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성불

팔만사천법문이 하나로 돌아가는 안내서인데, 그 참뜻을 알지 못해 오온을 가지고 수없는 행위의 반복으로 거듭나고자 하겠지만, 그 행위가 오히려 본질을 방해하는 줄을 어찌 가늠하겠는가. 가만히 앉아 허공을 보고, 흐르는 물로 목마름을 해소하는 일이 따분한 것 같지만, 다시 구해야 하는 것 없으니, 중생이라는 마음으로 부처를 향하려는 마음 또한 부질없는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서둘러 돌아갈 곳을 잊고 보니, 때에 맞게 주어지는 것 이외에 따로 찾아야 할 것 없고, 내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니, 세상이 나를 굴복시키는 것도 없다. 방편의 법문이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하여도, 어찌 그 하나를 가리킬 수 있겠는가. 그 하나는 언어가 가리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수많은 말들이 마지막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처음에는 하고자 함이 약이 되나, 나중에는 전쟁에서 패한 병사가 총칼을 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처지와 같은 병이 되지만, 그 자신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말 어디에도 없지만, 자신을 중생이라 자처하고 부처를 찾으니, 없는 부처를 어디에서 찾겠는가. 아상(我相)이라는 상이 있어 아상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이라는 상이 있어 중생이라 말하는 것도 아닌데,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곳을 나오라는 말이 그곳으로 들어가라는 말로 들리니, 말하는 이가 황망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부질없다 할 수도 없고, 꼭 해야 한다고 할 수도 없는, 과거에 지어놓은 기억의 잔재들이니, 될 수 있으면 세상의 일에 멀어지는 것이 현명한 지혜가 될 것이다. 여기에 혀를 대어 변명하게 되면, 아직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꼴이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스스로의 소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문자 속에 있는 이치를 아는 것은 그대 스스로가 아니고 오온일 뿐이고, 말없이 그대로 실천하는 이가 바로 그대라는 것을 안다면, 문자 속에 있는 이치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다. 문자 속에 있는 이치를 실천하는 일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말없이 실천하는 진리는 이치상의 어려움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일체 중생과 제불 여래께서는 모두 본래 청정한 자성 속에 머물러 있어서 증감도 없고 생멸도 깨끗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법에 상주하네. 그러므로 전후에 한 말은 모두가 교화의 방편이 아님이 없으며 결코 자성에 차별이 있다는 말이 아니네.”

처음에는 상상으로 수행을 했더라도 마지막은 실천으로 끝나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상상의 달콤한 꿀맛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에게도 그 꿀맛을 권하겠지만, 그 자신부터 완전히 감응하지 못하는데, 어찌 다른 이들을 감응시킬 수 있겠는가. 실천에는 꿀맛은 없더라도 달리해야 하는 말들이 필요 없으니, 보는 이도 들을 것 없이 보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서로가 따로 말할 것 없이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안다면, 팔만사천법문이 따로 필요치 않음을 안다. 처음의 꿀맛이 잠시는 달콤하여 있는 듯 보이지만, 뒤돌아서면 서로가 허전함을 느끼고 다시 달콤함을 찾게 되니, 달콤한 상상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스스로가 세상에 있지 못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일들이 그들 스스로의 문제가 아니기에, 아무리 많은 말을 하여본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 문득 일어나고 사라지는 문제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느낄 때, 스스로는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말이 많아진다. 그때는 함박웃음으로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에 대해, 꿈속의 일처럼 이야기하고, 해소하고, 알게 하고, 속지 않게 함으로써 서로는 둘이 아니게 된다.

완전한 소통을 이루면, ‘나’라고 하는 모양이 따로 만들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 밖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더 이상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나타날 수 없다. 모양으로 나타나서 모양으로 살지만, 그때의 모양에서 스스로의 모양이 아님을 알았으니, 다양한 모양들이 항상 보여주는 그 모양의 메시지를, ‘모양이 아닌’ 메시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임을 바르게 안다. 모양으로 구별하고 차별하여, 청정한 그 모습을 왜곡시키지만 않으면, 모양이 모양 아님을 아는, 그 온전한 앎이 주어진다. 〈끝〉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