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세상 닮은 겨울 ‘백색미식〈白色美食〉 ’

산사서 요긴한 먹거리 백김치에
사찰에 있는 과일·잣 곁들이면
적당한 단맛·고소함 비타민까지
색 곱고 시원한 맛에 스님들 미소

눈 쌓인 어느날, 여거 스님이 뚝딱뚝딱 백김치 물국수를 만들어 냈다. 오랜기간 별좌 소임을 맡았던 여거 스님은 “음식을 내는 것 뿐 아니라 여러 사람  둘러보고 크고 작은 요령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이곳이 무릉도원인가 싶었다. 

하얀 눈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 겨울의 불영사(佛影寺). 하늘과 땅의 경계마저 사라진 순백의 설국을 마주하자 오랜 시간 그려온 이상향의 땅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좋은 건 딱 3일이었어요, 그다음부터는 본격적인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거든요.” 

재미난 기억이 난 것처럼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여거 스님에게 그날의 기억은 오늘도 생생하다. 

작지만 어엿한 한 사찰의 주지로, 또 사찰음식 전문강사로 많은 이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하는 요즘이지만, 지금도 그해의 겨울은 결코 잊지 못할 나날들이었다. 

출가와 함께 어른스님의 말씀을 따라 무작정 향했던 경북 울진의 불영사. 동해의 세찬 바람과 함께 몰아치던 2월의 함박눈은 이제 막 출가한 스님과 세상 사이를 지우는 결계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깊은 산중으로, 그런 곳으로 떠나길 바랐어요. 도착해 보니 산이며 계곡, 도량까지 전부 눈으로 덮였는데 얼마나 멋있던지. 말이 안 나올 만큼 좋았어요. 순간 이곳이 극락이구나 싶었지요.”

새하얀 그날의 기억은 수행자로서의 첫걸음과 궤를 함께한다. 저마다의 소임이 주어지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터다. 출가 후의 생활은 속가의 때를 벗고 새로운 물을 들이는 시간. 농사를 짓고 수확하여 다듬고,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공양을 올리기까지 출가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세상이 곧 수행의 현장이 되었다. 

“힘들지 않았어요. 스님들은 무엇 하나라도 내가 좀 더 하면 그게 복을 짓는 것이라고 배우니까. 매일 조금씩 더 부지런히 살아가는 법, 복 짓는 즐거움을 배우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언제나 반가운 이름, 국수

“처음엔 후원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보니 늘 음식을 하고 있었어요. 다들 맛있게 잘 먹어주니까 마음이 나서 뭐든 더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사찰음식’이라는 표현조차 낯설었던 시절, 하지만 공양간에서 보고, 듣고, 익히며 쌓은 그 날들이야말로 수행자로서, 또 사찰음식 전문가의 길을 살아가는 오늘의 단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늘 선방에 가고 싶었는데 자꾸 인연이 닿지를 않고…. 나중에는 사무실에서 소임을 보다가 선방에 가겠다고 짐을 싸러 갔는데, 그때 잡혀서 되레 별좌 소임까지 맡게 됐어요. 나는 복을 못 지어서 선방에 못 가나 싶어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웃음).” 

하지만 언젠가 마음공부를 하러 떠나겠다고, 반드시 그러겠노라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내고, 버텨낸 그곳에 답이 있음을 깨달은 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아침 짓고 나면 점심 걱정, 점심 하고 나면 저녁 고민에 늘 바빴던 시절. 하지만 정작 여러 사람을 둘러보는 법을 배운 것도, 또 크고 작은 요령을 배운 것도 이때였다. 

선방에서 오래 수행을 하고 계신 스님들은 체력이 약해져 쉬이 예민해지고, 면역력이나 소화력이 약해지기가 쉬웠다. 누군가 감기에 걸리면 선방 스님 모두에게 전염되는 것은 시간문제. 스님들의 건강 상태야말로 매일의 식단을 꾸리는 데 가장 큰 변수였던 것이다. 그럴 때면 정해진 메뉴가 있어도 수시로 먹을거리를 변경해야만 했는데, 매번 효자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국수였다. 

“선방에선 겨울철에 감기를 많이 앓다 보니까 소화가 안 돼요. 소화는 안 되는데 또 열은 나거든. 그럴 때 국수를 하지요. 여름철엔 메밀국수를 먹지만 메밀은 찬 성질이 있어 겨울철엔 피합니다. 그럴 때 꺼내는 게 바로 백김치 물국수였어요. 적당한 탄산이 있어서 체기도 내리고, 열도 다스리니까요.”

