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진리의 대행원을 보여준 선지식

주인공 관법 통해 중생 제도
한마음선원 창건…전법행화
국내외 25곳 지원으로 발전

영상·매체포교 등서 신기원
청년 거사들 전법에 힘써
정신과 물질의 조화를 주창

묘공당 대행 선사(妙空堂 大行, 1927~2012)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불세출의 선지식이었던 대행 선사. 생전 대행 선사는 일체가 한마음에서 들고 나는 묘공(妙空)의 도리로써 길을 묻는 중생들을 제도했다. 선사의 생애는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걸어 온 대자유인의 발걸음이었다.

우주의 근본 묻던 어린 시절

대행 스님은 1927년 음력 1월 2일(양력 2월 3일) 지금의 서울 이태원에서 부친 노백천(盧伯千)과 모친 백간난의 3남 2녀 중 셋째인 장녀로 태어났다. 조부와 부친은 모두 무관 출신이었고, 부친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군인이었다. 그런 부친의 항일 운동이 빌미가 돼 윤택하던 집안은 스님이 7살이 되던 해에 가산이 몰수돼 몰락하게 됐다. 하지만 7살의 스님을 힘들게 한 것은 가난보다 부친의 엄한 가르침이었다.

가족의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산으로 들로 나물과 이삭을 구하러 다녀야 하는 모진 시간 속에서 스님은 풀이나 들짐승 등과 대화하며 터득했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는 깊은 마음의 눈이 생겼다. 그때 마음속의 ‘아빠’라 세워두고 수시로 ‘아빠’와 마주서 인생과 우주의 근본을 캐물었다.

스님은 14살 나던 해에 상원사 인근의 외가에 갔다가 한암 큰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한암큰스님과의 인연은 불교라는 거대한 운명과의 만남이었다. 스님이 경기도 일대의 산야를 떠돌며 수행하던 중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포화를 뚫고 찾아 간 곳은 서울의 흑석동 숲이었다. 굶주리면 굶주린 그대로의 자성을 보았고 목마르면 목마른 그대로의 성품을 보며 산을 헤매는 사이 전쟁은 끝났고 잠시 가족들과 만났지만 이내 발길은 다시 산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만행의 시간이었다. 전쟁의 참상, 끈질긴 가난,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 모든 것이 비정상인 시대에 오직 산길을 걷고 굶주림과 맞섰다. 그 길에 ‘아빠’가 있었고 늘 깨침의 종소리를 갈구했다. 당시를 스님은 이렇게 회고했다.

“산으로 돌아다닐 때 여기저기 돌도 있고 물도 있고 바위도 있고, 곰팡이 냄새나는 썩은 나무도 있고 잘생긴 나무, 비틀어진 나무도 있는 것을 보고 세상의 조화를 느꼈다. 거기서 경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조화가 바로 팔만대장경이란 걸 알았다. 경전을 읽어 보지 않았어도 한두 마디 들어보면 다 포착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조화의 이치를 알았던 결과였다.”

치열한 만행, 自利利他의 길 걷다

스님의 20대와 30대는 산천을 스승으로 삼아 끝없이 내면의 자성을 시험하고 체험하는 치열한 만행으로 채워졌다. 산과 들을 돌아다니며 내면의 ‘아빠’를 더 사무치게 만났고, 내면을 불태우는 구도열은 더위와 추위를 알지 못하게 했다. 홀몸으로 자성의 이끎을 따라 걸음을 놓으니 화장사(現 지장사), 국립묘지, 한강변, 관악산, 광나루, 헌인릉, 청계산을 거쳐 남한산성, 경기도 이천, 강원도 춘천, 영월, 충북 제천 백련사에 이르기까지 수년의 시간에 이르는 만행이 이어졌다.

종국에는 치악산에서 걸망을 내리니 찾아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마음을 어루만져 주며 상원사 중창불사를 마친 것이 1963년이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스님을 ‘이생(利生)님’이라 불렀다. 이생이란 널리 생명을 이롭게 하는 삶이다. 누구에게나 “너도 이생(利生), 나도 이생이니 전부가 다 이생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길 없는 길’에서 무수한 사람들을 만났다. 선사는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이의 마음이 돼 진리를 전하고, 아픈 사람을 만나면 아픈 사람의 절박한 마음과 하나가 되어주었다. 스님의 내가 없는 자비행에 기대어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도인’으로 치켜세웠으나 스님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나의 힘이 아니고 사람마다 각자 지니고 있는 자성불(自性佛)의 위신력이라, 스스로에게 갖춰진 능력으로 이루어진 공덕이니 스스로의 자성에 감사하라.”

하산, 그리고 전법의 길을 걷다

스님은 치악산에서 무수한 사람을 도와주었지만 바가지에 든 물을 마셔도 금방 목이 마르듯 또 다른 고통에 헤매이는 사람들을 보며 영원한 자기의 생명수가 있음을 알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961년 탄허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고 원주 인근에 머물며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이치를 전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1972년 안양에 ‘대한불교회관’을 건립한 후 1982년 한마음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조계종 사찰로 등록하고 선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해에 충북 음성군 금왕에 첫 국내 지원이 개원됐다. 인연 있는 불자가 운영하던 사찰과 토지를 기증한 것이다.

