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上

▲ 화엄사의 중심공간 각황전(국보제 67호)
신라 화엄십찰의 장엄미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華嚴寺)는 이름 그대로 화엄의 이념을 받드는 사찰이다. 화엄은 꽃들의 장엄이다. 물론 꽃이란 향기를 뿜어내는 식물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일체중생이 그 자체로 불성을 지닌 존재임을 밝히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라 의상 대사는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전국에 큰 화엄사찰을 조성했다. 부석사와 해인사 등이 대표적인데 화엄사도 화엄십찰의 하나로 꼽힌다. 8세기 연기조사에 의해 대가람으로 사격을 갖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창건 배경에서부터 다양한 설화가 전하며 그 깊은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유서 깊은 절은 역사적 진실보다 신앙적 감동이 많다. 4사자3층 석탑에 얽힌 연기조사 이야기와 각황전 창건이야기 등은 화엄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중생들의 귀의처였는가를 말해준다. 화엄사는 신앙적 역사와 가치를 떠나서도 문화유산의 보고이기도 하다.

큰절로서의 화엄사는 역사의 흐름 속에 수없이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해 왔다. 도량이라는 유형의 존재는 전쟁과 노략질의 화마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가르침과 정신은 사라지지 않아 다시 불전을 짓고 향화를 사르며 불심을 이어 온 것이다.

다른 큰 절들에 비해 화엄사를 배경으로 지은 시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원래부터 화엄사를 읊은 작품이 많지 않은 건지 멸실 누락되어 전해오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비들의 시문집에 전하는 화엄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조선 후기의 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의 작품이 그의 문집 〈매천집〉에 전한다.

매천 황현은 전남 광양에서 출생했다. 1883년(고종 20) 초시에 1등으로 뽑혔는데 시험관이 시골출신이라고 2등으로 내려버렸다. 그는 중앙관료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회시와 전시를 치르지 않았는데 나중에 부친의 권유에 못 이겨 시험에 응시해 장원을 했다. 그러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이 이어지며 급변하는 정국에 수구파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 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구례로 낙향한 황현은 3000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글짓기에 매진했는데 역사연구와 경세학에도 깊이 빠졌다. 국권상실로 치닫는 위기를 느끼고 후손들이 민족의 정기를 이어가도록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등을 지었다. 1910년 8월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매천 황현의 템플스테이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구한말의 삼재(三才)로 불릴 만큼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황현. 그는 37세 되던 해에 화엄사와 관련된 시를 지었다. ‘약속대로 해학과 함께 화엄사에 가다[赴海鶴華寺之約] 라는 제목의 칠언율시 두 수가 〈매천집〉 제1권에 전한다.

 

마수종명이모천(馬首鐘鳴已暮天)

목란화노감당년(木蘭花老感當年)

벽사홍수조평중(碧紗紅袖嘲平仲)

춘초명금몽혜련(春草鳴禽夢惠連)

모우불사초아음(冒雨不辭招我飮)

사산구의여승면(思山久擬與僧眠)

독서대로유능기(讀書臺路猶能記)

전급분명백탑전(?級分明白塔前)

 

말방울 울리며 가노라니 날은 저물었는데

목단 꽃 시들었어라 번화한 때가 느껍구려.

푸른 깁 붉은 소매는 평중을 비웃었거니와

봄풀이랑 우는 새는 혜련을 꿈꾼 거고 말고.

비를 무릅쓰고 술자리 초대는 사양치 않고

산이 그리워 진작부터 스님과 자려고 했었네.

독서대 가는 길을 아직도 기억하거니

벽돌 계단이 분명히 흰 탑 앞에 있었지.

 

시의 제목으로 보아 황현은 해학이라는 스님과 교유를 한 것 같다. 첫 수에서는 스님과 함께 화엄사로 간 소감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다. 수련에서는 말을 타고 저물녘에 화엄사에 도착하고 보니 목단 꽃이 시들어 만개하던 한 때를 생각게 한다. 무상의 질서를 일몰과 시든 목단 꽃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이어지는 함련에서는 중국의 고사를 인용했는데 ‘푸른 깁 붉은 소매는 평중을 비웃었다’는 이야기들 등장 시킨다. 평중(平仲)은 송나라의 이름난 재상 구준(寇準)의 자이다. 시인 위야(魏野)가 준을 수행하여 섬부(陝府)의 사원에 가 노닐면서 각각 시를 쓴 일이 있었다. 뒤에 다시 함께 그 사원에 놀러 가서 보니, 구준의 시는 이미 푸른 깁으로 잘 싸놓았으나, 위야의 시는 그대로 방치하여 먼지가 끼어 있었다. 마침 그 일행을 수행했던 총명한 한 관기(官妓)가 즉시 자기의 붉은 옷소매로 먼지를 닦아내자, 위야가 천천히 말하기를 “항상 붉은 소매로 먼지를 닦을 수만 있다면, 푸른 깁으로 싸 놓은 것보다 나을 것을”이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唐?言 卷7〉에 전한다.

이어지는 ‘봄풀[春草]이랑 우는 새는 혜련을 꿈꾼 거고 말고’라는 대목도 중국 고사를 끌어 온 것. 송나라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시를 지으려는데 도저히 시상이 막혀 좋은 글이 떠오르지 않다가 꿈에 그의 친척 동생 사혜련(謝惠連)을 만나 “못 둑 위에 봄풀이 난다[池塘生春草]”라는 시구(詩句)를 얻어 시를 완성했다. 그래서 그는 그 구절을 귀신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자신의 말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후 꿈에 혜련을 보았다는 말은 명작을 완성했다는 듯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황현은 화엄사에 당도하여 목단을 통해 무상의 질서를 느끼고 도량의 아름다움을 통해 ‘잘 된 작품’을 귀하게 여기는 심미안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절에 닿은 선비의 마음은 가볍고 경쾌하다. 경련과 미련에서 본격적으로 마음을 드러내 하룻밤 절집에서 스님과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자게된 것을 즐거이 여기는 심사를 보여준다.

서른일곱 살의 선비 황현은 읽던 책과 세속의 수심을 내려놓고 화엄사로 템플스테이를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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