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근대제주불교 인물 평가 ‘김석윤=운 대사’ 주장 근거 없다”

봉려관불교문화硏 제4차 학술세미나서
혜달 스님, 봉려관 관련 학설들 반박해

봉려관에 가사 내린 운 대사, 확인 안돼
“김석윤 결혼한 보천교도… 法전수 불가”
관음사·법정사, 봉려관 스님 단독 창건

봉려관, 수계처 대흥사 호혜적 관계 조명
수계 후 ‘대흥사 포교사’ 임명 받고 입도
호남 거부 국채웅 장녀 봉려관 문하 출가

(사)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 스님이 11월 16일 제주테크노파크 세미나실에서 열린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Ⅳ’ 학술세미나에서 ‘근대 제주불교의 왜곡상 고찰’을 발표하고 있다.
(사)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 스님이 11월 16일 제주테크노파크 세미나실에서 열린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Ⅳ’ 학술세미나에서 ‘근대 제주불교의 왜곡상 고찰’을 발표하고 있다.

근대제주불교를 이끈 인물로 알려진 김석윤이 ‘운 대사’ 였으며, 관음사·법정사 창건이 김석윤의 도움으로 이뤄졌다는 연구는 근거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혜달 스님은 11월 16일 제주테크노파크 세미나실에서 열린 ‘근대제주불교역사 그 진실을 찾다Ⅳ’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근대 제주불교의 왜곡상 고찰’을 통해 봉려관 스님 관련해 왜곡돼 전파되고 있는 기존 학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특히 혜달 스님은 일련의 연구들이 과도한 ‘봉려관 지우기’가 만들어낸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혜달 스님은 △한라산 관음사 1908년 창건설 △관음사·법정사 봉려관 스님·김석윤 공동 창건설 △‘김석윤=운 대사’였다는 한금순 제주대 박사의 기존 연구들을 봉려관 스님 기록들과 교차 비교하며 비판했다.

관음사 창건연도는 ‘1909년’이 맞다
‘관음사 1908년 창건설’에 대해 혜달 스님은 “1909년 창건”이라고 주장했다. 스님에 따르면 1908년 창건 기록은 ‘법화사 봉려관 비명(1943)’ ‘탐라기년부록(1952)’ 두 가지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자료인 ‘관음사 봉려관 비문(연도 미상)’ ‘두륜산인관음사사적기(연도 미상)’ ‘유관음사지(1917)’ ‘한라산 순례기(1930)’ 등에서는 1909년으로 기술돼 있다.

혜달 스님은 “한금순 박사는 여러 저술에서 관음사의 창건연대를 1908년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1908년을 증명할 자료는 부재하다”며 “관음사 봉려관 비문 등 다수의 앞선 기록에는 1909년, 1909년 봄으로 기술하고 있어 실제 관음사는 1909년 봄에 창건된 것을 숙지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자료는 봉려관 스님 생존 시 자료이며, 스님의 증언을 글로 남긴 것이어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관음사와 법정사를 봉려관 스님이 창건하며 김석윤의 도움으로 창건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혜달 스님은 ‘봉려관 스님의 단독 창건’임을 분명히 했다.

‘사찰 창건에 김석윤의 도움이 있었다’는 기록은 김석윤의 동생인 김석익이 쓴 <망형석성도인행록(1949)>에만 남아있다. 하지만, ‘관음사 봉려관 비문’ ‘봉려관의 관음사(1937)’ ‘유관음사기(1917)’ ‘제주도 아미산 봉려암의 기적(1918)’ ‘영주 기행(1924)’ 등 10여 개의 기록에는 관음사와 법정사 창건자가 모두 봉려암 스님임을 명시하고 있다는 게 혜달 스님의 주장이다.

