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불행 열매는 다음 생의 행복 씨앗
우리 마음은 상반되는 감정이
항시 교차하며 나타나고 있어
편안해지면 행복 불행 떠나야
삼독심 끊은 삶이 기도·참선
[오늘의 명상]
씨앗의 전생은 열매,
열매의 전생은 씨앗,
나의 열매는 지금,
나의 씨앗도 지금.
사람은 마음 편한 것이 최고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원하는 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원하는 대로 돈이 벌려야 하고, 원하는 대로 자식이 잘 되어야 하고,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이 잘 되지 않는데 마음이 편할 리는 만무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또 원하는 것은 고사하고, 원치 않는 것이 일어나서 오히려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한편으로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한편으로는 원치 않는 일이 생겨 속상한 경우가 오히려 더 많기도 합니다.
설사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얼마 가지 않아 더 원하는 것이 생기고 말기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편안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고, 더군다나 원하지 않은 일이 생길 때는 편치 않은 마음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이뤄지고 이뤄지지 않고의 실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항상 강조하는 말이지만 마음은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서로 교차하며 나타나기 때문에 행복한 마음이 생길 때가 되면 행복한 일이 나타나게 되고, 불행한 감정이 생길 때가 되면 불행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나타나는 일에 일희일비하게 되고 반복되는 감정에 의한 윤회의 고리를 끊지 못합니다.
사업이 잘 되어 돈을 많이 벌거나 자식이 잘 되어 좋은 학교, 좋은 직업을 가져서 행복한 마음이 유지된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으나, 행복한 마음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에 버금가는 불행한 마음이 들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또 그에 상응한 불행한 일이 생기고야 마는 것이 감정의 업(業)인 것이니, 이를 간과해서는 절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불행의 씨앗은 전생의 행복의 열매이고, 지금 행복의 열매는 전생의 불행의 씨앗인 것이며 지금 행복의 씨앗은 다음 불행의 씨앗이 되고, 지금 불행의 열매는 다음 생의 행복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해지려면 일어나는 모든 일에 행복과 불행의 감정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장자가 부처님께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감정을 내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화를 내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욕은 장자가 다시 가지고 갈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시며 편안한 마음으로 태연자약하셨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습은 스스로 가장 완벽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있어야 서로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햇볕이 있으니 만물을 이롭게 하나, 또 한편으로는 햇볕을 가리는 구름이 있어야 만물에게 비를 뿌려 생동하게 만들듯이 햇볕과 구름은 다 같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선의 모습도 악의 모습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다만, 이런저런 모습은 모두가 인연의 질서에 의해 한치 오차 없이 오고 가는데 내가 굳이 어떤 하나만을 선택하려 하니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과의 질서를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놓고 보는 마음을 길러야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게 되는데 오랜 습에 절은 몸과 마음이 잘 따라 주지 않으니,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어렵더라도 항상 일어나는 모습에 대하여 감정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늘 인과의 모습이 나타나는구나 하고 깨어 있는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탐을 내는구나, 내가 지금 화를 내는구나, 내가 지금 인과의 모습을 잊고 있구나’ 하고 탐·진·치 삼독심에 끄달리지 않는 삶이 진정 기도요 참선일 지니, 이러한 마음이 오래 지속되어 습으로 자리 잡게 되면 아라한의 업이 되고, 보살의 업이 되며, 궁극적으로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상]
세상이 움직인다고?
마음이 움직인다네.
마음이 움직인다고?
숙업(宿業,습관이 쌓임)이 움직인다네.
몸을 ‘업덩이’라고 합니다. 부모와 조상들이 가지고 행했던 오욕(五慾-식욕·수면욕·재산욕·성욕·명예욕)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 습관 그대로 행하는 것이 몸입니다.
눈으로 보고 분별하고, 귀로 듣고 분별하고, 코로 냄새 맡고 분별하고, 혀로 맛보며 분별하고, 몸으로 느끼며 분별하고, 머리로 생각하고 분별합니다.
육근(六根-눈·귀·코·혀·몸·생각)의 몸으로 육경(六境-보이고·들리고·냄새나고·맛보고·부딪치고·기억하고)을 마주치고 육식(六識-보는 분별·듣는 분별·냄새 분별·맛 분별·느낌 분별·생각 분별)으로 분별합니다.
분별은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좋고 나쁜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습관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니 딱히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있고 없고, 아름답고 추하고, 즐겁고 괴롭고, 좋고 나쁘고, 들어오고 나가고, 이루고 실패하고, 웃고 울고, 건강하고 병들고 등등….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것이 그저 왔다 갔다 반복될 뿐, 그러다 태어났으니 죽어야 하고, 생겨났으니 사라져야 하는 것 입니다.
귀한 것은 귀한 것 가운데 더 귀한 것을 분별하게 되고 추한 것은 추한 것 가운데 덜 추한 것을 분별하게 되고 정의는 정의로운 가운데 더 정의로운 것을 찾게 되고 불의는 불의한 가운데 더 불의한 것을 분별하게 되니 영원히 고정불변한 것은 없습니다.
높은 것은 더 높은 것에 의해 낮은 것이 되고, 큰 것은 더 큰 것에 의해 작은 것이 되니,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쁘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여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100을 가졌다가 90개를 잃었다면 10개 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아직 10개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은 천지차이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속상함이 달라지듯이, 죽어라고 욕심을 내어 가졌다 한들 언젠가는 가진 것을 잃어야 하는 인과(因果)가 생길 때 그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처음부터 가진 것은 반드시 잃게 된다는 것을 알아 마음을 뺏기지 않은 사람은 그 속상함의 마음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밖에는 없습니다. 조금 더 잘났네, 영웅이네, 좋은 사람이네, 훌륭한 사람이네 등등의 분류는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할 뿐, 근본적으로 해탈한 사람 이외에는 고락(苦樂)의 업을 면치 못하니, 윤회고(輪廻苦)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매사에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 더 성공하는 것, 더 아는 것, 더 가지는 것, 더 건강한 것, 더 사는 것을 탐하여 생멸(生滅)과 생사(生死) 고락(苦樂)을 거듭하여 스스로 고통과 괴로움을 자초하는 사람과 세상의 모든 것은 인과가 반복되는 생사고락이라는 것을 여실히 잘 알아서 매사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여여한 마음으로 해탈하여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의 부류입니다.
대다수가 전자의 삶을 택하여 오탁악세(五濁惡世)를 스스로 만들어 사는가 하면, 후자의 경우는 극히 드물기는 하나 아라한과 보살, 부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과의 도리를 잘 알아 후자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해도 수억 겁의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몸이라는 업덩이 때문에 육근과 육경, 육식의 분별하는 업(業)을 없애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일분일초라도 깨어 있는 마음으로 오욕의 습을 관하고 참회하는 시간도 부족한데 이러한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몸과 마음의 업습(業習)에 끄달려서 우리는 무지몽매하게 살아갑니다. 이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니, 하루빨리 오욕의 습을 볼 줄 아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의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모습은 꿈이나 환영, 물거품이나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볼지니라’라는 뜻입니다.
현실에 맞네 안 맞네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고업(苦業)이 다하지 않은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얕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늪에 빠뜨려 허우적거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한줄 요약
탐·진·치 삼독심에 끄달리지 않는 삶이 진정 기도요 참선일 지니, 이러한 마음이 오래 지속되어 습으로 자리 잡게 되면 아라한의 업이 되고, 보살의 업이 되며, 궁극적으로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