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무아는 어떤 의미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없이 듣게 되는 본인 이름이 변해가는 본인의 모습과는 상관없이 불렸을 때, 스스럼없이 바로 대답했다면 그는 어느 때 대답한 것이 그의 진짜 이름에 대답한 것이 되겠는가. 시간 속에서 몸은 쉼 없이 변하고 있다.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마음도 변한다. 변하지 않으려는 것도 또한 변하는 것이다. 아마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으로도 손댈 수 없는 본바탕일 것이다. 바탕은 지나가는 무엇이 나타나더라도 변했다고 하지 않고, 무엇이 사라지더라도 변했다고 하지 않는다. 바탕은 그 바탕으로서 움직임이 없음을 알고 있으니 ‘항상하다’라는 말도 필요 없다.

사대오온으로 나왔다고 사대오온을 떠날 필요도 없고, 사대오온을 떠날 필요 없다고는 말하지만 오온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실재하는 것은 실재한다는 말이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다. 뭉쳐있는 것을 나라고 삼음도 없고, 흩어지는 것으로도 자신을 삼음이 없다. 언제나 바탕으로 있지만 언제나 다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본바탕을 알기 위해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을 한다. 그리고 이것저것을 모아 그 본바탕에 빼곡하게 점을 찍어 놓는다. 나중에는 그 많은 점 중에서 어떤 것이 진짜 점인지를 찾게 된다. 그러다 대부분은 포기하고 주어진 조건의 삶에 빠져 살게 된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비슷하다.

바탕에 점을 찍어 그것이라 말하는 순간, 바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그것에 이름이 생기지만 그것은 바탕이 아니다. 바탕은 이름이 없다. 그때그때 불리는 그 이름이 그 본바탕이다. 불리는 이름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다르게 불려도 듣는 것은 항상 같다. 부처라고 불리든, 중생이라고 불리든, 그 이름으로 자신을 삼지 않는다. 그러니 대답도 일정하다. 그런데 듣는 이는 그 대답을 듣기가 어렵다. 불러야 하는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지 않으면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 듣는 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부르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듣고 부르는 것이 일정할 때 그는 언제나 그것으로 부르고 그것으로 듣는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누가 대답하는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삶이든 수행이든 나라는 주체에 의심 없이 살아간다. 만약 ‘나’라는 주체를 인식하고 자신의 본바탕을 알려고 한다면 뿔 달린 토끼를 찾는 격이 될 것이다. 여기쯤 말하면 반 이상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다른 것을 찾아 떠날 것이다. 제시함 없는 것에서 바로 알지 못하고 항상 제시함에서 궁리하다 보니 제시함 없는 앎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문제를 내고 답을 맞히는 과정으로 생각하겠지만, 앎은 답을 맞히는 일이 없다. 앎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 속에 문제가 없고, 답 속에 답이 없고, 삶 속에 삶이 없고, 수행 속에 수행이 없고, 앎 속에 앎이 없다. 그러나 찾는 이에게는 문제 속에 답이 있고, 수행 속에 행함이 있고, 삶 속에 인연의 의미가 분명하게 있게 된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겠지만 그 속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에서 불편해 하는 자가 누군지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에서 조금 어긋나는 바람에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인지하여 아는 것과 인지하여 아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앎은 완전히 다른 것인데, 이 두 가지를 혼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두 가지의 다름을 알지 못하면 항상 전자를 아는 것으로 착각하여 다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전자는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뜨거운 돌을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 돌이 무겁든 가볍든 그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된다. 후자는 그렇게 하고 있는 자의 어처구니없는 행동과 생각을 보고 아는 앎이다. 그러니 앎은 무엇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알고 나니 그런 행동과 생각을 바로 멈추게 되는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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