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종 종정 영산(靈山) 홍파(泓坡) 스님
창종 60년‧한일수교 60년 맞는 관음종
‘강제 징용 희생자 유골 환국’ 종책 사업으로
인식 확산‧유골 봉안 실태 점검 ‘성과’
17년부터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위령재 봉행
유골 수습 첫발…“고국에 모시는 그날까지”
해마다 기리는 광복절이지만, 올해 80주년을 맞는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일제가 남긴 아픔이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고, 과거사 청산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한일 양국은 공식 수교 후 지난 60년 동안 문화·민간 차원의 교류로 우호를 다져왔지만, 역사 문제만큼은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한일불교 교류에 앞장서 온 관음종 종정 영산 홍파 스님은 ‘강제 징용 희생자 유골 환국’을 양국 역사 문제 해결의 단초로 보고, 화해의 길을 모색해 왔다. 7월 21일 광복절을 앞두고 만난 홍파 스님은 “진정한 상생과 화합은 과거사에 대한 참회와 용서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한일불교 교류의 시작과 확장
홍파 스님이 일본불교와 교류를 시작한 건 1980년대 초반이다. 당시 일본 불교계는 폐쇄적이었고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심도 컸다. 그럴수록 스님은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려 애썼고, 수차례 일본 사찰의 문을 두드리며 마음을 전했다. 스님의 진심에 일본 불교계도 마음을 열어 자연스레 교류의 물꼬가 트였다. 그 결과 1976년 한일불교교류협의회 준비위원회가 발족했고, 1977년 10월 한일불교교류협의회(현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가 공식 출범했다(1997년 협의회의 원활한 운영과 조직 보강을 위해 사단법인으로 전환, 명칭도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로 변경됐다). 이후 중국까지 교류 범위를 넓히며 한중일불교우호교류회의가 1995년 북경에서 처음 열렸다. 협의회 활동은 학술적 협력을 넘어 불교의 사회적 참여로 확장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일불교 교류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한중일 삼국은 대승불교권으로, 역사적으로 1000년 넘는 관계가 이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도 적지 않았지요. 국민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불교가 먼저 길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는 종교를 넘어 사회문제 해결과 문화적 화합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특히 일본 인구의 79%가 불자예요. 그만큼 불교가 생활에 깊이 녹아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처럼 선종 위주의 수행 불교와는 결이 다르지만, 포교적 측면에선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또 이런 차이를 이해하고 배워야 한국불교도 더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일불교문화교류협의회 출범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
“1977년 이전에는 양국이 친선 방문 수준에 그쳤지만, 한일불교교류협의회가 출범하고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학술 세미나와 교류가 시작됐습니다. 과거사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성과도 있었습니다. 2005년 수덕사에서 열린 제26차 대회에서 일본 대표였던 미야바야시 쇼겐 스님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참회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2008년에는 일본 우천사에서 양국 합동으로 ‘한국 출신 전몰자 유골 송환 위령재’를 봉행하고 우천사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10위를 조국으로 송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2009년 여주 신륵사에서 열린 제30차 한일불교문화교류대회에서는 ‘근세에 일본이 한국민에게 다대(多大)한 고통을 끼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반성과 참회의 염(念)을 깊이 하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유골 환국 사업’ 종책 선언
홍파 스님은 일본 불교계와의 꾸준한 교류를 통해 일본 사찰에 강제 징용 희생자 유골이 안치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님은 2015년 관음종 창종 50주년을 계기로 ‘조선인 유골 환국 사업’을 종책으로 공식화했다. 한두 해의 노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닌 만큼, 종단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사업을 이어가자는 취지였다.
–유골 환국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2017년부터 진언종 평간사, 정토종 광명사, 임제종 건장사, 천태종 원만사 등 일본 주요 종단을 찾아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희생자 유골 환국을 위한 합동 법회를 봉행했습니다. 일련종 본문사에선 태평양전쟁 희생자 위령탑을 참배하고 위령재를 올렸습니다. 2018년에는 강제 징용자 816기의 유골과 위패가 봉안된 홋카이도 삿포로시 약왕사를 찾아 ‘홋카이도 무명 희생자 추모비’를 참배하고, 중앙사에서 조동종 스님들과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 추모재’를 열기도 했습니다.”
-사업의 의미와 성과를 평가하자면?
“강제 징용 희생자 유골을 조국으로 모셔 와야 한다는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다수 언론보도를 통해 인식이 확산됐고 일본 각 종단에서도 유골 보관 실태를 다시 점검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역사 인식에 관해 일본 종단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점도 큰 성과라 생각합니다.”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위령재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위령재는 관음종의 대표적인 조선인 강제 징용 피해자 추모사업이다.
1942년 2월 3일,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의 해저 탄광 ‘조세이(長生)탄광’에서 발생한 갱도 붕괴로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 등 총 183명이 수몰됐다. 한일 불교계가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진 건 2015년 히로시마에서 열린 한중일불교우호교류대회였다. 당시 대회에 참관한 히로시마 총영사가 한국불교계에 위령재 봉행을 요청했고, 이듬해인 2016년 1월 한국불교종단협의회가 현지 첫 위령재를 열었다. 이후 2017년부터는 관음종이 책임을 맡아 현재까지 매년 위령재를 봉행하고 있다.
관음종은 일본 시민들로 구성된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회(이하 새기는회)’와도 협력해 추모비 조성, 유족 찾기, 유골 발굴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새기는회는 지난해 9월에는 마침내 수몰된 갱도 입구를 발견하고, 현재는 붕괴된 철관과 목재를 제거하며 유골 수습을 위한 본격적인 현장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그간 일본 정부는 조세이탄광의 수몰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정부 차원의 조사는 어렵다는 입장이었지만, 최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유골 발굴 작업에 대한 정부 지원 검토를 지시했다.
-활동에 가장 어려운 점은?
“바다 깊은 곳에 묻혀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생각하면, 그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가슴이 저립니다. 희생자들을 조속히 고국으로 모셔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껏 활동해 왔습니다. 매년 위령재 동참 인원이 늘고 갱도 입구를 발견하는 성과도 있지만, 유골 수습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갑니다. 시민단체와 종단의 힘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유골 수습을 위해선 일본 정부의 전향적인 지원과 한국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꼭 필요합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 지원을 검토 중인데?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이는 새기는회를 비롯한 시민사회와 관음종의 묵묵한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유골이 고국의 품에 안기는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지금처럼 계속해 나가면 일본 정부도, 한국 정부도 결국 움직일 것이라 믿습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불자들에게 한 말씀
“우리 불자들이 자기 수행에만 집중하기보다 국민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사회적 역할도 해야 합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과제입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처럼 함께하면 반드시 변화가 올 것입니다. 해방 80년을 맞아 사회적 자비행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길 바랍니다.”
김내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