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각산과 도봉산이 만나 고개를 이루는 곳이 우이령(牛耳嶺)이다. 이름에 걸맞게 그곳엔 소의 귀를 닮은 우이암이 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우이동이다. 이곳에서 삼각산 백운대로 오르다보면 도선사가 나온다. 사찰 홈페이지를 보면 신라 말 고승 도선국사를 개산조로 하고 있다. 처음부터 도선사였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조 기록에 의하면 도선사의 명칭은 도성암(道成庵)이었다.
우이동에서 동쪽으로 산길을 따라 방학동으로 가다 연산군 묘를 지나면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남편 죽산 안씨 양효공 안맹담(安孟聃)의 묘가 나온다. 도성암은 정의공주의 원찰이었다. 정의공주는 1428년 그와 결혼하였다. 이 무렵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음과 토를 붙이는 문제가 난제였다. 세종은 여러 자식들에게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모두 어려워서 힘들어 할 때 총명했던 공주가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세종이 매우 기뻐하며 노비 수백 명을 상으로 하사하였다. 왕실과 혼인하여 가문의 명예가 높아졌는데 아내의 지혜로 큰 재물을 얻은 안맹담은 죽산안씨 대동보에 이를 기록하여 후손에 남겼다.
정의공주의 원찰이었던 도성암은 조선 중기에 다소 어려운 과정을 겪은 것 같다. 선조 29년(1596) 3월 3일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림을 그려 올릴 때 東門으로 통하여 왕래하는 길로 성 밖에 수도암, 도성암 등의 암자가 있고 그 밑은 곧 우이동이라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숙종 6년(1680) 7월 한성부에서 도성암 옛터를 한성부에 예속시켜 벌목을 금지하도록 건의하자 이를 윤허한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사세가 어려워져 이 무렵 폐사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또한 30여 년이 지난 숙종 39년(1713) 7월 사찰이 중건 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시 사세가 중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무렵 중창되면서 사명을 도선사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왕실과 인연이 깊은 도성암이었지만 전해지는 옛 기록이 없어 수많은 고승들의 활약을 알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위안되는 것이 있다. 이곳은 현대불교에 있어 상당한 의미가 있다. 청담이 이곳에 머물면서 조계종의 큰 흐름을 정립하였기 때문이다. 종단의 중요한 소임을 맡은 60년대 이후 70년대 초 한국불교의 기본방향이 그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그는 사회와 불교의 관계를 제대로 읽어내는 몇 안 되는 수행자였다.

생애 전반부인 일제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청담은 그 현실 속에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걸었다. 출가한 청담은 일제의 지배로 한국불교의 전통이 상실되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그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의 방해와 기득권을 장악한 집단의 방해로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항시 한국불교의 중흥을 위한 염원이 담고 있었다.
생애 후반부인 1945년 광복이후 청담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고심하였다. 그는 일제의 강점에 의해 변질된 한국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리고 종단의 지도자로 새로운 산업사회 속으로 진입한 한국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 하고, 어떤 역할을 하여야 하는지 고민하였다.
그 가운데 승가교육은 종단의 장래를 위해 심혈을 기우린 불사였다. 불교계 인재 육성을 위해 불교전문학교를 세우는 일을 서원으로 세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도제교육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승가대학의 설치였다. 그것은 현행 강원과 선원의 제도와 동떨어진 제도가 아니라 현재의 교육체제를 개조하여 성불할 수 있는 수행자와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스승을 배출할 수 있는 승가학원으로의 개조였다. 그가 도제교육을 현대화하려는 것은 젊은 대학 출신의 엘리트를 승려로 만들어 그들이 종교인으로서 지도이념에 충실하고 철저한 수행관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청담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불경 번역이다. 그런 생각은 일제하에서 불경 번역에 크게 기여한 용성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62년 1월 1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보내는 공개 건의문에서 세 가지를 당부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팔만대장경의 국역이었다. 팔만대장경을 국역하여야 하는 이유는 남녀노소가 한번 읽음으로써 불법의 교리를 신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일들이 한국불교의 사회적 역량을 高揚시키는 일로 여겼다.
청담의 활동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보다도 미래의 한국불교에 대해 고민한 수행자였다는 것이다. 특히 다가오는 21세기 한국불교의 역할에 대해 많은 관심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집약된 것이 바로 불교의 대중화와 인류를 위한 역할 증대이다.
그는 한국불교가 인류를 위해 헌신할 것을 제안한 지도자였다. 한국불교가 우리의 사회 변화에 기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그 역할을 담당하기를 염원하였다. 그렇게 되기 위해 체제 변화는 물론 신앙관의 전환을 통해 내재적 역량이 성숙되기를 염원하였고, 그 바탕 위에 인류를 위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런 청담의 생각을 가만히 살펴보면 7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 불교계에서 필요하다고 주장된 이야기와 일치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현대불교의 공과는 둘째 치고 분명 앞선 수행자였다.
도선사와 인연이 깊은 사람은 이야기 할 때 육영수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도 연세 지극한 분들은 그녀에 대해 자태가 고왔던 영부인으로 기억한다. 그녀가 도선사와 인연이 맺은 것은 5.16이후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을 때 청담의 호국참회불교에 감화를 받은 후 1974년 8.15기념식장에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도선사를 찾았다.
호국참회불교는 신라불교의 통일염원, 고려불교의 호국염원, 조선불교의 구국염원, 그리고 현대불교의 평화염원에 입각하여 미신불교가 아닌 수행불교 이론불교가 아닌 실천불교 관념불교가 아닌 생활불교로 불교재흥을 도모한 사상이다.
당시 외적으로 남북의 팽팽한 대치 속에 내적으로 부패한 정부, 혼란한 사회질서, 극심한 가난에 직면한 지도자로서 새로운 시대적 비전을 제시한 청담의 사상은 좋은 가르침이 될 수 있었다.
불심이 있던 육영수는 대덕화(大德華)란 불명을 받았다. 그녀는 국가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도선사를 찾아 3.7기도를 하는 등 불심으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한 불자였다. 지금 우이동에서 도선사 입구까지 험준한 산비탈임에도 불구하고 말끔하게 닦여져 있는 것도 불심 깊은 그녀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선사의 불사 가운데 현대불교 포교의 모델이 된 것이 있다. 바로 108산사순례이다. 이 순례는 사찰참배의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 불사이다. 지금까지의 산사순례 대부분이 자신의 복을 비는 참배였다면 108산사순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순례이기 때문이다. 참가하는 신도수도 많을뿐더러 이들이 그곳에서 펼치는 새로운 포교의 모습은 신선하다.
순례단은 참배를 마치면 사찰 앞에 직거래 장터를 열고 지역 특산물을 구매함으로써 농촌에 용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지난해부터는 농촌중심으로 형성된 다문화 가정과 인연 맺기를 추진해 조국을 떠나온 외국여성들에게 좋은 호감을 주었다. 점점 지방의 인구가 줄어 지역주민과 지역경제의 축소로 어려움을 겪는 지방사찰을 위한 뜻 깊은 불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를 본받아 인천의 사찰에서도 108산사 순례단이 발족하였다. 마음 같아선 대도시 많은 사찰들이 순례단을 조직해 도시와 지방의 원활한 가교역할을 했으면 한다.
이런 도선사의 모습을 보면 오래 세월 쌓아온 사찰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뛰어난 역량이 있는 선지식이 있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음을 느끼게 한다. 삼각산 정기를 받은 도선사에서 또 다른 선지식이 출현하여 한국불교를 한 단계 성숙시키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