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정신 담은 신라고찰 김천 직지사(直指寺)는 백두대간의 웅장한 기운을 품고 있는 황악산(黃嶽山 1,111m)을 등지고 앉은 유서 깊은 도량이다. 418년 아도화상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이 법흥왕 14년(527)이라는 점에서 그리 신빙성은 없다. 다만, 아도화상이 활동한 모례원과 도리사 등이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신라불교의 전법지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에 담긴 의미가 흥미롭다. 직지라는 말은 선종의 용어에서 온 것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는 말로써 가르치는 경지를 넘어서 인간의 본성을 직접 꿰뚫고 들어가 성불을 한다는 것이다. 사변(思辨)이 아닌 직관으로
허균이 건봉사에서 지은 시에서 시적 반전이자 허균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하는 대목은 “어찌 마음 씻고 참선 배워 인간의 노병사를 마치지 않는가?”라는 부분이다. 허망한 명리를 따라 다니지 말고 불성을 찾아 자유로운 길을 가라는 건봉사 스님의 충고를 듣는 대목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시의 전개를 보면 허균은 스님의 충고를 슬쩍 비켜간다. 그는 조선전기의 경직된 도학주의 문학에서 보다 개성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학을 지향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건봉사라는 공간은 ‘인격의 완성’이라 할 성불을 추구하는 공간이기보다는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이상적 공간으로 인식하고 내일이면 떠나야 할 현실을 들춰냈다. 그 시의 말미는 다음과 같다. ? 초창산문역이별(?山門亦離別) 명조불서척공장(明朝拂曙擲杖) 하인갱방원통경
젊은 선비의 눈에 비친 건봉사 이인엽이 금강산 유람을 할 때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 조카뻘 되는 최창대(崔昌大 1669~1720)였다. 최창대는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폈던 최명길(崔鳴吉)의 증손이다. 1691년(숙종 17) 외숙부를 따라 금강산 유람을 나선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요즘 같으면 대학교 졸업 반 정도일 나이에 최창대는 건봉사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 고도통행세(古道通行細) 제료면세분(諸寮面勢分) 장송전석벽(長松纏石壁) 복각반한운(複閣半寒雲) 수대춘상응(水?春相應) 상림정역문(霜林靜亦聞) 불수담법게(不須談法偈) 심이원인분(心已遠人紛) ? 오래된 길 통행하기에 좁아 동행인들 지세를 따라 나뉘었네. 늘어선 소나무 석벽 따라 얽히고 겹 문설주에 차가운 구름이 한창.
염불만일회의 도량 건봉사(乾鳳寺)는 신라고찰이다.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짓고 원각사라 이름 지은 것이 건봉사 역사의 시작이다.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화상이 중건하고 정신(貞信) 양순(良順) 스님 등과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사하면서 절의 면모가 일신 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건봉사의 만일염불결사는 규모가 대단히 커서 스님 31명과 재가불자 1820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건봉사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염불승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했다는 이야기는 신라시대 정토신앙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임진왜란 이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찾아 온 부처님 치아사리를 모시면서 건봉사는 다시 사격이 확장 되었다. 1802년(순조2)부터 32년간 지속된 제2차 염불만일회를 통해 다
아침과 저녁, 그 다른 느낌 그렇다면 김상헌에게 지어준 장유의 시는 어떤 것일까? 〈계곡선생집〉제29권에 실린 5언율시 ‘광릉을 봉심하러 가는 도중에 시 한 수가 이루어졌기에 청음 종백과 해숭 도위에게 써서 드리다[奉審光陵途間吟成 錄呈淸陰宗伯海嵩都尉]’이다. ? 옹전경사원(擁傳經沙苑) 명가도석량(鳴珂度石梁) 조휘쟁엄영(朝暉爭掩映) 악색송청창(嶽色送靑蒼) 요요천원형(繞川原逈) 인온초수향(??草樹香) 정도접헌개(征途接軒蓋) 쇠졸역휘광(衰拙亦輝光) ? 승전을 받들고서 모래 화원 지나가고 말방울 울리면서 돌다리 건너가네. 다투어 명멸하는 눈부신 아침 햇살 짙은 쪽빛 배어나는 산악의 색깔 멀리 강과 언덕 휘둘러 에워싸고. 숨이 온통 막힐 듯 자욱한 초목 향기 수레를 접하고 이렇게 길
세조의 능침사찰로 사격 일신 봉선사(奉先寺)는 고려 광종 때의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에 의해 운악사(雲岳寺)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는데 그 역사적 자취는 기록이 없어 희미하다. 그러나 15세기 중엽 인근에 조선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이 들어서고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크게 사찰을 중창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른바 능침사찰로 정해지면서 희미하던 법등이 큰 빛을 발하게 된 셈이다. 세조와 정희왕후는 불심이 깊었다. 세조의 능침사찰로 봉선사를 중창한 나라에서는 절에 전답과 노비 그리고 돈을 내렸으며 세조를 위한 천도재도 크게 베풀었다. 세조의 아들 예종은 절의 현판을 친필로 써서 하사했다. 절의 이름은 ‘선왕의 능을 받들어 모신다(奉護先王之陵)’는 뜻에서 따 온 것이다. 이후 봉선사는 명종 때
