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봉사 中

▲ 건봉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부도밭 전경. 젊은 선비 이인엽은 금강산 유람길에 건봉사를 들렀다.
젊은 선비의 눈에 비친 건봉사

이인엽이 금강산 유람을 할 때 동행한 사람이 있었다. 조카뻘 되는 최창대(崔昌大 1669~1720)였다. 최창대는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폈던 최명길(崔鳴吉)의 증손이다. 1691년(숙종 17) 외숙부를 따라 금강산 유람을 나선 그의 나이는 23세였다. 요즘 같으면 대학교 졸업 반 정도일 나이에 최창대는 건봉사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고도통행세(古道通行細)

제료면세분(諸寮面勢分)

장송전석벽(長松纏石壁)

복각반한운(複閣半寒雲)

수대춘상응(水?春相應)

상림정역문(霜林靜亦聞)

불수담법게(不須談法偈)

심이원인분(心已遠人紛)

 

오래된 길 통행하기에 좁아

동행인들 지세를 따라 나뉘었네.

늘어선 소나무 석벽 따라 얽히고

겹 문설주에 차가운 구름이 한창.

물방아 찧으며 서로 호응하니

서리 내린 고요한 숲에도 들려오네.

게송으로 담소할 필요 없으니

마음은 이미 속세에서 멀어지는 걸.

 

23살의 젊은 선비 최창대가 지은 ‘건봉사를 방문하다(訪乾鳳寺)’라는 시다. 그의 문집 〈곤륜집(昆侖集)〉제2권에 실려 있다. 시의 전반부는 평이한 묘사로 건봉사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미련의 대미는 23살의 청년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탈속적 면모를 보인다. 건봉사로 들어가는 동안 이미 마음은 세속의 번뇌 망상을 떠나 출세간의 고요 속으로 빠져 들고 있으니 굳이 법문(게송)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속진의 번뇌를 읊다

금강산 가는 길의 건봉사는 장송(長松)이 우거진 숲 속에 있고 동해도 가까워 선비들의 필수 유람 코스였으니 그 풍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건봉사에서 풍경만 읊은 것은 아니다.

조선중기 문장4대가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은 건봉사에서 곤고한 삶의 고뇌를 노래했다.

 

시월공산우(十月空山雨)

삼경원객심(三更遠客心)

조한침호유(早寒侵戶?)

징윤습의금(徵潤濕衣衾)

수대성환수(水?聲還數)

향등운욕침(香燈暈欲沈)

동명각안저(東溟却眼低)

용이교수심(容易較愁深)

 

시월 빈산에 내리는 비에

삼경 멀리 떠나온 객의 심회.

이른 추위 창틈으로 스며들고

눅눅한 습기 옷이며 이불을 적셔오네.

물방아 찧는 소리 거듭 돌아오고

향과 등불은 잦아드려 하네.

눈 아래 펼쳐진 동해 바다는

깊은 시름에 비교하기 쉽다네.

 

이식은 1631년(인조9)에 임금에게 밉보여 고성군 간성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때 건봉사를 자주 찾았는지 그의 문집 〈택당선생집〉에는 건봉사와 관련된 시가 5편 실려 있다. 여기 든 시는 ‘건봉사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자다(宿乾鳳寺廳雨)’이다.

좌천되어 변방의 현감이 된 당대의 문장가 이식. 건봉사에서 잠을 자는데 날은 추워지고 눅눅한 기운이 옷과 이불을 적시니 상당히 서글픈 상황이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젖어 있는 밤, 물방아 소리가 들려오고 마침 향과 등불도 사그라 드려고 하니 그 처량함이 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그 처량한 시름을 동해바다에 비교하며 시를 맺었다.

그렇게 풍진 생활로 간성현감을 지내던 이식은 드디어 왕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한결 밝아진 마음으로 3년간의 간성현감 생활을 마무리하며 지은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위향거승도(爲向居僧道)

부생반시비(浮生半是非)

 

여기 사시는 스님께 한 말씀 드리려오.

뜬구름 같은 인생 절반이 시비라오.

 

정말 우리 인생은 절반이 시시비비다. 온통 시끄러운 세상, 우리는 좋은 것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을 더 많이 말하고 듣고 보고 느끼며 살고 있다. 그게 중생계의 현상일 것이다.

 

좌절한 허균이 찾은 건봉사

허균(許筠 1569~1618)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35세 때의 일이다. 그도 당시 벼슬에서 파직되었는데 그 이유가 불교를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서애 유성룡에게 학문을 배우고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이달에게 시를 배운 당대의 엘리트 허균. 벼슬길에서 좌절한 그에게 건봉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건봉사재금강산(乾鳳寺在金剛山)

화궁표묘경운간(花宮??卿雲間)

중유선승옥설자(中有禪僧玉雪姿)

기가조반동림사(棄家早伴東林師)

〈중략〉

상봉문아고하사(相逢問我苦何事)

반세침감명여리(半世沈?名與利)

세심하불학참선(洗心何不學參禪)

료진인간노병사(了盡人間老病死)

〈후략〉

 

건봉사는 금강산 속에 있어

높고도 아득한 도량 세속과 구름사이네.

그 안에 한 선승이 옥설 같은 모습으로

집 버리고 일지감치 동림 스님의 짝이 됐네.

〈중략〉

만나자 나에게 묻길 무슨 일이 괴로워

반세상을 명리에 취해 있었는가?

어찌 마음 씻고 참선 배워

인간의 노병사를 마치지 않는가?

〈후략〉

 

이 시는 허균의 문집 〈서소부부고(惺所覆?藁)〉제2권에 실렸다. 제목은 ‘정상인에게 주다(贈靜上人)’이다. 시의 전체 내용으로 보아 가을밤에 건봉사에서 잠을 자게 되었고 교유하는 스님에게 주기 위해 쓴 것인데, 금강산 여행을 다녀오는 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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