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처에 스님 법향이…“감사합니다 그립습니다”

“스님의 중생 위한 간절함 떠올라”
서울 금강선원장 혜거 스님

탄허 스님 상좌인 서울 금강선원장 혜거 스님은 대행 스님이 오대산 수행 때부터 인연을 쌓아왔다. 스님은 탄허 스님도 대행 스님의 배포에 대해 늘 칭찬하셨다고 강조했다. 혜거 스님은 “탄허 스님이 오대산에 계실 때가 1959년 경으로 그 때 인연이 닿았다”고 말했다.

“대행 스님에 대해 놀란 것은 그거예요. 우리 노장님(탄허 스님)이 칭찬하신게 그거에요. 큰일 할 사람이라고, 배포가 저렇게 저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늘 이야기 하셨죠.”

스님은 대행 스님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통찰력이라고 하셨다. 탄허 스님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부분도 대행 스님께서 말 한마디 듣고 완전히 이해해 소화시켜서 대화하는 힘은 통찰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그런 통찰력의 기반에는 중생 구제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있음을 강조했다.

“나중에 한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안양에 계시더라구요. 안양본원 불사하기 한참 전입니다. 안양은 그때 완전히 빈민촌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행 스님은 가난한 집에 쌀을 한가마니씩 나눠 주셨죠.”

대행 스님이 안양에 기반을 다진 1960년대에는 쌀 한가마니 가격은 매우 큰 금액이었다. 혜거 스님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큰 마음을 내는게 진짜 공덕이라고 했다. 스님은 “중생구제의 마음이 간절하면 방법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간절한 마음 속에서 불법이 나옵니다”라며 “대행 스님의 통찰력도 자세히 보면 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 저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이익이 될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탄허 스님도 대행 스님이 큰 일을 할 사람이라고 얘기 하신 것도 그 지점이었다고 봅니다. 대행 스님 열반 10주기에 다시 떠올려야 할게 바로 그 부분입니다.” 김주일 기자


“50년 前 원력 되살리는 계기로”
제40대 동국대 이사장 법산 스님


“대행 스님 열반 10주기를 맞아 선원 대중들이 10년 전, 20년 전, 아니 50년 전 선원을 세운 원력을 되살리는 역동성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대행 스님과의 오랜 인연이 있는 동국대 前이사장 법산 스님은 1969년 대행 스님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술회했다. 스님은 “동국대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화봉 유엽 스님이 아주 말씀을 잘하는 분이 있다고 해서 안양에서 대행 스님을 만났다”며 “언덕길을 이리저리 올라가서 조그만 집 방에서 처음 뵈었는데, 아주 말씀이 당차셨다. 그때 감명을 받아 이후 석박사 과정 밟으며 틈틈이 가서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어 대행 스님 상좌 스님들의 정규교육 문제부터 비구 스님들의 비구계 수계문제 등 여러 가지 선원 대소사를 겪으며 더욱 인연이 깊어졌다고 털어놨다.

법산 스님은 생활에 밀접한 즉문즉답이 바로 스님의 경지를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대행 스님께서는 여러 방면에서 뛰어나셨지만 특히 대중포교에 있어서는 한국불교에서 누구도 이뤄내기 힘든 선구적 위치에 있다”며 “선원 대중들은 하심해서 스스로 봉사한다. 대중들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마음 속에 있는 착한 마음을 끌어내는 가르침이 그 요체”라고 강조했다.

“결국 깨달은건 스스로 깨달았다고 상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얼만큼 생활에서 실천해가냐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기에 스님은 한마음선원 대중들의 마음가짐에 대해 다시 한번 당부했다. 스님은 이번 10주기를 계기로 한국불교와 우리사회에 한마음선원이 좀 더 큰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한마음선원이 미래 한국불교에 큰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승단과 신도 화합하고, 한마음으로 정진해나가길 기원합니다.”
노덕현 기자


“BTN불교TV 회생 큰 공덕주”
BTN불교TV 이사장 성우 스님

BTN불교TV 회장 성우 스님은 2000년 5월, 대행 스님과의 첫 만남이 기억에 생생하다. 불교TV가 자금난으로 해체 위기에 놓였을 때, 대행 스님의 후원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안양 한마음선원에서 만난 대행 스님은 불교TV에 대해 현재와 미래 한국불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천년사찰만큼이나 한국불교를 이끌어갈 수 있는 저력을 가졌다는 것이었죠.”

