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바라지 말라, 그대 마음만 불편해진다
보시 뒤 바라는 마음 갖는 건
또 다른 인과 윤회 생성 과정
복 얻는 마음조차 내지 않아야
진정으로 福德을 많이 얻게 돼
[오늘의 명상]
억만 금의 보석으로
억만 명에게 보시(布施)하는 것은 작은 공덕이다.
보시한다는 마음 없이 보시하는 것은
더없이 큰 공덕(功德)이다.
뭇 사람들은 불교를 ‘비현실적이지 않나’라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공(空)이다”, “업(業)이다”, “인연이다”, “인과(因果)다”라고 하고 “마음을 비워라”, “주어도 준 바가 없이 줘라”, “집착하지 말라”, “생각과 감정을 놓아라”, “분별하지 말라” 등 뭔가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체 인간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한 순간이라도 어떻게 산다는 말인가”라며 하물며 “스님들은 현실을 너무도 모르고 산에서 편안하게 신도들의 보시로 살아가니 각박한 세상사에 대해 그 치열함을 모르는 소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각박한 세상을 떠나 편안하게만 보이는 절 생활을 해보면 어떨까요? 그러기에는 부모 형제, 처자식 등 묶인 것이 많죠. 그럼 밖에서 그냥 치열하게 사는 수밖에요. 이와 같이 세상에는 공짜란 없습니다.
세상일이란 티끌만한 것도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중생은 특히 사람들은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 살고, 최소한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라는 만큼 얻은 만큼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우연이나 요행은 없습니다. 모두가 필연(必然)입니다. 이것이 업이고 인과이고 분별이며 인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 윤회의 고리를 끊고자 불교를 통해 배우고 실천하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남을 돕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좋은 일입니다. 반드시 복덕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내 것을 주거나 돕는다는 마음 한편으로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잠재적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돕거나 준다는 것은 어지간한 내공 없이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도와준 것에 대한 업식이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다시 돌려받기 위한 아뢰야식(잠재의식)이 발동하게 됩니다. 이미 준다는 생각이나 돕는다는 생각 자체가 인과를 낳기 때문에 이미 불편한 마음을 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사람이 나를 섭섭하게 하거나 배신을 한다면 그 속상한 마음이야말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이치와 마음의 모습이 인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준다는 마음도 돕는다는 마음도 내지 않음으로, 내 것이라는 생각도 없고, 준다는 생각도 없고, 더구나 받는다는 생각도 없으니, 돌려받지 못하는 데 대한 불편한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는 〈금강경〉 제19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을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득 찬 칠보를 보시(布施)한다면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福)을 얻음이 많겠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 인연으로 복을 심히 많이 얻나이다.”
“수보리여. 만약 복덕(福德)에 실체가 있다면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복덕이란 없는 고로, 여래는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설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복을 얻는 것조차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조차 내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복덕(福德)을 많이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지금 당장 인연·인과의 질서에 맡기고 마음을 텅 비워 놓을 수만 있다면 온갖 복락(福樂)이 나를 완전하게 보호하고 감싸 줄 것입니다.
[오늘의 명상]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니
내일은 낮과 밤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고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도 반드시 온다는 것이며
나와 너의 미래 역시 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迷生寂亂(미생적난) 미혹하면 고요함과 어지러움이 생기고
悟無好惡(오무호악) 깨달으면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으니
一切二邊(일체이변) 모든 상대와 두 가지 마음은
良由斟酌(양유짐작) 능히 헤아려 짐작하고 남음이로다.
중국 선종 3조 승찬(僧燦) 대사께서 선(禪)의 요체를 간략하게 말씀하신 〈신심명(信心銘)〉 22칙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무명(無明)에 의해 중생의 두 가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생각으로는 좋고 싫음이 생기고, 감정으로는 즐겁고 괴로운 마음이 생겼고 이 둘의 마음은 시공(時空, 때와 장소)을 달리하여 차례로 인과(因果, 이 마음과 저 마음)의 업보(業報, 현실)로 나타납니다.
한 번의 좋은 생각과 즐거운 감정이 생기면 한 번은 반드시 싫은 생각과 괴로운 감정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육근(六根, 눈·귀·코·혀·몸·생각)과 육경(六境, 시각·소리·향·맛·촉감·기억)과 육식(六識, 육근·육경의 인식)으로 감지되는 온갖 일들은 이 두 마음에 따라 인연이 되어 실제로 생겨나게 되니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입니다.
좋고 싫은 생각과 즐겁고 괴로운 감정이 이미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 두 마음에 따라 현실의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이 본체이면 내가 사는 세상의 모든 인연 되는 것들은 내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 지나간 것도 이 두 마음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고, 지금도 앞으로도 이 두 마음이 나타나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앞날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능히 헤아려 짐작하고 남습니다.
좋은 일이 있었는가? 그럼 나쁜 일이 생길 것입니다. 나쁜 일을 겪어 보았는가? 그럼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 두 마음이 번갈아 나타나는 것이 번거롭다면 두 마음의 분별심(分別心)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분별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당장 모든 생각과 감정을 놓아 버리면 됩니다. 그리 하기가 어렵다면 보시와 정진, 기도와 참선으로써 극복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