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사 上

▲ 직지사 대웅전(경북유형문화재 제215호)과 삼층석탑(보물 제606호)
선불교 정신 담은 신라고찰

김천 직지사(直指寺)는 백두대간의 웅장한 기운을 품고 있는 황악산(黃嶽山 1,111m)을 등지고 앉은 유서 깊은 도량이다. 418년 아도화상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이 법흥왕 14년(527)이라는 점에서 그리 신빙성은 없다. 다만, 아도화상이 활동한 모례원과 도리사 등이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신라불교의 전법지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에 담긴 의미가 흥미롭다. 직지라는 말은 선종의 용어에서 온 것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는 말로써 가르치는 경지를 넘어서 인간의 본성을 직접 꿰뚫고 들어가 성불을 한다는 것이다. 사변(思辨)이 아닌 직관으로 인간 실체의 궁극을 잡아채는 선종의 정신을 요악한 말이다.

직지사라는 절 이름이 아도화상에서 기인한다는 설도 있지만, 어느 시대부터인가 직지사의 수행가풍이 선종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절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고려 말과 조선의 초중기의 선비들이 직지사를 주제로 지은 시들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들이 보일뿐 선불교의 정신을 담아낸 경우는 없다. 목은 이색(李穡 1328~1395)의 시는 유학을 하는 선비들과 불교의 스님들과 교유가 깊은 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귀곡금거백련사(龜谷今居白蓮社)

앙려석재황악산(鴦廬昔在黃岳山)

보문운석욕복구(普門韻釋欲復舊)

목은로옹방투한(牧隱老翁方投閑)

천리구문감자외(千里求文敢自外)

제방앙풍무소간(諸方仰風無少間)

고래유석공유희(古來儒釋共游戱)

사해미천성가반(四海彌天誠可攀)

 

귀곡이 지금은 백련사에 기거하거니와

옛날엔 황악산의 앙려에 기거했었네.

보문사 풍류 스님은 집을 복구하려는데

목은 늙은이는 방금 한가히 있는 때라서

천리 멀리 글 구하는데 감히 거절하리요.

제방은 풍교 받들기에 작은 틈도 없으리.

고래로 유자와 불자가 함께 유희했거니.

사해와 미천을 참으로 따라잡을 만하네.

 

이색의 문집 〈목은집(牧隱集)〉 제21권에 실린 이시의 제목 자리에는 ‘전(前) 내원당(內願堂) 운 귀곡(雲 龜谷)이 백련사(白蓮社)에 있으면서 보문사주(普門社主)와 함께 장차 황악산(黃岳山)의 직지사(直指寺)를 중수(重修)하려고 노인(老人)에게 서신을 보내와서 연화문(緣化文)을 요구하다’라는 긴 글이 적혀 있다. 목은이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이다.

시에 나오는 ‘운 귀곡’은 스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운은 공민왕(恭愍王) 때의 선승(禪僧) 각운(覺雲)을 가리키고, 귀곡은 바로 그의 법호(法號)이다. 목은은 각운 스님이 직지사 중건을 위해 모연문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감회를 시로 적은 것이다.

둘째 구절의 앙려(鴦廬)는 부부금슬이 좋아 쌍으로 다니는 원앙새처럼 마주보며 서 있는 집채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각운이 한 때 살던 직지사의 좌우 익랑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목은은 친분이 두터운 각운 스님의 부탁을 어찌 거절하겠느냐고 장담하며 시를 전개시키고 ‘고래로 유자와 불자가 함께 유희했음’을 말하고 있다.

결구에 나오는 사해(四海)와 미천(彌天)은 중생계와 불국토를 은유하는 말이다. 미천은 불교적으로 말하면 미타천 즉 정토세계이고 유교적 입장에서는 아주 고매한 뜻을 비유하는 단어다. 그에 비해 사해는 인간이 사는 세상, 중생계인 것이다.

모연문 부탁에 즐거운 마음목은이 이 시에서 ‘사해와 미천을 따라잡을 만하다’고 한 것은 중국 진(晉)나라 때의 고승 도안(道安 312~385)과 관련된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도안(道安) 스님이 형주(荊州)에서 처음으로 문장가로 이름 난 습착치(習鑿齒)와 서로 만났을 적에 도안이 “나는 미천 석도안(彌天釋道安)이요” 하자, 습착지는 “나는 사해 습착치(四海習鑿齒)요.”라고 하여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불교와 유교라는 각자의 길에서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아무튼 목은 이색은 친분이 두터운 각운 스님의 모연문 청탁을 받고 불가의 스님과 유가의 선비는 오래전부터 친근했던 사실을 드러내며 기꺼이 모연문을 쓰겠다는 마음을 시로 표현했다.

 

한수조개력구승(閑隨?蓋歷溝?)

청일훈풍맥이등(晴日薰風麥已登)

관단재오심옥판(款段載吾尋玉板)

도리요객철금승(?梨邀客撤金繩)

청천입앙분신죽(淸泉入?分晨粥)

결월규렴체불등(缺月窺簾替佛燈)

삼십년전독서지(三十年前讀書地)

송삼의구벽층층(松杉依舊碧層層)

 

한가히 태수 따라 봇도랑 밭두둑 지나노니

개인 날 훈훈한 바람에 보리가 벌써 익었네.

관단마는 나를 태워 옥판을 찾아가는데

스님은 손님 맞으려 금줄을 걷어치우누나.

맑은 샘물은 동이에 길러 새벽 죽을 나누고

이지러진 달은 주렴에 비춰

부처 등불 갈음하네.

삼십 년 전에 내가 글을 읽던 곳인데

소나무 삼나무는 여전히 층층이 푸르구나.

 

이 시는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작품이다. 〈점필재집(畢齋集)〉 제16권에 실려 있다. 제목 자리에는 ‘이 군수 및 최태보 삼 형제와 함께 직지사에서 노닐었는데, 이날 군수는 돌아가고 다만 최태보와 함께 자다[與李郡守崔台甫三昆季遊直旨寺是日郡守還獨與台甫宿]’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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