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 등 불교 사상, AI 윤리에 바람직한 토대"
가톨릭 등 ‘AI 윤리선언’ 잇따라
인간 존엄 보호 공통적으로 담겨
한국불교는 선언·지침 미비 실정
조계종연구소 출범 세미나서 물꼬
자비 등 담긴 선언문 필요성 제기
인공지능 AI가 우리의 일상과 산업 구조 전반을 빠르게 바꿔 놓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이 가져올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불안은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까’라는 현실적 우려에서부터 ‘기계가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지는 않을까’라는 근본적인 물음까지 쏟아지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은 종교계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가치와 존엄, 생명의 가치 등을 깊이 성찰해온 종교계야말로 AI 윤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종교계가 AI 시대 윤리를 제시할 적임자라는 기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 세계 각 종교가 AI 시대에 걸맞은 ‘윤리선언’을 잇따라 발표한 가운데 한국불교계가 시대적 요구에 어떻게 응답할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가톨릭의 ‘로마 AI 윤리 원칙’
AI 윤리선언에 가장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곳은 가톨릭이다. 교황청은 2020년 인간다움과 도덕관, 윤리의 상실을 막기 위해 AI 활용 시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으로 ‘로마 AI 윤리 원칙(Rome Call for AI Ethics)’을 제안했다. △투명성(Transparency)-AI 기술은 기본적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포함(Inclusion)-AI 기술의 발전이 전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혜택을 줄 것 △책임(Responsibility)-AI 개발 및 활용에 대해서 책임지고 수행할 것 △공평성(Impartiality)-편견이나 차별에 근거해 AI 기술을 개발하거나 이용하지 말 것 △신뢰성(Reliability)-AI 기술이나 서비스는 신뢰성을 갖출 것 △보안과 프라이버시(Security and Privacy)-AI 기술은 보안을 지키고,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배려할 것 등 6가지 원칙이다.
교황청은 최근에도 AI가 인간 사회에 미칠 영향을 분석한 문헌 ‘옛 것과 새 것(Antiqua et Nova)’을 공개하고, 인공지능의 개발과 사용이 인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AI로 인한 인권 침해 가능성에 깊이 우려하며 “AI는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 낸 산물일 뿐 이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AI는 인간의 지성을 보완하는 도구로만 사용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올해 5월 취임한 교황 레오 14세도 즉위 직후부터 AI 규제 및 윤리 수립을 주요 과제로 삼아 활발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다. 그는 “과학 발전이 오만하게 인류를 해치는 상황을 방지해야 한다”며 “교회의 2000년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AI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윤리와 규범을 세우겠다”고 강조했다.
개신교·이슬람도 대응 활발
개신교 역시 AI 문제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성경적 가치와 신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AI 활용에 있어 경계와 신중한 접근을 강조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2019년 미국 남침례교 공공정책 부서인 윤리및종교자유위원회(ERLC)는 선언문 형태로 발표한 ‘인공지능에 대한 복음주의적 원칙’을 통해 AI가 인간의 신앙·가치·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장로교(PCUSA)도 2023년 ‘인공지능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데 이어 최근 ‘AI 연구위원회’를 설립해 관련 지침과 윤리적 쟁점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유럽교회협의회(CEC)는 2019년 ‘신뢰할 수 있는 AI 윤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적법성, 윤리성, 투명성, 다양성 등 7대 원칙을 제시했다.
한국교회도 윤리적 지침 마련에 분주하다. 한국기독교학회는 올해 초 홈페이지를 통해 ‘AI 시대를 바라보는 한국기독교학회 성명서’를 공지했다. 성명서에서는 “AI 시대 교회와 신학은 도래할지도 모르는 기술의 위험으로 인한 파국과 묵시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윤리적 가치와 복음적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며 12개 조항으로 구성된 AI 개발과 활용에 관한 준칙을 명시했다.
이슬람권에서도 AI 기술을 윤리적으로 규제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교육문화과학기구(ICESCO)는 2024년 AI의 윤리적 발전을 중점으로 한 ‘리야드 AI 헌장’(Riyadh Charter for Artificial Intelligence)을 발표했다. 이슬람 문화권의 가치와 원칙에 부합하는 AI 기술 개발을 위해 종합 규정을 마련하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국제 협력을 촉진한다는 계획이다.
가톨릭·개신교·이슬람 등 각 종교계의 AI 윤리선언은 표현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의 존엄성 보호 △종교 고유의 신앙과 가치 반영 △인간의 삶과 역할을 보완·지원하는 수단으로의 활용 △사회 전체 공동선을 위한 분배라는 원칙을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불교계의 AI 윤리 지향점
불교계에서는 AI를 포교나 교육에 적극 활용하고 있지만 이웃종교에 비해 AI 윤리에 대한 구체적 선언이나 지침은 아직 미비한 실정이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AI시대 윤리 논의에 적합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緣起) 사상은 AI 활용에서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기술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면 안 되고, 사회 전체와 생명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 삼독(三毒, 탐욕·분노·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가르침도 AI 개발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권력 남용과 데이터 편향, 불평등 심화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다행히 조계종은 최근 AI 시대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텄다. 올해 7월 조계종연구소 출범 기념 세미나에서 AI부디즘연구소 소장 보일 스님은 ‘AI시대와 불교계의 과제’를 주제로 발표하며 불교계가 AI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정책 개발-자료 구축-현안 대응-교육 및 홍보’의 체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종단 차원의 싱크탱크를 통해 기술 변화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가 시작된 셈이다.
특히 불교는 오랜 역사와 깊은 정신적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할 수 있는 종교라는 점에서 AI시대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자비·지혜·중도·연기는 시대와 문명을 넘어서는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어, 이를 오늘의 기술 환경에 맞게 해석하고 구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보일 스님은 “우리는 지금 인류 문명이 근본적으로 전환되는 AI시대의 문턱에 서 있다”며 “기술이 주는 편의와 효율성 이면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 사회적 불균형, 윤리적 공백이 함께 도사리고 있다. 불교가 이에 침묵한다면 자비와 지혜의 종교로서 본분을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스님은 “오랜 세월 축적된 불교의 지혜는 복잡한 기술 윤리를 성찰하는 데 귀중한 자원이 될 수 있으며, 불성·연기·무아의 가르침은 AI 윤리의 방향을 바로잡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며 “AI 윤리 선언은 인류 공동체를 향한 불교적 자비 실천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보일 스님은 ‘불교 윤리 선언문’에 담아야 할 핵심 가치로 중생의 고통을 줄이고 행복을 증진하는 ‘자비로운 개발’,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존중하는 ‘인간 존엄성 수호’, 중도 정신에 따른 ‘지혜로운 활용’, 전체적 조화를 추구하는 ‘상호 의존’, 속도와 시장 선점에서 벗어난 ‘무분별한 경쟁 지양’, 사회적 약자도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양극화 해소’,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지속적 실천’ 등을 제시했다.
당시 조계종연구소장 원철 스님도 인사말을 통해 “세미나에서 제안된 내용을 연구소의 중요한 밑거름으로 삼아 구체화해 나가겠다”며 “실현 가능한 아이디어는 내년도 사업에 반영하고, 이를 통해 한국불교와 종단 발전에 기여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조계종 미디어홍보실장 덕안 스님은 “AI는 이미 일상에서 활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확산될 것”이라며 “이젠 단순 활용을 넘어 그에 따른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을 깊이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어 “AI에 지나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 종속되기보다, 어디까지나 도구로써 올바르게 사용해 인류와 사회에 해롭지 않게 활용하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밝혔다.
김내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