산사에서 세속의 먼지 씻기 황현의 ‘약속대로 해학과 함께 화엄사에 가다[赴海鶴華寺之約] 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두 번째 수는 시각과 청각을 총동원하여 화엄사를 느끼게 한다. ? 봉봉류수쇄춘성(蓬蓬流水碎春星) 환패종쟁갱가청(環佩琮更可聽) 화하문승미빈백(花下問僧眉?白) 산중견조우모청(山中見鳥羽毛靑) 흥란주찰빈투현(興?酒札頻投縣) 음고혜성구재정(吟苦鞋聲久在庭) 회수오갱종락처(回首五更鐘落處) 영원도사불증경(靈源都似不曾經) ? 출출 흐르는 시냇물에 봄밤 별빛 부서져라 쟁글쟁글 패옥 소리를 다시 들을 만하네. 꽃 아래서 스님 만나니 눈썹 귀밑털 희고 산중에서 새를 보니 새의 깃털은 푸르구나. 흥 무르녹자 술 받으러 자주 읍내 보내고 괴로이 읊어라 뜰엔 신 끄는 소리 들
신라 화엄십찰의 장엄미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華嚴寺)는 이름 그대로 화엄의 이념을 받드는 사찰이다. 화엄은 꽃들의 장엄이다. 물론 꽃이란 향기를 뿜어내는 식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일체중생이 그 자체로 불성을 지닌 존재임을 밝히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라 의상 대사는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전국에 큰 화엄사찰을 조성했다. 부석사와 해인사 등이 대표적인데 화엄사도 화엄십찰의 하나로 꼽힌다. 8세기 연기조사에 의해 대가람으로 사격을 갖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창건 배경에서부터 다양한 설화가 전하며 그 깊은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유서 깊은 절은 역사적 진실보다 신앙적 감동이 많다. 4사자3층 석탑에 얽힌 연기조사 이야기와 각황전 창건이야기 등은 화엄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중생들의 귀의
전쟁에 얼룩진 산사의 애처로움 이항복은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때의 문인이다. 7년에 걸친 전쟁 뒤에 용문사는 상당히 피폐했다. 시의 도입부에는 그러한 정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오래된 절에 스님은 몇 명 되지 않고 축대가 허물어져 늙은 나무가 더 애처롭게 보인 것이다. 이어서 요란한 물소리와 고요한 말소리를 대비시켜 시적 긴장을 팽창 시키고, 깊은 산의 적막에 빠져 있는 북쪽과 서쪽의 풍치를 보이며 더욱 애잔한 감상을 드러낸다. 마침내 시인은 구슬픈 노래 소리에 시 한수를 지을 생각마저 놓치고 만다. 구슬픈 노래는 새소리일 수도 있고 사람의 울음일 수도 있겠다. 이항복이 들린 용문사 풍경은 장엄한 도량이 아니라 전쟁에 피폐된 서글픈 풍경으로 객을 맞았다. 그러니 객인들 유장한 시를
천년고찰과 천년 은행나무 정상 해발고도 1157m의 용문산이 품고 있는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大境)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이 천년고찰은 1100살 은행나무와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된 용문사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담아 심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키가 40m로 우리나가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큰 키다. 큰 산과 큰 나무를 배경으로 한 도량은 깊은 역사와 함께 많은 고승들의 흔적이 있기 마련. 용문사도 예외는 아니다. 신라의 대경대사 창건 이후 고려 우왕 4년(1378)에 정지국사 지천이 대장전을 짓고 개성 경천사에 있던 대장경을 이전하여 보관했다. 이 대장경은 원래 강화도 용장사에 있던 것으로 왜구의 노략질에 화를 입을까 염려하여 개성 경천
이근원통 수행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인 낙산사를 주제로 시를 지으려면 관음신앙과 낙산사의 역사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할 뿐 시적인 의미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시를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낙산사의 역사와 관음신앙에 관련된 상식이 없으면 시구의 깊은 뜻을 알아 챌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깊은 학문적 식견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김부의(金富儀 1079~1136)의 시 ‘낙산사’를 읽으려면 관음신앙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에 대해 알아야 한다. ? 일자등림해안고(一自登臨海岸高) 회두무부구진로(回頭無復舊塵勞) 욕지대성원통리(欲知大聖圓通理) 청취산근격노도(聽取山根激怒濤) ? 처음 오른 바다 언덕 높기도 하여라. 머리 돌리매 다시 묵은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 금강산과 설악산의 절경을 곁에 두고 일망무제의 푸른 동해에 접해 있는 낙산사(洛山寺)는 우리나라 관음신앙의 중심 도량이다. 신라 때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절을 창건했고 원효대사도 이곳에 와서 관음보살을 친견했으며 범일국사 또한 정취보살을 친견하여 절을 더욱 확장 했다고 전한다. 낙산사의 이름 역시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타락가산에서 온 적이다. 승경(勝景)으로서의 낙산사를 말할 때는 일출과 월출을 감상하는 풍류를 빼 놓을 수 없다. 낙락장송으로 둘러싸인 절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사랑한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이식(李植 1584~1647)이 “안견의 수묵화와 임억령의 시, 천년 가람은 두 사람의 시화로 기이해 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