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지 않는 삶, 부처님 가르침 멀어져
몸·말·마음 씀씀이 깨끗이 해야
찰나의 언행도 허투루 하지 않아야
불자라면, 그리고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부처님은 어떤 분이고,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따라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그러한 질문을 멈췄다면, 혹여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다면, 불자로서 자신의 삶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다.
불자들은 경전과 스님들을 통해서 부처님을 만나고, 그의 가르침을 듣는다. 그러나 막상 부처님처럼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화엄경> 보살문명품에 등장하는 대화에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문수 보살이 물었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어떤 중생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면 모두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있는데 무슨 이유로 바른 법을 받아 지니고도 끊지 못하며, 바른 법을 능히 받아 지니면서도 무슨 이유로 마음속에 다시 번뇌를 일으킵니까?” 법수 보살이 대답했다. “당신의 질문이 사실이니, 단지 많이 보고 많이 들었다는 것만으로는 여래의 법 가운데 들지 못할 것입니다.”
눈으로 자주 부처님을 보고, 귀로 자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만, 막상 부처님이 행하거나 말씀하시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부처님과 나 스스로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화엄경>은 보살문명품의 다음 순서에 정행품(淨行品)을 배치한다. 여기서 정행(淨行)은 ‘깨끗한 행’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행을 깨끗하게 하는 품’이라는 의미이다. 부처와 나 스스로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몸과 말과 마음 씀의 행동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정행품은 그 과정의 핵심을 바람, 곧 서원이라고 강조한다. 품 전체가 출가 보살과 재가 보살이 매일 부딪히는 사소한 일과마다 어떤 바람, 곧 서원을 일으켜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즉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바람(서원)을 일으켜 의지로서 개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옷을 입는 것을 예로 들면,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정돈하고 띠를 맬 때는’, ‘윗옷을 입을 때는’, ‘가사를 입을 때는’ 등으로 구분한다. 옷을 걸치는 순서에 따라 그 옷의 의미와 기능에 따라 부끄러움을 놓치지 않고 흐트러진 마음을 단속하며 최상의 선근을 얻고, 중생을 향한 자비심을 일으켜 놓지 않기를 바라는 서원을 일으키기를 요청한다. 한순간 한 찰나의 행동과 말과 마음의 움직임에도 정성과 바람을 담아 허투루 살지 말라는 의미이다.
물론 그렇게 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늘 일어나서 내 행동과 말과 마음 씀씀이를 신중히 하는 고삐가 우리 마음을 채우게 해야 한다. 나아가 그 서원이란 고삐가 우리 삶을 채울 수 있도록 다짐을 거듭해야 한다.
중추가절(仲秋佳節)! 가을 한가운데 들어 선선한 바람이 옷자락을 헤치고 드는 때다. 더위는 가을바람에 물러서고 곳간이 가득해 여유를 부리며 푸른빛 가득한 하늘이 답답한 마음을 풀어놓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족이 오랜만에 만나 정담을 나누고, 친지며 친구들을 만나 잊고 지낸 시간의 회포를 풀어내기도 하는 명절의 즈음이다. 만나는 이들 모두에게 평온함을 서원한다면, 더 아름다운 명절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