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빙’(2023)
초능력자들의 삶 다룬 SF 장르
부모 삶 대물림 거부 의지 보여
신통은 수행의 부차적 결과일 뿐
어린 시절 한 번쯤 초능력을 꿈꿔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하늘을 날고 투시를 하며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초능력을 말이다. ‘~맨’ 이라는 이름이 붙은 슈퍼히어로 영화를 보며 초능력의 세계에 푹 빠져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드라마 ‘무빙’은 초능력자들이 우리 주변에서 정체를 숨기고 살고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정체를 숨기고 살기 때문에 흔히 보는 미국 히어로들처럼 ‘~맨’ 하는 이름도 없고 그에 걸맞은 요란한 복장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안기부에 소속된 공무원으로서 대북관계에 관한 은밀한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안기부 비밀 요원인 비행 초능력자 김두식(배우 조인성)은 같은 안기부 직원인 오감 초능력자 이미현(배우 한효주)을 만나 우여곡절 끝에 안기부를 탈출해 아들을 낳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함은 잠시, 집요하게 추적해 온 안기부에 스스로 잡히면서 미현이 피할 시간을 벌어 준다. 가까스로 안기부의 추적을 따돌린 미현은 두식의 소식을 알지 못한 채로 돈가스 식당을 하며 아들 봉석(배우 이정하)을 혼자 키운다.
포항의 조직폭력배였던 재생 초능력자 장주원(배우 류승룡)은 부하의 배신으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주원의 초능력을 알아본 안기부 직원에 의해 비밀 요원으로 스카우트된다. 떠돌이 시절에 만난 다방 레지 황지희(배우 곽선영)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꿈꿨지만 교통사고로 지희를 잃고 안기부를 벗어나 딸 희주(배우 고윤정)를 키우며 산다.
이외에도 괴력의 초능력자 이재만(배우 김성균), 전기 초능력자 전영석(배우 최덕문), 투시 초능력자 홍성화(배우 김국희) 등의 초능력자들이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들의 삶을 흔든 것은 재생 초능력자인 CIA요원 프랭크(배우 류승범)의 등장이다. 프랭크는 초능력자를 한 명씩 찾아가 자식이 있는지 확인한 후 살해한다.
프랭크가 초능력자들의 자식을 찾아다닌 것은 그들의 능력이 자식들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이었다. 봉석은 두식의 비행 초능력과 미현의 오감 초능력을 모두 물려받았고, 희주는 주원의 재생 능력을, 강훈(배우 김도훈)은 재만의 괴력을, 계도(배우 차태현) 역시 영석의 전기 초능력을 물려받았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비밀 요원들의 힘이 대물림된다는 데에 위협을 느낀 CIA가 자신들의 인간 병기인 프랭크를 시켜 비밀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한편 안기부는 어린 봉석을 통해 초능력자들의 능력이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알고 진작부터 이들을 모아 교육하면서 잠재적 초능력 여부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기부에서 이름을 바꾼 국정원을 본딴 정원고등학교. 봉석과 희주와 강훈이 다니는 학교이자 계도가 졸업한 학교다.
그리고 국정원과 대척점에 있는 북한의 보위부 역시 ‘기력자’라고 부르는 초능력자들을 양성해 비밀 조직을 구성하고 국정원의 ‘초능력자 2세 육성 파일’을 탈취하려고 정원고등학교를 찾아온다.
드라마 ‘무빙’은 기본적으로 초능력자를 다루는 SF 장르이면서도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복합적 장르 기법으로 구현하고 있다. 봉석과 희주 중심의 고등학생 주인공들이 주로 등장하는 초반부는 가족 드라마이면서 학원물 장르의 성격을 띠고, 두식과 미현의 과거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와 시대극의 성격을 띠면서 첩보 스릴러물 같으며, 주원의 과거 이야기는 갱스터 느와르물이다. 여기에 초능력자들의 액션 장면은 수퍼히어로물, 첩보 액션, 고어물의 요소가 강하다.
초능력자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액션이 넘쳐나는 미국식 히어로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무빙’이 하려는 이야기는 꽤 묵직하다. 항공기 테러, 남북정상회담, 김일성 사망 등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을 담고 있으면서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억압하는 집단의 공격에 대항해 가족을 지키려는 부모의 처절함이 담겨 있다.
‘무빙’의 부모들은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살아왔지만 자식이 위험에 빠지는 순간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한껏 초능력을 발휘한다. 심상치 않은 일들이 있음을 눈치채고 학교를 찾은 미현이 미화원으로 위장한 보위부원을 처리하고는 권총에 탄환을 장전하고 안경을 벗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불량배에게서 지희를 구하려는 주원과 강훈을 구하려고 학교로 뛰어가는 재만이, 넓은 의미에서는 가족 같은 봉석을 구하는 계도가 그렇다.
‘무빙’은 남북의 아버지 김두식과 정준화(배우 양동근)가 각각 ‘초능력자 2세 계획’을 추진하려는 정보기관 수장을 제거함으로써 부모 세대가 겪은 잔혹한 시대의 삶을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초능력을 불교에서는 신통력이라고 한다. ‘무빙’의 부모가 자식의 위험 앞에서 무한한 초능력을 발휘하듯 세간의 모든 것을 다 알아 중생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부처님 역시 많은 신통력을 지닌 존재이다. 그런 부처님의 신통력은 간단히 여섯 가지(六神通)라고도 하고 자세하게는 열여덟 가지(十八不共法)라고도 한다.
부처님 역시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부처님의 신통력을 신화와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신통은 특이한 일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로 저절로 나타나는 부차적인 효과일 뿐이다. 부처님의 경지를 중생의 수준으로 재단할 일이 아니다. 실제로 기도를 통해 영험을 체득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있다. 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몸을 던져 기적을 만드는 부모들의 예도 적지 않다.
신통과 기적은 불보살에게 의지하는 것으로만 나타나는 일은 아니다. 화엄이나 선에서는 성불이 별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본래부터 부처이니 스스로 부처임을 믿고 부처로 살면 그것이 성불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가 부처로 살면 나에게 6신통과 18불공법이 갖추어진다는 말이다. 신통과 기적은 내가 부처로서 발휘하는 부차적인 일일 뿐이다.
‘무빙’의 등장인물들은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 등의 어마어마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얼굴 마주보고 사는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초능력을 발휘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빙’이라는 제목처럼 부모가 자식을 위해 ‘움직이는 일’이 바로 ‘감동’ 그 자체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