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진취적이며 한국적인 불교이념 구현 도량

▲ 태허홍선 스님이 창건하고 불입종을 창종한 서울 숭인근린공원 인근의 낙산 묘각사. 지금은 종명을 바꾼 관음종 총무원이 있는 사찰로 도심 템플스테이 도량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전국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발견된다. 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아 한국의 정기를 끊으려 한 흔적이 대표적이 예이다. 일제는 경복궁에 총독부 청사를 지을 때 근정전에서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방향에서 약간 빗겨나게 지었다. 북악에서 뻗어 내려오는 혈맥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총독부 청사에 소요되는 석재를 좌청룡인 낙산에서 채석함으로써 혈의 파괴와 지배자의 권위의식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조선이 건국하고 한양을 도성으로 정할 때 가장 걱정했던 것은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의 지세가 약한 것이었다. 이를 우려한 사람들은 좌청룡의 지세를 강하게 하는 묘안을 내었다. 먼저 동대문 운동장이라 불렸던 곳까지 흙을 쌓아 낙산 좌청룡의 지세를 강하게 했다. 그곳을 성 동쪽이라 해서 성동원두라 불렀다.

이곳도 일제의 만행을 피해갈 수 없었다. 조선의 정기를 끊는 한편 1924년 1월 결혼한 히로히토(裕仁)를 위해 운동장을 만들었다. 이곳을 허물고 터를 닦은 후 1926년 3월 축구장과 야구장 그리고 테니스장을 준공했다. 그리고 명칭을 동궁전하어성혼기념경성운동장(東宮殿下御成婚記念京城運動場)이라 했다. 이곳은 광복 후 한국 스포츠의 산실이었으나 개발에 밀려 지난 2009년 10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 됐다.

다음으로 동쪽에 큰문을 세우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했다. 궁궐 정문을 비롯해 다른 도성 문이 모두 세 글자인 것과 달리 한 글자를 더해 기를 북돋은 것이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조선은 500백년이 넘는 역사를 기록했으니 풍수란 그리 허황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풍수와 불교가 합해진 것이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다. 이것은 신라말 道詵국사가 주장한 것으로 우리나라 지형에서 악(惡)하고 흉(凶)한 지역에 사원과 탑을 세워 국가의 안녕을 도모한 사상이다. 이것은 태조 왕건은 물론 고려시대 사원 창건과 탑의 조성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런 비보사탑설이 신라 말에서 후삼국과 같은 혼란기에 유행한 것은 위정자들이 현세적 어려움을 물리치고, 지역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대중들을 위로하는 신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이르러 서울에도 이런 비보사탑설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 있다. 지하철 1호선 동명역 2번 출구에서 인근 숭인근린공원 밑에 자리한 묘각사가 그곳이다. 이곳은 1940년 태허 홍선(太虛 泓宣)이 세웠다.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태허는 1965년 중생구제의 염원을 세워 대한불교불입종을 창종했다. 불입종은 1988년 5월 28일 대한불교관음종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태허홍선은 1904년 음 8월 25일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서 아버지 전주 이씨(李氏) 응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용이(龍伊)였다. 부친 응준이 종로에서 크게 포목상을 하던 거상(巨商)이어서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신앙심이 깊은 거사로 법명이 선지(善智)였다. 불심이 깊은 생활을 한 탓에 용이 역시 어릴 때부터 불심이 깊었다. 11세가 되자 서당에서 한학공부를 시작했으나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현 경복고등학교 전신인 경성예비고등전문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용이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귀의한 것은 집 근처에 있던 각황사(覺皇寺)의 영향이 컸다. 1910년 10월 27일 원종이 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찰로 도심 속에 세운 각황사는 갑작스럽게 추진한 탓으로 공간이 협소했다. 그래서 1914년 9월 28일 모두 철거하고 일본과 서양을 혼합한 양식으로 2층 법당을 세웠다.

이렇게 세워진 각황사는 불교의 사회적 인식을 높이기 위한 방안들이 개설됐다. 당시의 유명한 선승을 초청해 대중 설법을 개최했다. 초청된 고승 가운데 경운(擎雲) 선사는 세간의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당시 선사는 30여 년 동안 산문을 나오지 않고 학식과 도가 높아 당시 생불과 같이 존경받았기 때문이다.

