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21. 만해광장과 밀실

광장서 무연대비심의 보살행을 보다

남산 중턱 자리 잡은 평평한 공간서
최인훈 ‘광장’ 인간·보살 사유케 해 
보살, 밀실 포기·타자 위해 살아가

만해동산서 내려본 만해광장.
만해동산서 내려본 만해광장.

동국대학교 만해동산에서는 서울의 북쪽 북한산을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명동과 종로 일대가 훤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용마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 오늘 산책할 만해광장이 나온다. 

만해광장은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동국대의 몇 안 되는 평평한 공간이다. 또 다른 평지로는 이미 둘러본 팔정도와 정각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운동장이 있다.

만해광장 초입에는 베트남 고승 틱낫한 스님의 동국대 방문 기념 표지석이 있다. 틱낫한 스님은 여러 베스트셀러 불서로도 익숙하지만, 만해 한용운 스님처럼 베트남에서 불교가 어떻게 현실 참여를 해야 할지 고민한 인물이란 점에서 만해광장과 공명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광장 안쪽 깊숙한 곳에는 동우탑이 있다. 동우탑에는 4·19혁명 때 유명을 달리한 노희두 열사와 동국대 출신의 여러 의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책 코스와는 다소 벗어나지만 만해광장에서 샛길로 내려가면 세월호 사건 때 학생들을 먼저 구하다 자신을 희생한 최혜정 동문을 기리는 표지석도 나타난다. 

노희두는 필자보다 어릴 때 자기 자신을 사회에 던졌고 최혜정 또한 필자와 학번이 같은데도 자기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나라는 소인 입장에서 광장 위 그들의 숭고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만해라는 시인의 바탕에서 광장 위라는 사유를 하게 됐으니 최인훈이란 문인 ‘광장’으로 산책 장소를 옮겨 볼까 한다. 만해동산에 새겨진 ‘님의 침묵’이 만해 스님의 대표작이듯 〈광장〉은 최인훈의 대표작이다. 〈광장〉은 10번의 개정판을 거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최인훈에게는 이 소설이 내려놓지 못한 평생의 화두였던 듯하다.

〈광장〉은 일제 말 해방 초 지식인 이명준의 고뇌를 그린 소설이다. 그는 좌익 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한다. 신탁통치를 넘어 남과 북에 각자의 정부가 생기자 좌익과 관련 있는 이명준은 남쪽에 계속 머무는 것이 어려워지고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상실에 환멸을 느껴 월북한다. 

하지만 월북한 사회에서 좌익 운동가인 아버지의 삶은 조선 말기 부르주아지의 모습 그 자체였으며, 개인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주의 북한에 이명준은 질식해 간다. 여기서 만난 은혜와의 사랑만이 남한이란 광장, 북한이란 광장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던 명준이 도망칠 유일한 밀실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벌어져 명준과 은혜 모두 참전하게 되고 여기서 명준은 은혜를 포탄에 잃게 된다. 그리고서 그는 포로가 돼 남한이냐 북한이냐의 선택을 강요받고 제3세계를 선택해 인도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자신이 설 광장이 없음을 안 명준은 생애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광장〉이 독일에서 출판될 때, 독일에는 동일 제목의 작품이 출간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어 ‘광장’ 제목을 ‘광장과 밀실’로 바꾸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원작자인 최인훈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광장과 밀실’이란 제목은 작품을 너무 풀어 설명해 긴장감은 잃지만 또 이 소설 내용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른 제목도 없는 듯하다. 

인간에게는 사회적 동물로서 활동할 ‘광장’이 필요하다. 반면 남과는 공유되지 않는 자신만의 개성이 보존되는 공간인 ‘밀실’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광장’과 ‘밀실’의 관계가 이념의 전쟁 한복판에서 무너져 내렸을 때 인간이 어떻게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가, 바로 그것이 〈광장〉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나’라는 에고(ego)의 기본적 욕망 중 하나가 인정욕이다.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것을 위해 공공의 기준에 맞춰 사회적 가면을 쓰고 광장 위에서 연기를 한다. 

하지만 내 안의 욕망은 공공의 광장에 내놓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차라리 욕정이라 할 만한 동물적 욕망에 대해 답답한 가면을 벗고 숨 쉬게 할 밀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욕망은 방목하는 짐승과도 같다. 때로는 풀을 뜯게 내버려 둬야 하고, 때로는 사육장에 가둬야 한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욕망을 드러낼 광장, 욕망을 풀어낼 밀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중생이다.  

중생임을 포기하고 살아감이 바로 보살의 삶이다. 보살에게는 광장밖에 없다. 그는 밀실을 포기한 존재이다. 생존 욕구, 번식 욕구, 혹은 그 외에 공공에 드러내기 꺼림칙한 욕망 모두를 포기하고 오로지 타자만을 위해 살아가는 게 보살이다. 

보살이야말로 아무런 이해도, 의도도 없다. 그들은 그저 타자를 위해서만 모든 활동이 이뤄진다. 이런 의미에서 보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도를 이루는 데 있어 지혜를 성취하고 그 힘으로 타인을 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보이지만,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인용하는 근거나 경전상의 증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가장 가까운 예인 석가모니 부처님만 봐도 그렇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살로서 수기를 받은 것은 연등불이 나타난 시절 선혜 동자였을 때다. 이 선혜동자 때 연등불에게 앞으로 91겁 뒤 석가모니불이란 부처님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수기를 받으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선혜 동자이기 이전에 삼아승지겁의 보살행을 닦은 이다. 선혜 동자를 기점으로 할 때, 그 이전의 보살행에는 ‘보살행을 닦아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저 중생을 향한 이타심에 따라 우주 전체에서 겨자씨 한 톨만한 곳도 예외 없이 중생들을 위해 앞서 본 광장 위의 의인들처럼 몸을 버렸다. 

그 희생을 인정받아 그는 붓다가 될 것이라고 인정(수기)받게 된다. 선혜 동자에게는 붓다를 이뤄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 삼아승지겁 동안 없었던 것이다.

불교란 종교는 인과의 종교다. 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은 보살행의 무연대비심과 깨달음의 이계과, 이 두 가지만은 불교의 철리라 하더라도 인과로는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는 이해만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이해를 넘어서는 절대적 타자성이 필요하다. 밀실을 포기하고 광장 위에서만 살아가는 무연대비심의 보살행은 부처님을 절대적 타자로 믿게 하는 숭고미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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