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히 간 배 위에 들기름 살짝~ 운문사 대중 향한 응원 담다
운문사 가는 길
전국 어디든 1일 생활권역에 들어섰다는 요즘, 하지만 그런 시대의 흐름과 속도전 같은 것이야 그저 무심히 흘려보내는 곳이 있다. 운문사로 향하는 여정이 그렇다.
울산터미널에서 운문사가 있는 청도행 버스는 하루 서너 번. 기다리던 시외버스에 몸을 실으면 외곽도로를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일순 자세를 낮춘다. 굽이굽이 휘어진 위태로운 산길의 태세에 따라 버스도 사람도 하심(下心)으로 달려가는 길.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버스는 가쁜 숨을 내쉬고, 종점인 운문사 정류장의 도착을 알리는 것이다.
연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나 참배객들의 수가 적은 사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운문사에는 어떤 결계가 쳐진 듯한 신비감이 있다.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이 물리적 거리가 분명 그 신비를 지켜주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그리고 마침내 운문사를 ‘찾아내었을 때’ 누구라도 길고 고된 여정의 보상을 받는 것이다.
높은 빌딩이나 화려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는 이곳. 맑은 공기와 눈 닿는 곳 어디든 청정한 산세, 여행자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춤추는 운문천의 청량한 물소리. 고요한 숲길의 시간은 마치 진공상태에 들어선 기분마저 들게 한다.
이윽고 운문사를 둘러싼 나지막한 돌담길, 그 끝에 다다를 즈음 드디어 담박한 자태의 출입문이 하나 보인다. 천왕문이나 일주문 대신, 승과 속의 경계 역할을 대신하는 운문사 범종루다. 호거산이 감추고, 내내 지켜온 보물 같은 천년고찰, 운문사로 들어서는 입구다.
운문사 공양간을 찾아서
이른 오전 시간, 운문사를 방문하면 매일 도량 곳곳을 정비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로 운문사 승가대학의 학인스님들이다. 쓸고, 닦고, 먼지를 털고,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인 운력은 노동이자 수행의 연장. 자리한 모든 것이 여법한 이곳에 운문사스님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 운문사를 지키는 상징이나 다름없다.
지나는 관광객들마저 ‘땅바닥에 빗자루 지나간 흔적도 예사롭지 않다’라고 심심찮은 감탄사를 내고 마는 이곳. 티끌 하나 쉬이 보이지 않는 법당과 반질거리는 마룻바닥.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길가의 돌멩이 하나조차 약속한 곳에 자리한 것처럼 단정하다.
운문사를 밝히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한 걸음 발 딛는 순간 경건함에 젖어 드는 운문사 대웅보전의 아름다움, 눈이 시릴 만큼 푸르른 만세루의 단청, 오래된 전각과 그 앞을 밝히는 석등 하나조차도 보물 아닌 곳 없는 도량. 하지만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것이 아니다.
한국 비구니 승가의 큰 축을 이루는 이 도량, 그 너머에 자리한 ‘작은 신전’을 찾기 위함이다. 미래의 부처님들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맛있는 의식을 치르는 아름답고, 치열한 수행의 공간. 바로 운문사 공양간이다.
반전의 감칠맛 ‘배 국수’
산사의 공양간을 담당하는 소임은 특히 살림이 야무지고, 손맛이 남다른 스님이 맡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절집의 먹을거리와 건강을 책임지는 소임이 그만큼 쉽지 않은 터다.
반짝이는 눈빛과 아직도 앳되어 보이는 맑고 뽀얀 얼굴. 운문사 원주 서준 스님의 얼굴에는 아직도 아이 같은 미소가 떠오르는데, 동과 서로 번쩍번쩍 공양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선 역시 숨길 수 없는 강단과 내공이 드러난다.
“오늘 점심은 운문사 스님들이 좋아하시는 배 국수를 준비했어요. 저도 참 좋아하고요. 여러 재료가 들어가지만 저는 그냥 배 국수라고 불러요. 가장 중요한 재료가 배인데, 정말 많이 들어가거든요.” “재료는 간단해요. 배를 갈아서 우선 단맛을 내지요. 그리고 들기름과 간장만. 스님들은 음식에 기름기가 많으면 속이 부대껴 힘들어하세요. 그러니 들기름은 일반 국수보다 훨씬 적게 넣고, 대신 고추냉이를 넣어줍니다. 그러면 느끼함이 잡히니까요.”
