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삭한 얼갈이에 입맛 도는 ‘마성의 국수’
감로사를 찾아서
대구 남구 앞산 자락, 담장 밖을 넘어선 나무들이 손을 흔드는 고즈넉한 주택가 골목. 그 길의 끝자락에 감로사가 있다.
감로사의 외양은 보통의 사찰과 달리 현대적인 모습으로 이웃한 건물들과 이물감 없이 어우러진다. 다만 스님들의 가사(袈裟)와 닮은 갈색, 그리고 먹빛으로 조화를 이룬 외벽이 멀리서도 이곳이 감로사임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산중이 아니더라도,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의 이유로 도심 사찰을 찾는 길은 새롭고 또 설레기 마련이다. 쉬이 혼란해지는 도시의 일상, 그 곁에 잠시나마 마음을 쉴 수 있는 고요하고, 여법한 공간이란 그만큼 귀하고 소중하기에. 어쩌면 감로사의 시작 또한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 감로(甘露)와 같은 공간이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이윽고 도착한 감로사의 입구, 한 걸음 들어서자 일순 편안한 적막이 온몸을 감싼다. 겨우 한 걸음 경계를 넘었을 뿐인데, 승과 속의 세계란 어쩌면 이토록 다른 공기를 지니는 것일까.
수행의 도량에는 ‘속(俗)’의 영역과는 분명 다른 정결한 힘이 머문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영혼의 목을 축이고, 나를 비추어 보며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게 된다.
단정하게 정돈된 작은 잔디 마당 위로 양껏 쏟아지는 5월의 햇살. 그 위에 풀 먹인 먹빛 승복들이 얌전히 마르고 있었다. 유난히 무덥기로 이름난 이 도시의 한편, 그 속의 작은 샘과 같은 도량 ‘감로사’의 문을 열었다.
오래된, 하지만 새로운
“오늘 만들 국수는 얼갈이콩물김치 국수입니다.”
먼지 한 톨 없이 반지르르 윤이 나던 감로사 공양간, 그곳에서 능가 스님의 환한 웃음과 함께 오늘의 메뉴가 공개됐다. 콩물을 넣은 김치라니, 처음 들어보는 생경한 조합이 궁금증을 일으켰다.
“강원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저희 노스님께서 도반 스님들을 초대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제게 공양 준비를 해보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얼갈이보리김치’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사찰음식 명장이신 선재 스님의 수업을 통해 처음 보고 배운 것이었지요. 그런데 공양을 올리자 노스님들께서 깜짝 놀라시는 거예요. 이 김치를 어떻게 아느냐고 하시면서요.”
청보리가 들판 가득 춤추는 계절이면 먹었다는 옛 맛. 보리를 삶고 으깨어 감자 국물과 함께 자작하게 담은 물김치는 옛 수행자들의 허기진 시절을 달래준 고마운 음식이었다고.
“노스님들께선 정말 조금씩 드시거든요. 송이버섯처럼 귀한 찬도 마다하고, 그 김치만 여러 번 드시던 모습이 무척 기억에 남았습니다.”
먹는 일이란 그저 수행의 과정이자 방편으로, 평생 탐식을 멀리해 온 스님들께서 김치 한 그릇에 웃으며 옛 시절을 회상하시던 모습. 그 광경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또 ‘우리 손상좌가 만든 김치’라며 ‘네가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았느냐’고 기뻐하시던 노스님의 모습 또한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오늘의 주재료인 ‘얼갈이콩물김치’는 바로 이 김치에서 영감을 얻은 것. 옛것에 어느 재료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사찰음식의 유연함이 더해진 새로운 레시피다.
어느 멋진 일
“어느 보살님께서 여름이면 스님들이 땀도 많이 흘리고, 단백질이 부족해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우셨나 봐요. 콩에는 단백질이 풍부하니, 이거라도 드시라고 날마다 콩국을 내려주셨거든요. 하지만 점점 남기는 일이 생기니 어쩌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김치를 담게 되었어요. 보리도 곡물, 콩도 곡물이니까 어디 한번 담아보자! 하고요(웃음).”
그렇게 탄생한 콩물 김치는 이제 여름이면 빼놓지 않고, 김칫독을 채우는 특별 메뉴가 됐다.
비타민과 칼슘이 풍부해 빈혈에 좋은 제철 얼갈이, 단백질도 영양도 만점인 콩물이 더해졌으니 보양식에 진배없는 먹을거리다. 오늘의 국수는 무엇보다 ‘오늘의 김치’에서 비롯된 셈.
콩물을 넣은 탓에 여느 물김치와는 달리 뽀얀 국물. 맛이 궁금해 한 입 들이켜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인다. 매콤하면서도 부드럽고, 깊으면서도 상쾌함이 느껴져 신기할 따름이었다.