각황사에서 경운 선사의 법문을 자주 듣던 용이는 26세인 1930년 그를 은사로 출가해 홍선이란 법명을 받았다. 출가 후 그의 수행은 다양하게 전개됐다. 27세가 되던 해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가 게이오 대학에서 공부했다.

유학 후 31세 때부터 소요산 백운암에서 천 일 기도를 했다. 34세인 1938년에는 중국 산서성을 순례했다. 학업과 수행을 마친 태허는 마침내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대중교화를 36세인 1940년 낙산에 묘각사를 창건했다.

이곳에 사찰을 세운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이곳에 도적이 들끓으면 서울 시민 모두가 불안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찰을 세워 헐벗고 가난한 시민을 구제한다면 서울이 평온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비보적(裨補的) 성격을 띤 창건이었던 것이다. 그런 탓에 그는 중생구제로 일관된 수행을 보여줬다.

이곳 묘각사에서 수행하던 태허는 8ㆍ15광복을 맞았다. 그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불교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그러나 불교계 역시 좌우 대립에 휩싸였고, 이어 발발한 6ㆍ25사변으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수행처를 경북 상주 백화산으로 옮긴 태허는 이곳에서 6년간 수행에 전념했다. 1956년 서울로 돌아온 후 비구 대처의 대립으로 혼돈된 불교계를 바로하기 위해 1957년 일승불교현정회(一乘佛敎顯正會)를 조직했고, 1958년부터 2년 동안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거리 설법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불교 운동이 될 수 없음을 느낀 그는 1965년 법화사상을 중심으로 한 불입종을 창종했다. 그가 <법화경>의 파사현정 교리에 입각해서 종단을 설립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였다. 근대 격변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대중들의 성품이 심한 갈등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파사현정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겨레를 위해 눈과 등불과 그리고 길잡이가 되겠다는 서원을 실천하다가 1979년 6월 낙산 묘각사에서 입적했다.

태허의 사상을 계승한 제자들은 1988년 5월 28일 종명을 대한불교관음종으로 개명하고 내면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도모했다. 종명에서 알 수 있듯이 관세음보살의 방편력을 수용했다. 소의경전 역시 <법화경>은 물론 <화엄경>을 비롯해 여러 경전을 폭넓게 수용했다. 본존 역시 석가모니불에서 법보화(法報化) 삼신불로 확대됐다. 이런 면으로 볼 때 관음종으로 개명한 것은 대승적 종단으로 거듭나기 위함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종단으로 거듭난 관음종이 앞으로 걸어가야 길은 쉽지 않다. 전통을 계승해 시대에 맞는 종단 위상을 정립해야 하며, 21C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종단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태허의 정신이 잘 계승돼야 한다.

태허는 고식적인 불교에서 탈피해 진취적이고 한국적인 새로운 불교이념을 기원했다. 그래서 출가 수행자 중심의 종단이 아니라 승속 혼연일체가 되는 종단으로 만들었다. 다음 대중의 종단으로서 부처의 지견을 계발하고 실천 수행함으로써 자아완성을 추구했다. 마지막으로 태허는 자신만의 깨달음이 아닌 사회구제의 이념을 제시했다.

관음종으로 변경한 후학들은 이런 이념이 잘 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개명이후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 점이 보이고 있다. 먼저 기복적인 불교에서 자오(自悟) 자각(自覺) 자증(自證)의 신앙불교를 구현하기 위해 서울 불교문화대학을 통해 체계적인 불교 이론과 실습을 겸할 수 있도록 했다. 더 나아가 이런 교육이 출가와 재가를 구별하지 않고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마련한 점에서 승속 동행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포교를 위한 방안도 다각도로 실천하고 있다.

그 예로 2002년 월드컵 때부터 낙산 묘각사에서 템플스테이를 시작해 운영한 결과 2004년 이후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참가자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다. 고무적인 일로 앞으로 발전시켜야 할 정책이다. 사회적으로 관음종을 알리는 일이지만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는 현대사회 속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통의 발달로 풍수에 의존하던 것이 많이 사라졌다. 비보사찰 역시 은 현대적 의미를 찾을 때이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중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찰이 비보사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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