배가 주재료인 만큼 깨끗하고, 잘 익은 것을 골라 아낌없이 넣는다. 수북하게 쌓인 배를 강판에 갈고 보니, 김장할 때 쓰일법한 커다란 스텐 볼에 과육이 훌쩍 찬다. 커다란 솥에 막대기로 휘휘 저어가며 익힌 면은 냉수에 잘 씻어두고, 물기가 빠지면 갈아놓은 배와 양념을 적절히 넣어가며 힘껏 비벼주어야 한다. 들기름과 간장, 고추냉이 양념은 배의 양보다 훨씬 적은 것이 특징이다. 국수는 불지 않고, 찰기가 있도록 공양 시간 직전에 만든다. 이제 모두가 기다리는 시간, 오늘 점심 운문사 공양간에는 향긋한 배 국수가 스님들을 기다릴 것이다.
마음이 만드는 레시피
국수를 입에 넣은 순간 눈이 동그래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감칠맛이 입안에서 터져 올랐다. 향긋하고 시원한 감칠맛, 또 배의 은은한 단맛이 들기름과 섞이니 마치 고급 버터와 같은 풍미를 내는 것이다. 유제품의 맛에서 느껴지는 고소함이 산사의 국수에서 느껴지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별다른 계량 없이 서준 스님의 손맛에 따라 탄생한 만큼, 그 양념의 정도가 맛을 좌우하는 비밀일 것이다. 마침 서준 스님이 “배 국수는 묵은김치랑 먹으면 더 맛있어요”하며 조용히 김치를 밀어주신다.
“다른 국수도 그렇지만, 배 국수는 계절마다 쓰임이 많아요. 선방이 있다 보니 겨울에는 감기가 쉽게 옮습니다. 기침, 열 많이 오르실 때는 일부러 만들지요. 또 겨울에는 영양가를 더하려고 들기름을 더 넉넉하게 넣습니다. 겨울에는 오히려 그게 속이 편하다고 하셔요.”
동의보감에 배는 ‘독이 없고, 풍과 열을 없애고 가슴속에 열이 뭉친 것을 풀어 준다’고 전해진다. 들깨 또한 기침을 멈추고, 산후조리에도 깊이 쓰일 만큼 원기회복에 좋으니 비록 소박한 국수지만 그 정성과 영양가는 여느 보양식 못지않은 셈이다.
한 그릇 공양에 응원을 담아
“저도, 별좌스님과 후원의 보살님들도 자기 마음대로 음식을 하지 않아요. 요즘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스님들에게 해줄 수 있는지 늘 함께 찾아보지요. 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로, 최대한 비슷한 맛을 내보려 흉내도 내보고요(웃음).”
승과 속의 세계가 나뉘어 있다 해도, 조금이나마 다양한 맛을 산사의 밥상에 담으려는 것. 그 마음은 이 순간 운문사에 머무는 모든 스님을 향한 응원과 다름없다. 마침 전날은 새로운 학인스님들의 입학식이 있었던 날. 서준 스님은 내내 스님들의 공양을 챙기고, 가장 마지막에 자신의 공양을 챙겼다.
“한동안은 속가에서 먹던 음식이 그립지 않을까요. 피곤하고 지치면 자극적인 게 먹고 싶으니까요. 모두의 마음을 다 채울 수는 없겠지만, 항상 음식을 통해 위로를 전하고 있어요. 최선을 다해 따뜻한 음식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기를. 모두 힘내기를 늘 응원하고 있어요.”
공양 준비로 분주했던 서준 스님의 얼굴도, 응원을 전하던 눈가도 어느새 벚꽃 빛으로 물이 든다. 하루가 저물고 모두가 제 자리를 찾아간 시간, 서준 스님은 매번 홀로 법당을 찾아 공양 준비로 인해 미처 참석하지 못한 예불을 올린다. 그런 스님의 곧은 뒷모습도, 깊은 밤 쉬이 잠들지 못하는 학인스님들의 맑은 눈동자도 별처럼 반짝이는 계절. 이 봄의 ‘운문서정(雲門敍情)’이 저 큰 산을 채운다.
▶한줄 요약
동의보감에 배는 ‘독이 없고, 풍과 열을 없애고 가슴속에 열이 뭉친 것을 풀어 준다’고 전해진다. 들깨 또한 기침을 멈추고 산후조리에도 깊이 쓰일 만큼 원기회복에 좋으니 비록 소박한 국수지만 그 정성과 영양가는 여는 보양식 못지않은 셈이다.
재료
국수, 배, 간장, 들기름, 고추냉이, 깨소금, 물.
만드는 법
1. 큰 배 1개를 강판에 갈아준다.
2. 간장과 물을 1:0.5 비율로 섞어준다.
3. 삶은 국수를 찬물에 깨끗이 씻어준 후, 물기를 최대한 제거한다.
4. 국수에 소량의 맑은 물을 넣어준 뒤 간 배를 먼저 넣어 섞어주고, 다시 2번의 양념을 넣어 섞어준 뒤, 간을 보아가며 취향껏 고추냉이를 넣어준다.
5. 마지막으로 들기름을 두르고 깨소금을 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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