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분별된 마음, 고락(苦樂) 가져온다
즐거운 쾌락 뒤엔 나쁜 결과 뒤따라
모든 건 業, 원인 없는 결과는 없어
‘좋고 싫음’이란 분별심 내려놓아야
비로소 ‘고락’이란 인과 사슬 끊어져
[오늘의 명상]
달빛 머금은 아슬한 산 차고도 고요한데
마음 숲에 바람 부니 소리 내어 일렁이네.
속세의 저잣거리 종일토록 시끄러운데
바람 멈춘 마음 숲은 달빛 고요 품었구나.
선종 제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二見不住 愼莫追尋)
삼가 쫓아가서 찾지 말며(有是非 紛然失心)
조금이라도 옳고 그름이 있으면(二由一有 一亦莫守)
본마음을 잃고 어지러워진다.(一心不生 萬法無咎)
생각과 감정의 마음은 두 가지로 이뤄졌습니다. 마음에 하나의 생각과 감정이 있으면, 다른 반대의 생각과 감정 또한 똑같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한 번의 좋은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면, 한 번은 안 좋은 생각과 감정이 나타납니다.
이 두 마음은 가만히 있어도 나타나고 움직여도 나타나며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고)에도 나타납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싫어질 때가 있고 아무리 싫은 사람도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살인마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이라면 용서할 수 있지만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짓을 하더라도 좋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엄청난 고통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여 죽을 만큼 마음이 아플 때도 있고,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나서 죽기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대개 재수가 없다거나 억울해 하거나 조상을 탓하기도 하고, 하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 같은 일에 대해 업보(業報) 또는 과보(果報)라고 가르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리 큰 잘못을 저지른 기억이 없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원인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 뿐입니다. 우선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두 가지의 마음은 서로를 의지하며 나타나게 됩니다.
즉, 고통스러운 마음의 무게만큼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본인이 즐긴 만큼의 쾌락에 의한 과보(果報)로 고통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에는 공짜가 없는 법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본인의 노력의 결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계산법은 눈곱만큼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계산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속세를 떠난 출가 수행자들은 일체의 세속적인 즐거움에 해당하는 것들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버리고 또 버립니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고통의 과보(果報)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의 분별이 없으면 달빛도 산도 모두 고요하나, 생각과 감정을 드러내니 산속에 있어도 마음이 세속처럼 시끄러워집니다.
두 가지의 분별된 마음에 따라 고락(苦樂,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과는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이니 이를 그치고 멈추고자 한다면 두 가지 마음을 없애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잘 살펴서 탐진치(貪嗔痴-욕심, 성냄, 분별) 삼독심(三毒心)의 마음을 늘 경계하여야 하니, 항상 두 가지 견해를 갖지 않고 여여(如如)한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기도와 보시, 참선 정진은 두 마음을 갖지 않게 하는 최고의 수단 방법입니다.
[오늘의 명상]
뜨거운 여름을 굳이 피하려 하지 않아도
가을은 곧 폭염으로부터 나를 구출해 주느니
지금 어려운 일들이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세월은 곧 편안한 곳으로 나를 데려다 주리라.
가파르게 올라가면 가파르게 내려오게 되니 매우 위험하기는 하나 극한 고통에 따른 극한 재미는 있을 것이고 평평한 곳에는 위험이 없고 편안하기는 하나 재미는 없을 겁니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쾌락과 재미를 보기 위해서는 힘듦을 감수해야 하고, 편안하고자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위험을 피하고자 하면 짜릿한 재미는 없습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이는 여름의 뜨거움이 있을지라도 가을이 곧 온다는 것을 여실히 알아 여유를 가지고 참을 줄 알지만 그렇지 못한 이는 새벽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두운 밤을 굳이 밝히려 밤새 불을 지피는 어리석음을 택합니다.
스스로 더욱 힘들어하는 이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참지 못하고 좋은 시절이 왔을 때도 더 좋은 것을 찾으려 애씀으로 힘들어하니 나쁠 때나 좋을 때나 좀처럼 마음을 쉬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부처님께서는 고집멸도(苦集滅道)로써 극복하라 하시니 이를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진리라 하셨습니다.
고통과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나아가 더 좋은 것을 구하려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이 같은 생각과 감정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 곧 괴로움을 여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같은 바른 행동을 ‘팔정도(八正道)’라 하셨습니다.
팔정도를 여법히 행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고 괴로움에서 영원히 벗어난 이를 성문승(聲聞乘)이라고 합니다.
또 모든 것은 인과(因果)가 계속 윤회하여 연기(緣起)한다는 것을 여실히 관(觀)하고 잘 알아서, 그 어떤 현상이나 인연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평안한 마음을 항상 유지하는 성인을 연각승(緣覺乘)이라 합니다.
삶이란 고락이 공존하며 서로 교차하는 모습 외에 더도 덜도 아니니, 이 고리를 끊고자 한다면 성문승과 연각승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만큼 살면서 경험도 하고 별의별 꼴 온갖 일에도 부딪혀 봤을 겁니다. 이 즈음하여 지루하게 반복되는 어지러운 삶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한 단계 끌어올려서 전혀 새로운 세계의 맛도 볼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한 생각만 돌리면 우주 밖의 세계를 맛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