늘 한정된 먹을거리 안에서 이런저런 변주를 하기에도 국수는 더할 나위 없는 재료였다. 아침에는 죽, 점심과 저녁은 오후 불식을 하거나 간단하게 드시는 스님들의 헛헛한 속을 채우기 위한 별식으로 국수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아무리 식탐이 없는 이라 해도 국수가 나오는 날이면 누구라도 양껏 드시는 모습이 좋았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들어 예전만은 못하지만, 국수 나오는 날엔 늘 곱빼기는 거뜬히 먹었어요. 아마 국수 싫어하시는 스님은 안 계실걸요.” 

국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여거 스님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이 하얗게 피어오른다. 생각만 해도 정겨운 국수 한 그릇의 힘, 바로 스님들을 웃게 하는 ‘승소’다. 

백색의 겨울미식

여거 스님에게 백김치 물국수는 겨울의 먹을거리다. 오래전 그해의 눈 덮인 세상과 닮아있는 깨끗하고, 정갈한 백색의 미식. 

“출가해서 보니 절에선 김치도 참 예쁘게 잘라서 담아요. 그중에서도 백김치는 그 색이 정말 깨끗하고 정갈하지요. 특유의 미색과 노란빛이 겨울과 참 잘 어울려서 겨울 하면 늘 백김치 생각이 절로 납니다.” 

백김치는 본격적인 김장에 앞서 조금 앞당겨 먹어야 배추가 질기지 않고 맛이 좋았다. 또 다른 김치들과 달리 별다른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고, 담그기가 쉬워 편했다. 적당히 익으면 시원하고 아삭한 맛에, 또 달이 들어 아예 시어지면 이런저런 무침이나 조림으로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이래저래 신통하고 고마운 존재였다. 

오래전 교통이 몹시 불편한 산사에 살 때도 백김치는 요긴한 식재료로 노상 쓰임이 많았다. 깊은 산중에 종일 힘을 들여 찾아온 손님들이 공양 시간을 놓쳐 배를 곯게 되면, 어른 스님으로부터 간단히 요기할 것을 만들어 보라는 부름을 받곤 했다. 

산 깊은 사찰에 재료가 넉넉할 리가 만무하고, 공양간도 아닌 작은 다각실에서 무엇이라도 이용하여 먹을 것을 만들어 내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겨울이면 빼놓을 수 없던 것이 바로 백김치 물국수다. 

“김치만 꺼내 넣으면 심심하니까 이것저것 있는 재료를 활용해 보는 거예요. 절에는 과일이 흔하니 넉넉히 곁들이고, 곶감을 썰어 넣어 잣을 뿌려주면 적당한 단맛과 고소함, 비타민까지 영양가가 더해집니다. 이렇게 내어 드리면 색도 곱고, 달콤하고 시원한 맛에 스님들이 참 좋아하셨어요.” 

그 시절 스님들께 뚝딱 만들어 올리던 백김치와 국수는 이제 절을 찾는 신도들과 함께 나누는 별식으로 여전히 이 겨울을 채운다. 

맛있어라, 사바하!

“대중이 모여 살면 음식이 다양해져요. 한두 명이 있을 때는 찾기 편하고, 좋아하는 음식들만 먹게 되지만 여럿이 함께 모여 살면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각각 입맛도 다르고, 또 필요한 음식들도 달라지니까요. 다양함을 인정하고, 함께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면 오히려 배우는 것이 많아집니다.”

공양주를 살면 복이 생기고, 채공을 살면 지혜가 생긴다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었다. 한 끼의 공양이라도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도록, 무엇보다 스님들이 잘 드시고 그 힘으로 더 큰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며 정성을 다했다. 

지금도 도량보다 더 큰 채마밭에서 연중 농사를 짓고, 또 그것으로 뭐든 만들어 사시사철 신도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은 스님의 여전한 수행 방편이다. 그리고 그 시절 정성껏 만든 음식이 완성되면 잊지 않고 외워주던 한 줄의 주문. ‘맛있어라, 사바하!’는 이제 사람들에게 음식이 맛있어지는 은밀한 비법처럼 전해주곤 하는 것이다.

소박하지만 정성을 다해 만든 국수 한 그릇이 한 수행자의 배고픔을 달래주길, 그리고 잠시나마 고된 수행의 여정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랐던 그때. 오늘도 그날의 마음을 기억하며 스님은 외친다. 

“맛있어라, 더 맛있어져라. 사바하!” 

여거 스님의 백김치 물국수

재료
백김치 적당량, 백김치 국물 1컵,  다시마 식초, 매실청, 잣, 곶감, 배 조금

만드는 법
1. 국수는 1인분 분량을 삶아서 찬물에 잘 헹궈준다.
2. 백김치 국물과 생수를 1:1 분량으로 섞는다.
3. 2번의 국물에 다시마 식초와 매실청을 각각 1TS 넣어 잘 섞어준다.
4. 국수에 완성된 육수를 부어준 후 잣, 곶감, 배를 예쁘게 얹어주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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