사는 뛰어난 신승(神僧)으로 세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당 현종이 그를 접견하고 정중사(淨衆寺)에 주석하게 했다. 당 개원20년(732) 4월 당화상 처적 스님은 무상을 불러 가사를 전수하고 “이 가사는 달마조사가 전한 법의인데, 무후에 의해 지선화상에 전해지고, 화상이 나에게 전한 것을 오늘 그대에게 전하노라. 그대는 스스로 잘 보호하여 나의 선법을 크게 선양하도록 하여라. 스승을 능가하여야 훌륭한 제자가 되는 법이니, 그대는 정중사에 머물며 크게 정중선을 일으키도록 하라”고 후사를 부촉하고 원적에 들었다. 이로부터 정중종(淨衆宗)의 선법이 개창되게 된 것이다.

무상 선사는 정중사에서 개당한 이래 20년간 교화를 펴게 된다. 그는 매년 정월과 12월에 도량을 건립하고 대중을 위해 설법하였는데 적게는 400, 많게는 1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하였다고 전해진다.

〈역대법보기〉의 기록에 따르면, 무상은 먼저 인성염불(引聲念佛)을 하게 되는데, 한 목소리의 숨이 다하고 목소리가 끊어졌을 때 삼구설법(三句說法)을 하였다고 한다.

삼구란 무억(無憶. 기억을 없앰), 무념(無念. 망념을 없앰), 막망(莫忘. 망각하지 않음)으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말하는 것이다. 종밀의 〈원각경대소초〉에도 마음에 지난 일들을 추억하지 않는 것이 무억(無憶)이며, 미래의 영고성쇠에 염려하지 않음이 무념(無念)이며, 항상 지혜와 상응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막망(莫忘)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한 바깥 경계(外境)에 끄달리지 않음이 무억이며, 내심에 미혹되지 않음이 무념이며, 수연(隨緣)하여 의지함이 없음이(無寄) 막망이라 설하여, 삼구설법이 계정혜 삼학의 등지(等持)임을 주장하고 있다. 무상은 이러한 삼구설법을 총지문(摠持門)이라 말하고 있다.

〈역대법보기〉에는 “망념이 일어나지 않음(念不起)이 계문(戒門)이요, 정문(定門)이며, 혜문(慧門)이다. 무념(無念)은 계정혜를 구족한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문을 통해 깨달았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이 설한 삼구설법은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염불기(念不起)”의 무념(無念)의 경계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이 된다.
무상은 이러한 삼구, 삼학의 법문이 달마로부터 전해내려 오는 것이라고 하여 사천 선종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사천성 시방현 나한사 오백나한전에 모셔진 무상 선사상
마조도일 선사에 영향

이런 무상 선사의 제자로는 무주 스님이 있다. 마조 도일 선사 역시 무상 선사와 같이 처적 스님에게 사사를 받아 무상 선사와 법형제 또는 사제의 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상 선사의 법계를 살펴보면 사천의 선종은 5조 홍인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인 자주지선(資州智詵)을 초조로 하여 처적(處寂)-무상(無相)으로 계승돼 정중종(淨衆宗)을 형성하고, 무상의 법계는 다시 무주(無住)에게 전승되어 보당종(保唐宗)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사천지역은 스스로 선종의 정통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선사상을 전개한다.

당시 중국의 선종분포를 보면 북종선과 남종선과 더불어 사천성에서 무상 선사가 창시한 정중종파가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북쪽의 신수 대사를 정점으로 하북성에 기반을 둔 북종선과 남쪽의 혜능 선사 계열의 광동성에 기반을 둔 남종선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돈황에서 발견된 전법보기와 능가사자기에서는 5조 홍인 대사의 법이 북종선을 세운 신수 대사에게 전해졌다고 기술한다. 하지만 남종선의 종조 혜능 선사의 제자인 하택 신회는 5조 홍인 대사로 부처 혜능 선사가 법통으로 이은 징표로 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반격한다. 또 한편으로는 무상의 제자인 무주 스님이 〈역대법보기〉를 쓰며 홍인의 가사가 지선 선사에게 이어지고 처적, 그리고 무상에게 다시 이어졌으며 다시 무주에게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지거가 지었다는 보림전에서는 중국 선종사에 큰 영향을 미친 마조 도일 선사도 무상 선사의 제자라고 주장하는데 만약 이러한 내용이 맞다면 한국 조계종 종조로 추앙받는 신라 도의국사는 마조의 제자 지장의 법을 이었기 때문에 그 법이 이어지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일본 선종도 임제 선사를 뿌리로 하기에 황벽, 백장 선사로 거슬러 올라가 마조 스님에 까지 닿는다. 결국 마조 도일 선사가 무상 선사의 제자라면 무상 선사의 스승 지선 선사가 5조 홍인 스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6조 혜능 선사와는 서로 갈래가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동북아에서 남종선이 차지 하고 있던 위치를 정중종파가 차지하는 것으로 한중일 모든 선종파의 큰 줄기가 무상 선사의 후예들로 바뀌는 것이다.

무상 선사의 법맥은 남북종 분립 이전의 한국선의 원류를 살필 수 있게 한다. 5조 홍인 선사의 법맥에서 출발한 사천 선종을 집성한 정중종은 무상 선사와 긴밀한 관계 였던 마조 도일 선사로 이어지며, 또 그 영향은 신라에 까지 이어진다.

무상 선사는 대중교화를 위해 시정에서 출재가 남녀들에게 수계를 했는데 이 무렵 티베트 사절단을 성도에서 만나 가르침을 주었으며, 중국불교가 티베트로 진출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무상 선사는 중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삶과 사상의 흔적은 중국을 넘어 티베트와 돈황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그 법맥은 한국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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