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여래를 보려면

알면 너무 쉽고, 모르면 너무 어렵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와 해석만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작곡가가 하나의 음표를 이용하여 다양한 음률을 표현하는 것처럼 하나의 단어도 아주 다양한 표현을 가지고 있지만 사전적인 하나의 의미로만 알고 있다면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음률을 듣지 못한다. 음표가 위치에 따라 춤을 추듯, 단어도 음률을 가지며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단어 혼자만으로는 춤을 출 수가 없다. 어떻게 사용되어지느냐에 따라 다양한 표현력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사용하라는 것은 아니다. 단어는 독립적이지만 따로 떨어뜨려 놓아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완전히 뒤섞어 놓아서도 안 된다.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닌 원래부터 그곳에 있는 단어처럼 놓아야 한다. 그렇게 놓아지면 그 단어는 본래의 단어가 아닌 새로운 단어가 된다. 그리고 살아있는 단어처럼 속삭이는 소리로 들어보라고 외치는 것 같다. 숨겨져 있는 소리 같지만, 지금까지 보고 듣고 느끼고 사유한 인식과 기억하는 모든 것은 버려지고 관념 없이 듣기만 한다면, 숨겨진 소리가 아닌 본래 있는 소리를 듣게 되고, 지금까지 본래의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무엇을 알지 못해 그러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마음과 조금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여래가 세상에 태어나 정각을 증득한 것은 상도 아니요, 무상도 아니네. 언어로 말할 수 있고 망상으로 분별한다면 상이나 혹 무상의 오류에 떨어지고 마네. 만약 분별 망상을 없애 버린다면 어리석은 범부의 상과 무상의 망견을 멀리 떠나 마음이 절로 청정해진다네.”

‘안다’, ‘모른다’는 단어는 옳고 그름의 뜻이 없지만, 알게 모르게 옳고 그름으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안다는 것은 의기양양하고 우쭐하게 만들고, 모른다는 것은 조금 겸연쩍고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안다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를 물어보게 되면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 모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는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세상의 지식은 정답이 없다. 세상에서 안다는 것은 어떤 노력에 따라 대상인 지식이 내포하고 있는 그 의미를 그때까지 나와 있는 정보를 섭렵하여 기억하는 것이 다양하고 많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정보를 많이 외워 아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선택할 수 없음을 알 때 진리가 된다. 만약 진리가 누구로부터 선택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안다는 의미도 이와 같다. 안다는 것은 누구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로서 진리를 표현하는 방식은 물질에 대한 부정의 표현밖에 없다. 그 표현이 일반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단어가 가지고 있는 색다른 묘미를 가지게 된다. 진리가 가진 단어의 묘미를 안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많은 언어들이 사용될 때마다 고목에서 새싹이 피는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진리를 아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기억으로 아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이것이 진짜 아는 앎이다. 부족하다고 더 배워봐야 그것 또한 아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니 굳이 더 배울 필요도 없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모른다’에 너무 빠져있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모르는 자를 자신이라고 알기 때문에 모르는 것으로 되어버린다. 일반적으로 모르는 것은 관심이 없든지 아직 그것을 접하지 못해 배우지 못한 것이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아는 것도 없지만 모르는 것도 없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현재진행형이라 끝난 적이 없다. 오온에 대해 ‘나’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알고 모르고는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아는 마음이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마음이 모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대로의 진행형에 점을 찍으려는 마음이 사라져, 본다는 마음도 없고 보지 않는다는 마음도 없어진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마음도 없고, 모른다는 마음도 없을 때, 스스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여래를 알게 되는 것이 신비한 일이다. 왜냐하면 여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