혜달 스님은 “‘유관음사기’에는 1917년 김형식이 관음사에서 1박을 하며 봉려관 스님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당시 봉려관 스님은 김형식에게 ‘5~6년에 걸쳐 수백 명의 시주를 받아 관음사를 창건했다’고 술회하고 있다”면서 “1909년 봄은 김석윤이 수감 중인 상황이어서 관음사 창건에 끼어들기 어렵다”고 기존의 ‘김석윤 도움’ 학설을 반박했다.

보천교도가 스님에 가사 전수 가능?
이와 함께 혜달 스님은 김석윤을 ‘운 대사’로 주장한 학설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운 대사는 봉려관에게 가사를 전해 준 노승(老僧)으로, ‘관음사 봉려관 비문’ 등에는 “1908년 단옷날 남달리 보이는 운 대사는 스님이 있었다. 운 대사는 ‘그대를 찾은 지 오래됐는데 오늘에야 다행히 만나게 됐다’라면서 가사를 내어줬다”고 기술돼 있다.

이를 근거로 <한국 근대 제주불교사> 등 기존의 연구 저작과 논문에는 “김석윤은 1894년 출가 이후 ‘상운’이라는 법호로 관음사 창건 이전부터 제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항일운동에 참여해 금기시 되어 버린 김석윤을 동시대 승려들이 은밀하게 ‘승운 대사’ ‘운 대사’로 표현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혜달 스님은 “김석윤은 1907년 이미 부인과 자식을 둔 속인이었고, 봉려관에게 가사를 내어 준 시기인 1908년 김석윤의 나이는 31세로 ‘노승’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한 혜달 스님은 “봉려관 스님이 운 대사에게 가사를 전수받은 기록은 ‘관음사 봉려관 비문’ 등 5건으로 이중 ‘한라산 관음사 법당 중건 상량문’을 제외하면 모두 스님이 생존했을 당시 기록과 증언으로 신빙성 높다” “하지만 이들 기록 어디에도 운 대사가 누구라는 지칭이 없어, 현재로서는 단정할 인물이 없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혜달 스님은 김석윤이 신봉한 ‘미륵교’가 ‘증산교(보천교)’ 계열임을 분명히 했다. 혜달 스님에 따르면 동생인 김석익이 쓴 <망형석성도인행록>에는 1909년 이후 김석윤이 “보천교를 심복(心服)했고, 다시 미륵교로 바꾸었는데 미륵교 또한 보천교에서 파생된 세력이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정읍군에 살다가 동곡으로 옮겨 살았는데 모두 심복하던 종파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혜달 스님은 “제주를 떠난 김석윤은 정읍과 동곡 등에서 강증산을 미륵불로 섬기는 보천교 계열의 미륵교의 신봉자였다”면서 “김석윤이 신봉한 미륵교는 기존의 주장처럼 불교의 미륵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한금순 박사는 김석윤이 1934년 제주 정실 월정사의 주지였다고 주장하는데, 1935년 증산계 미륵교 지로사 김형오가 정실 월정사에서 미륵교 포교에 나선다. 그렇다면 김석윤은 제주에서도 증산교도에게 장소를 내어준 것”이라고 지적하며 “더불어 1942년 제주 미륵교(증산계) 사건과 1949년 김석윤의 행적 등은 다른 관점에서 검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혜달 스님은 “향후 근거없이 서술한 근대 제주불교사 및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사에 대해 기존자료에 근거하고 사실관계를 판단해 대중에게 내놓을 것”이라며 “근대 제주불교 역사가 사실의 역사로 제자리할 때까지 후속작업을 계속 진행할 계획”이라고 천명했다.

민순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봉려관 스님과 대흥사의 교류’를 통해 봉려관 스님의 수계인연과 대흥사의 제주 포교 등을 조명했다.
민순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봉려관 스님과 대흥사의 교류’를 통해 봉려관 스님의 수계인연과 대흥사의 제주 포교 등을 조명했다.

