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연재를 마치며

글을 기고한 적도 없고 산속에 살고 있는 보잘 것 없는 중에게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 故 김주일 국장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합니다. 지금은 앞서서 몸의 고통에서 벗어났으니 산속에 살고 있는 중보다도 낫습니다. 몸을 버렸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지난 1월 4박 5일간 라오스 출장을 함께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한국을 넘어 불교국가의 어려운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들을 함께하자며 인팽사원에서 기도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김주일 국장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이야기하지 못한 아쉬움이 먼저 일어났지만, 세상의 일이 어찌 뜻대로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아쉬운 마음은 있지만 충분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부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일으켰다고 보았으니 안도감도 생깁니다. 아마도 그 진실한 마음만 잊지 않는다면, 어디에 머물든 두려워해야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일까요. ‘사대오온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 한 문장을 한 번이라도 듣고, 그 가르침에 놀라 기뻐한다면 진실한 마음을 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의문의 마음을 낼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세상에 살고 있는 물든 인연의 마음 때문이지, 그 본질이 변해 생긴 마음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본래부터 그 본질이 더러워질 수 없는 상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생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인연으로 보이는 사대오온을 그들이 아니라고 호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간단한 가르침이지만, 세상 물정도 모르고 산속에만 있는 중이 너무 어려운 문장을 만들어 많은 수행자들을 시끄럽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산속에 살고 있는 중이 모르는 세상의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산속에 살고 있는 중의 몫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세상살이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산속에 있는 중의 지견으로 말한 것입니다. 식견 없는 중이 잘못 알고 말한 것은 있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분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조금이나마 소통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하는 언어와 글은 표현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가 발생합니다. 말하는 언어는 꾸밈없고 스스럼없이 그때그때 나오는 본질이라면, 글은 앞뒤의 문맥과 단어의 선택과 일관된 흐름, 기타 등등 많은 것들을 순차적으로 매끄럽게 구성하지 못하면 다른 표현이 되고 맙니다. 몇 번의 수정을 거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글을 적다 보니 세상에 살면서 수행하는 분들을 많이 이해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말로서 법회를 하는 것은 산속에 앉아 수행하는 것과 비슷하고, 글을 사용하여 법회를 하는 것은 세상에 살면서 수행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산속에 사는 중이야 그때그때만을 살고 있으니 특별히 일어나는 것에 수정하여 알아야 하는 것이 적지만, 세상의 일은 그때그때마다 조금의 수정을 하면서 바른 것을 알아가야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산속에 있든, 세상에 있든, 알아야 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조건으로 이루어진 어느 것에도 나라고 해야 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관심으로 바르게 아느냐, 관심을 가지고 바르게 아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알아낸 마음은 너무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각자의 인연에서 흔들림 없이 바르게 알고 지켜보고 있다면 서로가 소통하는 데는 모양으로 제약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제약도 없이 소통한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희유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세워지지 않고 서로 걸림 없이 물 흐르듯 인과를 벗어나, 서로가 어떤 사물도 드러내지 않으니, 신들조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한 물건도 만들어진 적이 없는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연이든지 슬퍼할 일도 없고 좋아할 일도 없습니다. 인연은 홀연히 일어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아지랑이 같은 것입니다. 아지랑이를 보았다고는 하지만 실재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인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재라는 것은 생성된 원리를 아는 것이지, 어떤 것이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이렇게 안다면 현상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빼앗길 마음이 없다면 수행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빼앗긴 마음이 없음을 아는 마음을 지킬 때, 아지랑이와 씨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씨름하지 않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지, 씨름하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미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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