성우 스님은 “당시 후원은 대행 스님이 불교 대중화와 현대화에 무한한 원력을 가지셨기에 가능했던 일”고 강조했다. 한국불교 최초로 인터넷 포교를 시작했고 현대불교신문 창간을 통해 매체포교의 장을 연 스님이기에 불교TV에도 무한한 애정을 보이셨다는 것. 그러면서 BTN불교TV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버팀목이 됐던 대행 스님을 떠올렸다.

“어느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는데 중계차며 카메라에 붉은 딱지가 붙었다는 거예요. 전화를 끊고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며 창문만 바라보고 있는데 안양에서 전화가 왔어요.”

혜수 스님(현 한마음선원 재단이사장) 전화였다. 대행 스님이 뵙자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날 오후 대행 스님은 또 한 번의 후원을 해줬고, 이는 불교TV가 회생하는데 큰 몫을 했다. 성우 스님은 당시 상황을 “꿈같은 이야기”라고 설명하며 “이것이 부처님 가피”라고 말했다. 스님은 “대행 스님이라는 큰 공덕주의 대작불사로 불교TV가 큰 성장을 할 수 있었다”면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마음선원에 들러 향을 사르며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성우 스님은 “큰스님의 빈자리가 한없이 적막하고 허전하지만 전법과 자비나눔의 정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임은호 기자


“전국비구니회 운영에 큰 힘”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

2003년부터 2011년까지 8년간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장을 역임한 명성 스님은 대행 스님과의 인연을 감사로 되짚었다.

스님은 “前비구니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광우 스님을 통해 전국비구니회관을 짓는데 큰 시주를 하셨다는 말씀과 소식을 종종 들어 왔다”며 “그런데 제가 광우 스님에 이어 회장을 맡고 보니 비구니회의 경제적 상황이 아주 어려워 고민을 하다가 어느 날 대행 스님을 찾아갔다”고 회상했다.

“대행 스님을 만나 인사를 하고 앉았는데, 마침 유리창으로 9층탑이 보이더라고요. 별 소리 없이 ‘저기 9층탑이 있네요!’ 한 마디를 하고 회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대행 스님께서 인편으로 운영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을 보내왔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었던가! 명성 스님은 “스님의 무주상보시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고 전했다.

스님은 “비구니회관 건립에 상당한 액수의 불사기금을 시주하기 위해 선원 스님들 모두 허리띠를 졸라맸다는 얘기를 훗날 들었다”며 “어른스님의 뜻에 따라 한마음으로 정진하는 선원의 스님들께 감사를 전한다”고 말했다.

명성 스님은 그 인연을 시작으로 대행 스님과 교류를 이어갔다. 새해에 시간이 허락하면 진관스님, 광우스님, 법운스님과 함께 선원을 방문하여 얘기를 나눴으며 제자들이 노년의 스님이 주석하실 수 있게 단아한 전통양식으로 지어드린 서산정에 들러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스님은 “그때마다 우리는 말 없는 가운데 많은 얘기를 했었다”며 “세월이 흘러 스님은 없지만 많은 제자스님들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지금까지 잘 유지 발전해 오고 있음에 재차 감사드린다”고 강조했다.
송지희 기자


불교 대소사 마다 깊고 넓은 가르침 남아
송석구 제14대 동국대 총장

대행 스님께서는 불교계가 어려울 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미신 선지식이셨습니다. 1999년 동국대 총장에 취임하고서 한마음선원으로 가 대행 스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때 대행 스님께서는 동국대 발전기금을 내시면서 따로 총장이 특수활동비가 필요하지 않겠냐며 저를 불러세워 챙겨주셨습니다. 당시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갈수록 여러 유혹이 있을 수가 있으니까, 그런 유혹 다 버리고 이걸로 꼭 쓰세요.”