봉려관 스님 다양한 역사적 면면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봉려관 스님의 수계사찰인 대흥사와의 관계와 제자였던 국성해 스님의 부친인 호남 거부 국채웅을 조명하는 연구논문들도 발표됐다.

민순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연구원은 ‘봉려관 스님과 대흥사의 교류’를 통해 봉려관 스님의 수계인연과 대흥사의 제주 포교 등을 조명했다.

민 연구원에 따르면 봉려관 스님은 1907년 대흥사 산내 암자 청신암에 주석했던 비구니 유장 스님을 은사로, 대흥사의 청봉 봉성 화상을 계사로 수계했다. 봉려관이라는 법명과 해월이라는 법호는 계사인 청봉 화상에게서 받았다. 제주도로 돌아온 후 봉려관 스님은 산천단을 중심으로 관음수행을 이어갔고, 1909년 봄 관음사를 창건했다. 관음사가 당국으로 최초 허가를 받은 1918년엔 ‘대흥사 포교당’으로 등록됐다.

이에 대해 민 연구원은 “봉려관 스님은 수계 이후에는 ‘대흥사 포교사’로 취임했다. 대흥사 소속의 포교당으로 활동하는 것이 포교에도 용이했을 것”이라며 “사실상 제주 관음사는 대흥사의 최초의 지역 포교당이다. 대흥사는 1917년 전남 무안에 목교설교소를 설치했던 적이 있을 정도로 지역 포교에 관심을 가졌고, 1940년에는 제주에만 세 곳에 포교당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1924년 관음사 상량식에 대흥사 주지를 역임하게 되는 감선월, 박영희 스님과 본사를 대표해 탁승옥 스님이 참여했다. 이후 관음사가 추진했던 중앙포교당 건립불사 시주에도 36명의 대흥사스님이 참여한다.

민 연구원은 “봉려관 스님과 대흥사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고 호혜적이었을 것”이라며 “대흥사는 관음신행과 치유력에서 남다른 풍모를 보인 봉려관 스님을 알아차리고 인정해, 스님을 대흥사에서 수행해 본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포교사로 임명해 귀향케 함으로써 봉려관 스님의 대중 교화의 가피 속에 대흥사의 기풍 또한 펼쳐나가기를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성수 동국대 객원교수(불교신문 편집국장)는 ‘일제강점기 호남 부호 국채웅의 생애와 사회적 기여’를 통해 국채웅의 생애와 실천행을 살폈다.
이성수 동국대 객원교수(불교신문 편집국장)는 ‘일제강점기 호남 부호 국채웅의 생애와 사회적 기여’를 통해 국채웅의 생애와 실천행을 살폈다.

이성수 동국대 객원교수(불교신문 편집국장)는 ‘일제강점기 호남 부호 국채웅의 생애와 사회적 기여’를 통해 국채웅의 생애와 실천행을 살폈다.

호남의 대지주였던 국채웅은 일제강점기 전반에 걸쳐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펼쳤다. 그에게는 1녀 4남이 있었는데, 이중 장녀 국추는 봉려관 스님 문하로 출가해 ‘성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국채웅은 봉려관 스님과 제주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 교수는 “국채웅은 장녀가 출가해 비구니 성해 스님이 된 것을 계기로 제주 관음사 중창불사에 기여했다”면서 “교육을 통한 계몽과 전통문화 전승에 노력했던 국채웅에게 불교 후원이 전통문화 보존 운동의 또 다른 형태였고, 민족 정체성 유지의 한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허남춘 제주대 교수를 좌장으로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동국대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전임연구원 법진 스님, 이석환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탁효정 순천대 연구교수와 발제자들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한편, 이날 학술세미나에는 제주 금붕사 회주 수암 스님(전 태고종 제주종무원장)과 한마음선원 제주지원장 혜묘 스님, 보덕사 주지 재효 스님을 비롯해 전영준 제주대 사학과 교수, 강상무 법정사항일운동 유족회장, 오영호 봉려관선양회 상임이사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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