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서정원의 불교미학산책] 14. 정각원 중단(신중단) 2

신중단, 방편 아닌 깨달음이어야 

모든 중생은 이미 붓다의 지혜 갖춰 
방편은 붓다만 아는 ‘유불여불’ 경계
영가단·신중단 다른 것 방편 안 돼

〈법화경〉 ‘비유품’의 삼계화택을 묘사한 돈황 막고굴 변상도. 사진 출처=돈황석굴감상총서(敦煌石窟鑒賞叢書) 제9분책, 제98굴
〈법화경〉 ‘비유품’의 삼계화택을 묘사한 돈황 막고굴 변상도. 사진 출처=돈황석굴감상총서(敦煌石窟鑒賞叢書) 제9분책, 제98굴

앞서 우리는 동국대학교의 주법당인 정각원에 도착하여 영가단을 둘러본 후 신중단을 바라보았다. 정각원의 신중단은 ‘통일찰해도’로, 불교뿐만 아니라 여러 신앙이 습합돼 있음을 살펴보았고, ‘신중’이란 매개를 통해 불교가 외도들의 신을 받아들인 것은 특이한 일임을 지적했다. 또 외도들의 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불교의 구원과 관련된다면 수용할 수 있는 논리가 성립되며, 이를 천태지의(538~597)의 경문 이해에 맞춰 살펴보았다.

혹여 불교적 소양이 높은 독자분들은 그런 것이 다 방편(方便)인 줄도 모르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몇 회차 전 필자가 주로 보는 경전이 바로 방편의 경전인 〈법화경〉임도 밝혔고, 연재 초반에 방편을 주제로 잡은 내용도 있었다. 방편의 의미에 대해 필자도 나름의 사색이 있다는 말이다. 즉 필자가 생각하는 방편이야말로,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아시는 유불여불(唯佛與佛)의 일이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애에서 거짓말할 권리라는 잘못된 생각에 관해서〉란 독특한 제목의 책에서 설사 인류 전체를 위해서라도 거짓말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하얀 거짓말은 없다는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은 대부분 상황에서 옳은 길을 제시해 준다고 평가받는다. 십여 년 전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크게 유행했을 때, 그 책에서 최종적인 정의와 윤리를 칸트에게서 찾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이 칸트의 윤리, ‘하얀 거짓말은 없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 바로 〈법화경〉이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세 가지 탈것을 말했는데 나중에 훌륭한 큰 탈것만 준다면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 되는가?”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 사람은 절묘한 방편으로 아이들을 불타고 있는 집에서 나오게 하여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옵니다. 아이들이 모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장난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 〈법화경〉 ‘제3 비유품’

〈법화경〉 ‘비유품’에는 그 유명한 삼계화택의 비유가 등장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부자가 잠시 밖을 나온 사이 집에 불이나 버렸다. 부자는 깜짝 놀라 집안의 식솔에게 어서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자식들만은 놀이에 빠져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현명한 부자는 꾀를 내어 자식들이 평소에 가지고 싶어 하던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불타는 집에서 나오기만 하면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했다. 이에 귀가 솔깃해진 자식들이 나와서 각자 원하는 수레를 달라고 하자 모두에게 ‘큰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주었고 이에 양이나 사슴 따위에도 만족할 자식들이 생각지도 못한 큰 선물을 받게 돼 모두 행복해했다는 이야기이다.

〈화엄경〉 ‘여래성기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뒤 중생들을 친히 살펴보시니, 모두에게 붓다의 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상하고 이상하구나’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다. 불교에서 붓다는 ‘일체지자’, 즉, 전지자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이상하고 이상하다’고 할 정도로 중생들이 윤회 속에서 벌이는 기행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앞서 불난 집에서 놀이에 정신이 팔려 빨리 나오라는 말을 듣지도 않는 자식들이 바로 중생이다. 붓다인 부자는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자식이라고 낳았더니 불난 지도 모르고 노는 아이들이라니. 그래서 고안한 것이 하얀 거짓말이다. 그들에게 양과 사슴, 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마지막에 하얀 소가 끄는 수레를 주는 부모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 바로 이 ‘이상하고 이상한’ 관계가 붓다와 중생의 관계다. 필자는 서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관계를 ‘절대적 타자’의 관계로 본다.

다시 돌아와 붓다께서는 윤회 속에서 기행을 일삼는 중생들을 위해 양과 사슴이 끄는 수레, 교리적으로는 소승의 길이 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화엄경〉의 말씀처럼 모든 중생에게는 이미 붓다의 지혜가 갖춰져 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지혜가 붓다의 지혜인데, 성문의 지혜를 성취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실 양과 사슴이 끄는 수레 따위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다. 그저 윤회의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위한 붓다의 거짓말이었을 뿐이다. 이것이 방편이다.

그런데 이는 칸트에게 비윤리적인 일일 뿐이다. 중생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으로 거짓말을 한 붓다야말로 칸트가 말한 비난 유형에 딱 들어맞는 인물일 것이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붓다의 거짓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방편은 ‘유불여불’의 경계로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우리가 방편이라 칭하며 행하는 많은 거짓말과 기만은 대부분, 아니 전부 옳지 않은 일이다. 방편은 붓다께서 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방편도 없이 어떻게 말법 시대의 중생들을 구제할 것인가? 도겐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한 가르침을 설하기 이전의 임시방편 가르침은 전혀 이득이 없다. 최후에 설하신 진실한 가르침(〈법화경〉)만이 유익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문제 삼지 말고, 언제나 진실로써 대답해야 한다.”
- 〈정법안장수문기〉

우리로서는 붓다께서 말씀하신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설프게 붓다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된다. 상불경보살처럼 매를 맞더라도 오로지 사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대들은 모두 붓다가 될 것이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그렇기에 신중단을 방편이라 하고, 여기서 명확한 깨달음을 구할 수 없다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신중단 그 자체가 방편이 아니라 깨달음이어야 한다. 영가단을 계단 삼고, 신중단을 방편 삼아 불단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영가단이 그 자체가 깨달음이어야 하고, 신중단 그 자체가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 자체가 다른 것의 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들의 이름을 네모 속에 가두어 놓은 한자(漢字) 한 글자마다 깨달음을 개현(開顯)한 천태지의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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