그 얘기를 듣고 총장 임기를 시작하며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릅니다.

스님의 이러한 원력은 동국대 일산 불교병원 건립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동국대를 비롯한 불교계는 제대로 된 불교병원 하나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층고를 높여서 꼭 12층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불교의 12연기를 바탕으로 하여 여러 대중의 마음도 치유하는 의미였습니다. 당시에 고도제한이 있어 인근 군부대에서는 8층 높이로 밖에 병원을 세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그때마다 ‘큰 뜻이 있어 마음을 내면 꼭 이뤄진다’며 격려해주셨고,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현재 일산 불교병원을 12층으로 짓게 되었습니다.

불교계 일을 하며 그 현장에서 여러 고충을 한 번에 알아보시고 마음을 내시는 것은 깨달은 자의 풍모입니다. 스님의 행화에서 감사함과 함께 어려운 이들에게 함께 해줘야 한다는 마음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대행 스님의 깊고 넓은 깨달음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한번 보살행으로 펼쳐내는 것이 바로 남은 우리들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스님의 법비가 가뭄에 단비처럼
최정희 현대불교신문 창간 편집국장

1991년 봄, 나는 대행 스님을 처음 뵈었다. BBS불교방송은 개국 1주년 특집으로 신행상담 프로그램인 ‘자비의 전화’를 미국 LA ‘라디오 코리아’에서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교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나는 그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다.

불교방송은 그 무렵 한마음선원 LA지원에 계신 대행 스님께 법을 청하는 대담을 했다. 그 자리에 동행한 나는 내 음성이 녹음되지 않는 범위에서 질문을 거들었다.

대담이 끝난 뒤 스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원 이렇게 영특할 수가 있나.”

1994년 봄, 조계종 개혁으로 불교신문 기자들이 사직을 하게 됐다. 얼마후 나는 한마음선원이 김광삼 사장님을 주축으로 조계사 인근에서 창간준비를 하고 있는 현대불교신문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현대불교’가 창간호부터 게재하고 있는 ‘길을 묻는 이에게’는 대중을 마음의 길로 인도하는 대행 스님의 법문이다.

스님의 주인공 관법은 불교를 쉽게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일러주는 생활선(禪)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은 고(苦)의 원인인 집착을 내려놓는 방하착의 자리이고, 그 자리는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와 같다고 본다.

대행 스님 초청 독일법회에서 많은 독일인들이 스님의 법어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았다. 깊이 있는 가르침이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생활선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금년 대행선사 법어 달력 첫장을 따로 떼서 벽에 붙였다. ‘마음을 쉬어라. 쉬는 까닭에 일체가 내게로 상응하게 된다.’

“스님의 법비가 가뭄에 단비처럼 만인의 마음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스님, 감사의 삼배를 올립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가르침 만난 복연에 희열이
이동복 한마음선원 신도회장

불교는 기복신앙이라는 무지한 선입견으로 꽉차있던 30대 초중반에 아내를 통하여 스님의 법문을 전해 듣고 ‘불교가 그런 거라면 진즉에 절에 다녔지’라는 속생각을 갖고 있던 차에 아내의 손에 이끌려 선원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멀찍이 뒤에 자리한 저를 보시고 ‘당신 신랑 참 착하다’라고 하셨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가 첫 친견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에 어떤 다짐을 갖고 있습니다.

마음 따라 모든 것이 이끌어진다는 것을 믿으면서 열심히 살려 합니다. 그냥 열심히요. 퇴직 전 직장생활 할 때보다 더 열심히요. 조용한 시간에 스님의 가르침을 만나게 된 복연을 생각하면 가슴 벅찬 희열이 끓어오르지요. 그래서인지 다가오는 모든 것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하려합니다.


