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의 길은 때때로 뜻밖의 곳에서 열린다. 도량도 아니고 바다도 아니며 법회도 아닌 곳. 그곳은 차갑고 무거운 철문이 닫혀 있는 교정시설이었다.
처음 초청을 받았을 때 나는 잠시 마음을 고르게 했다. ‘과연 소리 명상이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전법이란 가는 길을 정해 두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나는 조용히 그곳의 문을 통과했다.
첫날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말보다도 시선이었다. 처음 인사를 어떻게 건네야 할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닉네임을 정하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범죄자나 수용자가 아닌, 하나의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만나는 것. 그것이 마음의 벽을 여는 첫걸음이었다.
붓다볼을 손에 올리며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부처님, 이 울림이 그들의 가슴에 빛으로 들어가 참회의 길을 열어 주소서.”
볼을 울리자 차갑던 공간이 아주 천천히 흔들렸다. 높은 벽과 차가운 바닥도 울림을 머금었다. 그 진동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드러운 파동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명상이 몇 차례 반복될수록 사람들의 표정과 숨소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누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명상을 계속하다 보니 생각이 납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조금만 참았더라면 조금만 기다렸다면…. 후회가 됩니다. 명상을 하고 나니 앞으로의 삶을 생각할 힘이 생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멈춰 숨을 삼켰다. 죄의 무게가 아니라 ‘다시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한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던 젊은 수용자도 명상이 깊어질수록 태도가 바뀌었다. 이름을 부르면 눈을 피하던 사람이 어느 날에는 눈을 지그시 감고 붓다볼의 울림에 맞춰 천천히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구속된 것은 그들의 몸이었지만 붓다볼의 울림 속에서 조금씩 마음의 자유가 피어나고 있었다.
전법은 거창한 설법이 아니다. 때로는 말보다 한 번의 울림, 한 번의 숨, 멈추어 앉아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깊은 깨달음을 만든다.
닫힌 문 바깥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가을이면 하늘이 낮게 내려앉고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문 안과 바깥의 하늘은 다르지 않았다. 달라야 했던 것은 마음이었다.
붓다볼의 소리는 멀리 가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 닿는다. 그 울림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미래를 생각하며 다시 길을 찾으려 노력한다면 그곳이 곧 도량(道場)이다.
전법의 발걸음은 오늘도 이어진다. 문이 열려 있든 닫혀 있든 소리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그 마음이 열리는 순간 부처님의 자비는 다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