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받아들이는 마음가짐까지 아울러
정견은 불교 수행과 믿음의 출발점
바른 인식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 要
구원, 붓다 가르침 실천 과정서 보여
올해 초 동국대학교 팔정도 광장에서 ‘팔정도 동판 제막식’이 있었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란 글자가 학교 메인 광장의 중심에 자리를 잡은 모습에 여러 상념이 든다.
학생들이야 별생각 없이 밟고 다닐 수도 있겠지만 선방의 문고리만 잡아도, 문지방만 밟아도 그 공덕이 크다 하지 않는가. <법화경> 방편품에도 “탑 안에서 나무불(南無佛)을 읊조린 까닭에 반드시 붓다가 되리”라고 쓰여 있다. 동국대 입학만으로도 알 수 없는 전생으로부터 부처님 법과 인연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이를 넘어 팔정도를 시각적으로도 심상에 새기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그 인연으로 다음 생에서도 반드시 부처님과 인연이 닿으리라 감히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동국대를 산책하며 우리는 가파른 언덕길만을 올라왔다. 이때의 시선은 위쪽이라는 한 방향으로 향했으나, 지금은 정각원을 지나 학교 정상인 팔정도 광장에 도착했다. 이 광장은 여덟 방향으로 넓게 펼쳐져 ‘팔정도(八正道)’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그 이름에 걸맞게 동국대에서 처음으로 시야가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하게 되는 장소기도 하다. 이곳에 이르러, 시각의 일방향성이 해소되고 인식의 지평이 시원히 열리게 됐다. 이 자유로운 인식 속에서 산책의 첫걸음을 내딛어 보고자 한다.
팔정도의 첫걸음은 정견, 곧 ‘바른 인식’이다. 그러나 이 말은 오해의 여지를 품고 있다. 흔히 ‘바르다’는 말에는 도덕적 옳음이나 상식적 분별이 겹치기 쉽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는 불교를 종교가 아니라 도덕적 윤리규범 정도로 이해시킬 수도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도덕의 선악이나 사회적 판단 기준과 같은 세속적 기준이 아니라 존재를 관통하는 진실에 대한 앎, 즉 출세간적 앎이다. 그리고 이 앎은 단지 지적 이해나 이론적 수용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가능해지는 인식이다.
이 점에서 정견은 불교 수행의 출발점이면서 믿음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초기불교나 아비달마에서는 이를 세간적인 일과 출세간적인 일로 나눠 설명한다. 전자는 인과의 법칙에 대한 확신, 즉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윤리적 통찰이다. 이는 반드시 불교의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반면 후자는 사성제에 대한 직접적 통찰로, 고(苦)의 성립과 그것을 멸할 길에 대한 실천적 앎이다. 이는 오직 붓다만이 제시하신 길이다. 하지만 두 정견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어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시선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즉, 세간의 언어와 논리는 출세간의 지혜를 담기 어렵기에 이 같은 전환에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요구된다. 바로 믿음이다.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불교를 이성의 종교라고만 알면 이는 50점도 안 되는 이해이다. 그 불교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바르게 알기 위해서라도 믿음이 필요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불교 인명학의 종장인 법칭(法稱)의 인식론은 정견을 위한 믿음의 위상을 더욱 분명히 해 준다. 인명학은 논리학으로 불교학 분야에서도 가장 이성적 사용을 강조하는 학파다. 이 이성적 학파의 거두인 법칭은 인식의 바름을 보증하는 수단, 즉 ‘프라마나(prama)’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만이(혹은 붓다 그분 자체만이) 유일하고 확실한 바른 인식의 근거”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붓다는 모든 무명을 여의고 실상, 정확하게는 사성제를 바르게 관찰하신 분이시므로, 붓다의 언설은 오류 없는 인식, 곧 바른 기준일 수밖에 없다.
법칭에 따르면, 붓다라는 프라마나에 귀의하지 않으면 정견을 얻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즉,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은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법칭이 붓다를 프라마나라고 설정한 이유다. 불교도에게 구원이란 “참말을 하는 자이며 실 있는 말을 하는 자이며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자이며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狂語者 不異語者]”이시고, ‘일체지자(一切智者)’이신 붓다의 언설을 믿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이뤄진다.
물론 붓다께서는 자신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으라고 강요하진 않으셨다. 어디까지나 청자 스스로가 자신의 입장에서 붓다의 말을 음미하고 믿을 것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기다리셨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에서 시작하는 정견은 단지 ‘무엇이 진리인가’를 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불자 스스로의 마음가짐(붓다에 대한 절대적 믿음)까지를 아우르는 말이다.
이처럼 정견은 이해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믿음은 바른 인식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출발점이자 조건이다. 불교가 인식의 종교라고 할 때 그 출발점에 믿음이 놓여 있다는 것은 불교가 오직 이성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 없는 정견은 형식만 갖춘 껍데기에 불과하며, 삶을 바꾸는 힘은 거기서 나오지 않는다. 사실 그런 정견은 없는 것이다. 깨닫기만 하면, 바르게만 보면 우리가 붓다와 같아질 수 있다는 자만한 사고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성이라 해봤자, 흔들리고 번민하여 기준점이 될 수 없는 반딧불이의 불과 같을 뿐이다.
반면 붓다는 항상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서 북극성의 빛과 같다. 법칭이 말한 프라마나로서의 붓다란 바로 이 북극성이다. 그 빛을 따라가면 고해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언덕에 도달하게 하는 믿음의 대상이자, 바른 인식을 가리키는 유일한 기준이다. 수평선 너머에 안식처가 있을지는 빛에 대한 믿음만이 보증할 뿐이다.
믿음은 언제나 불확실성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모든 것이 논리와 경험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면, 믿음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논리와 경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면, 기나긴 윤회의 밤을 지새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인식은 본래 한계가 있고 모든 존재는 변화하며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그와 같은 세상에서 정견을 갖는다는 것은, 변화와 조건 너머에 도달한 자를 지남(指南)으로 삼아 그의 말을 신뢰하고,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결심과 다르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