마음의 보배 일러주신 감사함 가득
윤상현 한마음선원 청년회장

스님의 모습은 제게 어릴 적 흐릿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제가 스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된 것은, 소임을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요전에 담긴 스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열반 다례재 영상에 담긴 내용들을 접하면서 스님에 대해서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한마음요전 큰스님 행장에 관한 부분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스님께서 견성암에 계실 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보듬어주셨던 이야기를 한장 한장 읽을 때 마다 스님의 자비심은 상상할 수 없이 크고 넓어서 그 끝을 도저히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마음의 보배를 가르쳐주시고 언제 어디서든 걸을 수 있는 진정한 길을 일러주신 스님께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사합니다. 스님, 사랑합니다.


당당한 대장부로 자랐습니다
이미영 한마음선원 자모회장

저는 큰스님을 초등학교때 아버지께서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직후 안양으로 이사오게 되면서 알게 됐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어린이 법회에 다니게 되었고 그때 큰스님을 뵙게 됐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대장부가 되리라 다짐하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커온 저는 어린 아이로 큰스님을 만나 뵙고 이제는 삼남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저희 삼남매는 나창흠(고3), 나성흠(중3), 나미나(초6)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자기의 참마음을 믿고 따르며 지혜롭게 생활하라는 큰스님 가르침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스님 떠오를 때마다 크고 깊은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열심히 정진하는 길만이 그 은혜에 보은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정진 하겠습니다.


스님 지금도 천지에 유유, 찰나 경험
미국 워싱턴지원 신도 문범강

가을이었을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의 선원 뒤뜰엔 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1986년 쯤 이라고 기억한다. 나는 메릴랜드 미술대학원을 졸업하고 동 대학에 시간 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던 메릴랜드주는 동쪽 끝이고 산호세는 서쪽 끝이니 비행기로 5시간 반을 날아갔다.

당시에 스님을 홀로 친견을 했다는 사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귀한 시간이었지만 그땐 그 소중함을 느끼기에는 나는 너무 어렸다. 세월이 흘러, 마음공부의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스님의 모습은 가고 안 계시지만 그 부처님은 지금도 여전히 온 천지에 유유하신다.

나는 가끔씩 큰스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낼 때 찰나에 신호가 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열심히 해 보세요” 말씀, 태국 태권도 씨뿌려
태국지원 신도 송기영

1999년 개원을 하고 큰스님께서 오셨을 때, 각 지원의 스님들과 신도 회장님들이 힘든 것 있으면 스님께 말하라고 자꾸 권했어요.

스님께서 “송회장은 뭘 해 보고 싶습니까?” 하고 물으셨어요. “어떻게 하면 태권도가 잘 되게 할까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스님께서 “열심히 해 보세요. 열심히만 해 보세요.”라고 하시기에 그 말씀만 따라 열심히 했더니 그 후로 일이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해서 태국에 태권도를 널리 알리게 되었고 지금도 제 나이 86살인데 태권도에서 가장 높은 급수는 제가 심사를 하러 갑니다. 이게 다 스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스승님들 덕분에 우리는 진리를 맛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가는 사람들이니까요. 고맙습니다.


지구 정반대서도 가르침 이어가요
아르헨티나지원 신도 서아리

밤과 낮이 고국과 정 반대인 아르헨티나에 44년 전 이민을 와서 사는 동안 큰스님과 인연이 되었지요. 그때는 너무 어설프고 사람이 무서웠답니다. 지금은 선원도 있고 그 많은 시간속에 큰스님과 입적하신 연자당 혜원스님의 가피는 글로 표현할 수 없이 가슴이 메어옵니다. 그리고 이곳 선원에서는 두 분의 아르헨티나 현지인 스님이 출가해서 한마음 공부를 하고 계십니다. 지금 투쿠만 지원에는 청주스님께서 한마음 공부를 가르치고 계시며 주야로 선원의 부족한 부분을 모두 다듬어 나가고 계십니다.

“무명속에서 벗어나 세세생생 자유인으로 사십시오”라고 말씀하신 스님의 뜻을 받들어 저는 한마음선원과 모든 인연 지어진 이곳 신도들의 은혜에 보답하는마음으로 살아가려합니다. 한마음 주인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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