말 그대로 식물과 곡물이 어우러져 낼 수 있는 장점이 모두 배어나고 있었다. 물김치에 어우러진 국수를 훌훌 들이켜고, 아삭한 얼갈이를 한 입 먹으면 또다시 입맛이 도는 마성의 국수!
“사찰 음식의 양념 자체는 참 간단합니다. 간장, 소금, 고추장, 된장 이것뿐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 발효가 되면 스스로 새콤달콤한 맛, 구수한 맛, 깊은 맛이 우러납니다. 저 작은 장독 안에서 저마다 따로 놀던 것이 서로 어우러져, 이렇게 시원한 물김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더해지는 능가 스님의 한 마디.
“정말 멋진 일이에요.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사람도 쉽게 하지 못하는 걸 해내잖아요.”
처음과 다음
“한 공간에서 서로 조화로움을 찾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요. 하지만 그 작은 존재가 해내는 일이 참 대단하지요. 그래서 김치 담는 일은 늘 실망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발효라는 것이 그래서 신기하고, 그 시간이 만들어 내는 결과가 너무나 소중하니까요.”
각기 다른 물성이 어우러져 더 나은 무언가가 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 그 발효의 미덕이 어디 먹을거리에만 국한되는 일일까. 소박한 국수 한 그릇을 나누며 미소 짓는 오늘도, 수없이 많은 어제의 나날이 발효되어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안다.
“20대 시절 개인적으로 참 힘든 일을 겪었어요. 그때 누가 지장보살님께 기도를 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뒤늦게 불법을 만나 꼬박 4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루어지더군요(웃음). 세상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제 마음이 달라지고 비워지니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때 결심했지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처럼 괴로움 속에 살고 있는데, 이 좋은 법을 나누어야겠다고요.”
그렇게 하나둘 모으고, 찾아낸 수많은 법문과 경전, 전 세계의 다양한 불교 자료들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모은 방대한 자료들 덕분에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스님들도 찾는 거대한 아카이브로 성장했다. 그렇게 법음을 나눈 지 15년, 1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블로그를 찾았지만 그만큼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갈 시간이었다.
“제 출가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어요. 불법을 전하는 것.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걸 깨닫고 나서 비로소 출가하게 되었지요.”
새로운 한걸음
낯가림이 심해 입이 안 떨어질 때조차 법문을 나누고 싶어 SNS를 시작했다는 능가 스님.
“좋은 사진과 글을 통해서라도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수년간 하루도 쉬지 않고 글을 남겼더니, 이제는 참 많은 이가 함께 합니다. 그 사이 저도 낯가림을 많이 내려놓게 됐고요. 이제부터 또 제 자리에 맞는 일이 생기겠지요(웃음).”
깊은 방황의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익어가는 시간이 아닌 적이 없다. 작은 단지 속의 푸릇한 생명, 저마다의 재료가 서로를 이해하고, 어우러지는 기적이 매 순간 일어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한 것. 그리하여 진실로 간절한 어떤 꿈은 능히,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이다.
▶한줄 요약
비타민과 칼슘이 풍부해 빈혈에 좋은 제철 얼갈이, 단백질도 영양도 만점인 콩물이 더해졌으니 보양식에 진배없는 먹을거리다. 오늘의 국수는 무엇보다 ‘오늘의 김치’에서 비롯된 셈이다.
재료
얼갈이(단배추) 한 단, 과일청(종류 무관), 콩국물(1.5리터), 홍고추 한 줌, 사과 반 개, 생강 한 개, 집간장, 소면
만드는 법
1. 얼갈이는 찬물에 깨끗이 씻은 후, 과일청에 슬슬 버무려 숨을 죽인다.
2. 김치통에 사과와 생강을 잘라 넣고, 얼갈이, 콩국물 순으로 넣어준다.
3. 고추를 갈아 즙을 내어 국물에 섞어준다.
4. 입맛에 따라 간장으로 간을 해준다.
5. 실온에 하루 반나절 정도 익혀준다.
6. 적당히 익은 김치는 냉장 보관하고, 삶은 소면과 함께 차갑게 담아낸다.
- [사찰국수 기행] 10. 명천 스님의 상추찔레 국수
- [사찰국수 기행] 9. 육통 스님의 수박동치미 국수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8. 우담 스님의 시래기 국수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7. 서준 스님의 배 국수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12 동원 스님의 사과 냉면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13. 수덕사 반결제 산행과 승보공양 ‘메밀국수’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여름 별식 - 망경산사 ‘도토리 묵사발’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14. 진묘 스님의 ‘잔치국수’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15. 진허 스님의 ‘콩나물 비빔국수’
- [사찰국수 기행 스님이 웃는다] 16. 선오 스님의 ‘도토리 손칼국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