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사 下

▲ 봉선사 일주문 전경. 선비들은 봉선사에서 여유와 흥취를 느끼며 시를 지었다.
아침과 저녁, 그 다른 느낌

그렇다면 김상헌에게 지어준 장유의 시는 어떤 것일까? 〈계곡선생집〉제29권에 실린 5언율시 ‘광릉을 봉심하러 가는 도중에 시 한 수가 이루어졌기에 청음 종백과 해숭 도위에게 써서 드리다[奉審光陵途間吟成 錄呈淸陰宗伯海嵩都尉]’이다.

 

옹전경사원(擁傳經沙苑)

명가도석량(鳴珂度石梁)

조휘쟁엄영(朝暉爭掩映)

악색송청창(嶽色送靑蒼)

요요천원형(繞川原逈)

인온초수향(??草樹香)

정도접헌개(征途接軒蓋)

쇠졸역휘광(衰拙亦輝光)

 

승전을 받들고서 모래 화원 지나가고

말방울 울리면서 돌다리 건너가네.

다투어 명멸하는 눈부신 아침 햇살

짙은 쪽빛 배어나는 산악의 색깔

멀리 강과 언덕 휘둘러 에워싸고.

숨이 온통 막힐 듯 자욱한 초목 향기

수레를 접하고 이렇게 길 가다니

변변찮은 이 몸에겐 또한 영광이외다.

 

장유는 아침나절 광릉을 향해 가며 만나는 풍경과 정취를 매우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오감을 자극하는 시어들로 광릉을 향해 가는 선비들의 행로를 묘사하고 있다. 말방울 소리를 들려주고, 눈부신 아침 해와 쪽빛 산악을 보여주고, 초목의 향기를 맡게 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광릉을 향해 가는 아침나절이 한 편의 시로 완성되었는데, 광릉에서 일을 다 보고 봉선사에 들린 이야기도 시로 지어져 전하고 있다. 그의 문집에 실린 ‘봉선사를 제목으로(題奉先寺)’라는 시에서는 광릉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봉선사에서 묵는 과정을 정갈하게 그렸다.

 

승집인왕사(勝集因王事)

자유본불기(玆遊本不期)

역정비개지(驛程飛盖地)

승원대상시(僧院對床時)

옥루종음철(玉漏鐘音徹)

금파찰경이(金波刹影移)

귀래진토리(歸來塵土裏)

왕적입신시(往跡入新詩)

 

빼어난 이 모임 왕릉 일 때문이지만

여기에 노닐 줄은 미리 알지 못했네.

마치 땅을 덮치듯 달려오니

절에서는 저녁공양 시간이로다.

옥루의 종소리 하늘을 뚫는 듯한데

금빛 물결에 절 모습 옮겨져 있네.

속진으로 돌아갈 때에

갔다 온 자취 새로 지은 시에 들어 있네.

아침에 올 때와는 사뭇 다른 여유와 흥이 느껴진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봉선사에 와서 저녁을 먹고 종소리를 듣는 그 여유 속에서 선비의 마음은 새로운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절에서 하루를 묵고 가는 그 마음이 드러난 결구는 한 수행자의 오도송에 가깝다. 속진으로 다시 돌아갈 때 뭔가 ‘새로운 마음’이 새로 지은 시에 들어 있다는 것은 자신도 몰랐던 흥취를 시로 표현했음을 말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비밀스러운 그 무엇을 독자들에게 상상해 보라고 맡겨 버린 듯이.

 

종명원사월함산(鐘鳴遠寺月含山)

은영촌등수리간(隱映村燈樹裡看)

청효독심전로거(淸曉獨尋前路去)

통음추색백운한(洞陰秋色白雲寒)

 

먼 절 종소리 들리고 달빛 산 머금었는데

어리비치는 마을 등불이

숲속에서 아른거리네.

이른 새벽 홀로 왔던 길 돌아보니

가을 그윽한 그늘 흰 구름에 더욱 차갑네.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시다. 제목은 ‘제봉선사(題奉先寺)’이며 그의 문집 〈문곡집〉제2권에 전한다.

어떤 연유로 왔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김수항은 지금 봉선사 근처에 있다. 그것도 이른 새벽이다. 새벽에 들려오는 절의 종소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빠지게 한다. 종소리가 들리는 그 시간 살아 온 날들을 회고 하는 한 선비의 심정은 어땠을까?

김수항 역시 오도송을 읊은 듯이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어떤 정황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가을의 이른 새벽 흰 구름이 풍경이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는 술회로 시를 마무리하고 말았다. “인생이라는 거? 이른 아침 흰 구름 같은 거야”라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절은 깨달음의 공간

아무래도 절은 깨달음의 공간이다. 절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시를 짓고 삶의 궤적을 더듬는 동안 가슴 속에 묻혀 있던 본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이 한 편의 시로 표현되는 것이다.

 

효몽회청성(曉夢回淸聲)

공렴만원춘(空簾滿院春)

암등고좌불(暗燈孤坐佛)

잔월독귀인(殘月獨歸人)

마답림화락(馬踏林花落)

의첨초로신(衣沾草露新)

전계명인수(前溪鳴咽水)

사소객래빈(似訴客來頻)

 

새벽꿈에 청량한 소리 들리더니

빈 주렴에 봄기운 가득하다.

어둑한 등불에 외로운 좌불상

지는 달빛에 홀로 돌아가는 사람 있네.

말은 숲 속 흩날리는 꽃을 밟고 달리니

옷은 풀잎에 맺힌 이슬에 젖는구나.

앞 시내 오열하는 물소리

마치 객이 와서 자주 하소연 하는 듯.

 

〈대동시선〉에 전하는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의 시다. 제목은 ‘저문 봄날 광릉 봉선사에서 자다(暮春宿光陵奉先寺)’이다. 제목부터 매우 서정적이고 운치가 있다. 이 시에 흐르는 분위기 또한 한 수의 오도송이라 할 만하다.

시를 절반 나누어 보면 전반부와 후반부의 시간과 공간이 다르다. 새벽 절집에서 잠을 자고 돌아가는 선비는 흩날리는 꽃길을 달린다. 꽃길, 그 길이 깨달음의 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마음이 이미 더없이 충만한 열락의 길, 그래서 시냇물 소리가 오열하는 듯 들리는 것으로 읽힌다. 물소리의 오열은 세상살이의 온갖 시름이겠거니.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