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15 (수)

[현불논단] 바른 앎이 바른 삶을 보장한다

세상 어지럽고, 삶은 고달펴
부처님 법서 바른 앎 찾아야
알면 자유, 모르면 고통이다

SNS에 퍼지는 명언(?)이 있다. 세상에 진짜 없는 것 세 가지는? 첫째 ‘공짜’, 둘째 ‘비밀’, 셋째 ‘정답’이란다. 얼핏 고개가 끄떡여진다. 그러나 현자들의 앎은 상식과는 달라 보인다. 

첫째, 공짜 없다? 누구나 수긍할 경험적 법칙이며, 윤리와 도덕의 근간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자는 아니란다. 세상은 정말로 공짜란다. 정해진 바 없는 것이 실상 진리이기에, 상상하는 무엇이든 가능하단다. 일체유심조이기에 화엄 세계는 그림의 떡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짜라고 불교는 말한다. 공짜라면 선악이 무슨 소용인가? 아니다. 윤리와 도덕의 부정이 아니다. 역으로 철저한 윤리와 도덕, 선행의 실천을 거쳐야만 공짜의 진리에 들어선다. 진리와 하나가 된 자만이 공짜의 복을 누린다는 것이다.

둘째, 비밀 없다? 이 또한 경험적 철칙이다. 드러날 것은 드러나고야 만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이라 믿기에 숨겨진 비밀은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풀지 못한 엄청난 비밀이 있다. 몸과 마음 너머의 비밀, 우주와 의식 너머의 비밀, 윤회와 열반 너머의 비밀... 현대 과학이 불가사의라고 치부한 바, ‘중첩’, ‘불확정성’, ‘불완전성’ 등 언어와 현상 이면의 실상을 알아야 한다. 불교적 용어를 빌자면, ‘무아’와 ‘공성’이라는 실상 진리를 통찰해야 한다. 생사를 해결해 줄 유일한 비밀이기 때문이다. 

셋째, 정답 없다? 정해진 바 없는 것이 진리이기에 정답 없다? 정답이 없으니까 몰라도 된다? 그냥 무심하게 무념으로 살면 된다? 아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것은 분명한 정답이다. 물론 콩의 속성이 무자성(無自性)이라는 것 또한 정답이다. 비록 정해진 바 없는 무자성이지만, 인과는 분명히 작용한다. 왜 정답이 있어 보이나? 인과법 때문이다. 윤회가 성립되는 이유다. 왜 정답이 없어 보이나? 무자성 때문이다. 열반이 성립되는 이유다. 그러니 대충 살아선 안된다. 중도의 비밀을 알아야만 정답이라는 장애마저 벗어난다. 

세상은 욕망으로 치달린다. 기술은 눈부시지만, 정신은 끝없이 타락하고 있다. 해가 바뀌어도 세상은 어지럽고, 삶은 고달프다. 저마다 살 궁리에 여념 없지만, 백약이 무효다. 삶은 앎에서 비롯된다. 바른 앎만이 바른 삶을 보장한다. 공짜 없고, 비밀 없고, 정답 없음은 생활의 지혜일지는 몰라도, 궁극적 지혜는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바른 앎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깨달아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합리적 사유만으로도 삶의 고달픈 짐을 덜어낼 수 있다.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병들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본질적 고통이 한낱 무지에서 비롯된 그림자였음을 알기만 하여도 자유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알면 자유, 모르면 고통이다.

영화 <레옹>에서 소녀 마틸다는 묻는다. “사는 게 힘든가요? 아니면 어릴 때만 그런가요?” 

레옹은 한숨짓는다. “언제나 힘들지!” 

부처님이 곁에 계셨으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앎이 없는 삶은 미혹이요, 삶을 떠난 앎 또한 미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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