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설화 탐사대] 과거 16분·미래 2분 스승이 佛法 펼칠 승보종찰

13. 조계산 송광사

스승 기다리는 마음 담긴 도량
시주자 정성 생각 가르침 일화
시줏돈 사용 반듯함 엿보이기도

우화각과 능허교.
우화각과 능허교.

두 분의 스승은 언제쯤 오실까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는 삼보사찰 가운데 승보사찰이다. 고려의 보조 국사(1158~1210)를 포함한 16분의 나라의 스승(國師) 및 훌륭한 스님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국사전(國師殿)에는 나라의 스승이었던 16분 스님들의 영정이 있다.

송광사는 신라말 혜린 선사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였다. 그 뒤 보조 국사 지눌 스님이 길상사를 중창하였다. 길상사는 50여 년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스님은 팔공산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근처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 이름도 조계산으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송광사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조계산 송광사다.

송광사(松廣寺)라는 절 이름에는 승보사찰다운 재미있는 풀이가 있다.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분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분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풀이다. 현재 16분 나라의 스승이 나왔으니, 앞으로 두 분의 스승이 더 나와 불법을 펼치리라.

한편 송광사라는 절 이름에는 보조 국사와 연관된 전설이 있다. 스님이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을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았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落臺)(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 이 전설을 토대로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솔갱이 절’이라 풀이하였다. 또는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다.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어 송광사가 되었다.

조계산 송광사의 절 마당에는 탑이 없다. 송광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연꽃 모양이다. 둘러싼 산은 연못에 뜬 연꽃이고, 송광사는 연꽃의 중심이다. 연꽃 중심인 송광사에 돌로 된 탑을 세우면 연꽃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기 때문이다. 절과 산을 별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계산 송광사 일주문.
조계산 송광사 일주문.

배추 잎사귀 좀 잡아주시게나
송광사 경내로 들어서는 계곡 길은 참으로 걷기 적당하다. 너무 짧지도 않고 너무 길지도 않다.
두 스님이 설레는 마음으로 송광사를 찾아가고 있었다. 선방에서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으며 정진하고자 하는 발걸음이었다. 계곡 길을 들어서자 마음은 벌써 선방에 앉아 있었다. 이번 한 철 정진을 다짐하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계곡에 배추 잎사귀 하나가 떠내려오고 있었다. 송광사에서 떠내려온 듯하였다. 배추 잎사귀를 보고서 한 스님이 말하였다.

“시주자가 정성스럽게 올린 공양물을 저렇게 버리다니, 이 절에서 배울 것이 없겠군.”
“맞는 말일세. 시주자의 정성을 알지 못하는 절에서 무엇을 배우겠나. 우리 그만 발길을 돌리세.”

두 스님은 발길을 돌려 내려가려고 하였다. 그 순간 위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네들, 거기 떠내려가는 배추 잎사귀 좀 잡아주시게나.”

노스님이 배추 잎사귀 하나를 쫓아 절에서 뛰어 내려왔다. 두 스님은 계곡에서 배추 잎사귀를 건져 노스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채 노스님과 함께 절로 향하였다.
송광사뿐만 아니라 여러 절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근래 송광사에 계셨던 스님들의 일화에서도 시주자의 정성을 생각하는 가르침이 있다.

어느 날 구산 스님(1910~1983)이 공양간 구석구석 살피는데, 마침 수채에 밥풀 몇 알이 떨어져 있었다. 구산 스님은 바늘을 꺼내더니 밥풀 하나하나 찍어다가 물에 헹구어 먹었다. 이후 공양간에는 밥풀 하나도 흘리지 않도록 모두 조심하였다. 구산 스님의 은사였던 효봉 스님(1888~1960) 역시 바늘로 수채에 있는 밥풀을 먹었다. 쌀 한 톨에도 수많은 이들의 정성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용입에 매달린 엽전.
용입에 매달린 엽전.

다리 밑 용이 엽전을 물고 있는 까닭은
배추 잎사귀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순천 송광사 계곡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일주문에 도착한다. 일주문 왼쪽으로 발걸음을 조금 옮기면 사진에서 자주 보는 풍광이 나온다. 돌다리, 누각, 그리고 계곡물이 어우러진 이곳은 송광사에서 아름다운 풍광 가운데 하나다. 일주문 밖 징검다리에서 바라보는 돌다리 풍광이 최고다.

돌다리의 이름은 능허교(凌虛橋)다. 돌다리 밑을 보면 용이 있다. 물론 이 용은 물길을 통해 절 안에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제압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 자세히 보면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에 엽전이 철사에 꿰어 매달려 있다. 이 엽전에는 절 살림의 반듯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1707년(숙종 33년) 돌다리를 세울 때로 추정한다. 다리 불사를 위해 예산을 세우고 한 푼 두 푼 시주를 받았다. 이렇게 모인 시줏돈으로 불사를 마치고 보니, 엽전 세 냥이 남았다. 공사는 끝났지만 남은 돈이 문제였다. 시주받은 돈을 다른 일에 쓰는 것은 호용죄(互用罪)로 계율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에 돌다리 아래 손이 닿지 않는 용머리에 철사를 꿰어 남은 돈을 매달아 두었다. 훗날 돌다리를 보수하거나 새로 건립할 때 보태 쓰도록 한 것이다.

시줏돈이 다른 용도에 사용되었다면 시주자는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다. 그래서 불사를 할 때는 예산을 짜고 그것에 맞게 모연(募緣)을 한다. 모연은 불사에 필요한 재물을 시주하도록 권하고 의뢰해서 인연 있는 사람을 모으는 것을 말한다. 시줏돈을 함부로 하여 구렁이나 소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여러 절에 전한다. 그만큼 시줏돈은 무서운 것이다.

고향수.
고향수.

고사목이 다시 살아난다면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7m 정도의 고사목이 있다. 이는 보조 국사가 꽂은 향나무 지팡이가 자라난 것이라 전한다. 그런 나무가 언제인가 죽어 고사목이 되었는데, 보조 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을 때 살아날 것이라 한다. 그런데 구산 스님은 〈석사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송광사 정원에 고향수(枯香樹)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안내판에 이렇게 씌어 있다. ‘아생여생(我生汝生)하고 아사여사(我死汝死)라. 내가 살면 너도 살고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그런데 이 글이 잘못 전해져서 보조 국사가 다시 살아나면 고향수도 살아나는 거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런 말이 아니다. 자성을 발견할 때에 자기 자신이 생사를 초월하면 우주 만유가 동시에 생사를 해탈하기 때문에 ‘내가 살면 너도 산다(아생여생我生汝生)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미혹할 때에는 주객이 분리되고 깨달을 때에는 주객을 초월하여 격외인(格外人)이 되는 것이다.

구산 스님의 말씀과 달리 사람들이 ‘보조 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을 때 살아날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가르침을 전해줄 스승이 그리워서가 아닐까. 18분의 스승에서 나머지 두 분의 스승을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할까. 혹 벌써 두 분의 스승이 다녀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이 있었듯이. 아니면 지금 스승이 옆에 있는 데도 아상(我相)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지도.

▶한줄 요약 
사람들이 ‘보조 국사가 송광사를 다시 찾을 때 살아날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가르침을 전해줄 스승이 그리워서가 아닐까. 18분의 스승에서 나머지 두 분의 스승을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할까. 혹 벌써 두 분의 스승이 다녀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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