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0 시주자 참여 ‘갑사 三佛’ 조성한 수화승
임란 파괴 송광사 등 불사 참여
영서, 호남 등서 활동 기록 남아
갑사 소조삼불좌상 조성 주도해
17세기 대표 조각승 무염의 스승
임진·정유재란(1592~1598)이 끝난 1600년대 불상 제작과 중수를 주도한 조각승으로 현진(玄眞) 스님, 석준(釋俊·釋峻) 스님, 광원(廣圓) 스님, 원오(元悟·圓悟) 스님이 밝혀졌다. 이 스님들은 종교적인 믿음과 불상 제작에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불사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에 석준 스님과 원오 스님은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등을 중수·개금했다. 이 문수동자상은 1466년에 세조의 딸 의숙공주와 사위 정현조가 아버지인 세조의 무병장수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만든 불상으로, 종전 후 왕실 원찰(願刹)의 중창이나 중수가 먼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행사 스님은 1604년 11월에 현진·석준·원오·각민(覺敏) 스님이 초춘암(草?庵)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현 전주 불정사 봉안)을 만들 때 불전(佛前)에 공양할 음식을 만드는 소임인 별좌(別座)로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1605년 10월부터 1606년 3월까지 공주 계룡산 청림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현재 공주 동학사 봉안)과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소재 미상)을 조성했다. 당시 증명(證明)은 석준 스님이고, 수화승(上畵員)은 각민 스님이며, 각심(覺心)·행사·휴일(休一)·덕잠(幸思) 스님이 제작에 참여했다. 네 구의 불상을 5명의 조각승이 대략 5개월에 걸쳐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행사 스님은 1610년 2월에 석준 스님이 주도한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의 개금 불사에 시주자로 참여하고 1614년 4월부터 9월까지 부화승으로 각민 스님이 주도한 순천 송광사 비로자나불삼존상(한국전쟁 중 소실)을 청허(淸虛)·보옥(寶玉)·희순(熙淳)·심정(心淨)·응매(應梅) 스님과 조성했다.
3년 후인 1617년 10월에 수화승으로 공주 계룡산 갑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과 사보살상을 덕현(德玄)·천담(天潭)·희순(凞淳)·경륜(敬倫)·심정(心淨)·응매(應梅) 스님과 제작했다. 또한 행사 스님은 1635년 4월에 정읍 용장사에서 간행한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에 목판 시주자로 참여하고, 여수 흥국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1648년),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나한상(1655년)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했다.
이와 같은 작품 활동으로 행사 스님은 1580년 전후에 태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1604년에 수화승 현진 스님이 불상을 만들 때 인연이 되어 별좌 소임을 맡고, 1606년에 각민이 공주 청림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을 제작할 때 5명 가운데 3번째 언급되어 보조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614년에 부화승으로 각민 스님을 도와 송광사 불상을 제작하고, 1617년에 수화승으로 충남을 대표하는 계룡산 갑사 소조석가여래칠존상을 제작한 것을 보면 당대 최고의 실력을 갖춘 조각승임을 알 수 있다. 행사 스님은 1620~1640년대까지 불상 제작을 주도한 문헌기록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1650년대 중반까지 여수 흥국사 불상 제작에 시주자로 참여했다.
조각승 행사 스님의 계보는 석준(1599~1610, 이하 활동기간)·원오(1599~1611)·각민(1605~1614)·각심(1606~1614)→행사(1604~1655)→심정(1614~1624)·응매(1614~1650)·무염(無染, 1633~1656)→해심(海心, 1633~1654)으로 이어졌다.
행사 스님이 주도해서 만든 불상이 봉안된 갑사는 공주 계룡산 서남부 연천봉 아래에 위치한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이다. 1659년에 여주목사 이지천(李志賤)이 지은 ‘공주갑사사적비(公州岬寺事蹟碑)’에 의하면 갑사는 정유재란 기간에 왜구의 침탈로 소실된 후 1604년에 인호(印浩)·경순(敬淳)·성안(性安) 스님 등이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건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내부에 보물로 지정된 석가·아미타·약사여래와 사이사이에 보살상 4구를 배치했다.
본존인 석가여래좌상은 좌우 협시불보다 약간 크고, 높이 267㎝로 결가부좌한 대형 불상이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상태에 엄지와 중지를 구부린 전형적인 조선후기 통인(通印)을 취하고 있다. 불상은 상반신을 세우고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여 아래를 내려 보고 있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螺髮)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가 표현되고,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中央珠)와 정수리 부위에 낮은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珠)가 장식돼 있다.
역사다리꼴의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원통형의 코, 살짝 미소를 머금은 입을 가지고 있어 전형적인 17세기 초반 불상의 얼굴에서 풍기는 특징을 보여준다. 갸름한 목에 삼도(三道)가 완만한 반원을 그리고, 얼굴에 비해 어깨가 넓은 편이지만, 신체 비율은 인체와 비슷하여 균형 잡힌 모습이다. 대의자락은 오른쪽 어깨를 덮은 옷자락이 목 밑에서 비스듬히 걸친 후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이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수직으로 내려와 복부에서 하반신으로 펼쳐져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중앙에 수직으로 한 가닥의 주름이 길게 늘어져 있고, 끝부분이 안쪽으로 둥글게 말려 있다. 왼쪽 무릎 위에는 넓은 잎사귀 형태의 소매자락이 늘어져 있다. 불상의 측면은 어깨선을 따라 한 가닥의 옷주름이 길게 늘어지다가 끝에서 앞뒤로 펼쳐져 있다.
불상 뒷면은 목둘레에 대의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옷자락이 대좌 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가슴을 덮은 승각기(僧脚崎)는 수평으로 묶여있으나 일부 자락이 접혀 있다. 이와 같은 대의처리는 조각승 각민이 제작한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1606년)이나 순천 송광사 비로자나불삼존상(1614년, 한국전쟁 중 소실)과 유사하다.
협시불로 봉안된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는 얼굴의 생김새와 이목구비에서 본존과 인상이 동일하지만, 한쪽 손을 어깨까지 치켜들고 반대쪽 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통인을 취하고 있고, 착의법은 대의 안쪽에 부견의를 걸쳐 복부에서 대의자락과 접힌 부분이 표현된 점과 하반신에 늘어진 대의자락이 본존과 다르다.
세 구의 여래상 사이사이에 배치된 네 구의 보살입상은 문수와 보현보살, 관음과 대세지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목조보살입상은 화려하게 화염문(火焰文)과 화문(花文)이 장식된 커다란 보관을 쓰고,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자세가 구부정하다. 보살상의 인상과 신체 비율은 본존과 거의 유사하지만, 화려한 장신구의 표현이나 들고 있는 지물(연화가지와 여의)이 다를 뿐이다.
석가여래삼불좌상과 사보살입상으로 구성된 칠존 형식의 불상은 조선 후기에 좀처럼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성으로, 2015년 관음보살상 보존 수리 과정에서 조성발원문, 후령통(喉鈴筒), 오보병(五寶甁),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다라니(陀羅尼)를 비롯해 총 7건 263점의 복장물이 수습됐다. 이 불상 조성에 참여한 시주자가 2300여 명이라는 사실은 조선 후기 가장 많은 시주자가 참여한 불사(佛事)이고,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