이로부터 제주, 부산, 광주, 온양, 울산, 대구, 마산, 진주 등 전국 15곳에 지원이 속속 개원됐다. 이들 지원은 안양 본원의 지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지의 불자들이 스스로 발심해 건립한 것이다. 해외 지원도 1987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모건힐지원이 설립된 이후 독일·브라질·태국 등 10개국에 지원이 설립됐다. 스님은 지원이 생길 때마다 기꺼이 순회하며 법문을 하고 신도들뿐 아니라 제자들이 잘 공부해나갈 수 있도록 항상 보살폈다.

전법·포교의 새 장을 열다

스님은 한마음선원 선원장으로 30여 년을 주석하며 주인공 관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끊임없이 행으로 보여주었다. 한마음선원이 보여준 전법과 포교의 새로운 장은 한국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한마음선원이 시작한 전법·포교는 ‘최초’ ‘선두’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었다. 실제로 신행과 포교, 문화사업의 여러 부분에서 선원의 행보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었다. 1984년에는 합창단을 창단하여 선시와 법어로 만든 선법가를 통한 음성포교가 시작되었다. 이후 각 지원에도 합창단이 생겨나고 어린이, 청년, 거사들의 합창단이 각각 결성되면서 생활하는 가운데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선수행의 좋은 방편이 되어주었다.

선법가를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가사의 뜻을 화두처럼 되새기며 만법의 이치를 궁구하고 남을 위한 보살행의 즐거움을 체험하는 것이 음성공양의 공덕이고 수행이었다. 한마음선원 합창단은 불교계 대표적인 합창단으로 자리매김하며 2001년부터는 소아암 환자 돕기, 소년소녀 돕기 등 테마 합창제를 주관해 세상에 훈훈한 감동을 주고 있다.

1986년 금왕지원(현 광명선원)에는 최초의 영탑공원이 조성되었다. 7평 규모 부지에 1기의 탑을 세우고 그 안에 3대까지의 유골을 봉안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영탑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새로운 장묘문화로 주목 받았다.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한마음의 이치를 전하고자 하는 스님의 마음은 1985년부터 시작된 법문 비디오 제작과 오디오 매체를 통한 포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당시는 영상을 통한 전법이 많지 않을 때라 불교계에서는 이같은 포교 방식에 주목했다.

스님이 드러낸 매체 포교 열정은 주간 불교전문신문 ‘현대불교신문’의 창간으로 정점을 찍었다. ‘불교의 생활화·대중화·세계화’를 사훈으로 1994년 10월 15일자로 창간된 ‘현대불교신문’은 참신한 내용과 편집으로 선보였으며, 인터넷 뉴스를 통한 속보 기능으로 기존의 불교 언론 판도를 바꿔 놓았다.

인터넷을 이용한 온라인 포교도 단연 선두였다. 1996년에는 불교종합 포털 ‘부다피아’로 정보화 시대 불교 포교의 새 장을 열었고, 1999년에는 HBTV 한마음불교방송국을 개국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묘공의 도리

안양본원이 설립된 뒤부터 소식지나 책자 등 간행물을 조금씩 발간해 오던 한마음선원은 출판 포교에서도 일찌기 그 중요성을 알고 모든 자료를 문서와 영상으로 전달하려 했다. 스님은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반야심경〉과 〈천수경〉, 〈금강경〉을 한글 뜻풀이로 보급했으며 1996년 한마음선원 출판부가 개설돼 본격적으로 선사의 가르침들을 출판했다.

1999년 설립된 한마음국제문화원은 스님의 법어집 등을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책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 출품돼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생활문화와 역사, 정서가 다른 이국인들에게 이질감 없이 스며드는 스님의 법어는 철저한 생활언어를 근간으로 한다. 종교 이전의 종교를 설하는 스님의 가르침이 다양한 형태의 책을 통해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마음의 원리를 연구하는 ‘한마음과학원’도 2001년에 문을 열었다. ‘한마음과학원’은 기존 과학을 융섭하며, 다양한 주제의 연구와 교육을 통해 ‘한마음과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비구니 승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스님은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는 조계종 전국비구니회관 건립에 거금을 희사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이 거액을 희사하면서도 “불자들의 심부름을 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스님은 비구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을 지원하였으며 2004년에는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 본 비구니의 수행과 삶’을 주제로 한마음선원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외 크고 작은 관련 학술대회에 대한 지원도 꾸준히 이어졌다.

스님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제22회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했다. UN이 제정한 ‘위대한 불교여성상’(2001년)과 스리랑카 종교복지재단 LJSSS가 시상하는 ‘사르보다야’ 명예상도 수상하였다.

우리 모두에게 자성(自性)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그 자성을 생활 속에서 발현할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평생을 바친 스님은 2012년 음력 4월 초하루, 한마음선원 본원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법랍 63세, 세납 86세였다.

스님이 ‘발 없는 발’로 걸어온 ‘길 없는 길’은 진리와 자비의 대행원이었으며 그 가르침은 지금도 우리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