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강요당한 이들을 대신한 목소리
망명정부 수립 과정‧협상 등 첫 공개
“폭력보다 강한 자비” 증명한 지도자
분열‧갈등 직면한 우리 사회에 메시지
네 살에 가족의 품을 떠난 소년은 열여섯 살에 전쟁을 맞닥뜨렸고 스물다섯에 망명을 택한 이후 90세가 된 지금까지 비폭력의 삶을 살고 있다. 제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의 구순(九旬) 기념 회고록 <티베트의 대변자, 달라이라마>는 억압받는 공동체를 대신해 침묵을 깨뜨린 ‘양심의 기록’이다. 달라이라마는 책에서 왜 비폭력을 선택했는지, 공동체의 정체성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떤 고뇌와 결단을 내려야 했는지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책은 1950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침공에서 시작한다. 열아홉 살의 달라이라마가 마오쩌둥과 마주한 베이징 회담, 1959년 인도로 탈출한 망명 과정, 다람살라에서의 망명정부 수립과 교육·종교 체계 재건의 시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중국 지도부와의 협상 과정과 17개 항 협정을 둘러싼 압박, 해외 정부와의 접촉 등 당시의 내밀한 고민이 포함돼 있어 현재 티베트 문제를 이해하는 1차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개인사와 정치·외교, 문화적 결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달라이라마는 자신과 공동체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기록한다.
달라이라마는 책 전반에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고 강조한다. 폭력과 억압이 극단으로 치닫던 시대, 왜 대결이 아닌 비폭력을 택했고 어떤 대안과 갈등 속에서 결단을 내렸는지를 서술한다.
티베트의 역사는 한국 독자에게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식민 지배와 언어 말살, 분단의 상처를 겪은 우리 근현대사와 티베트의 현실은 깊은 공명을 이룬다. 한반도가 국제적 관심의 중심에 있을 때 티베트에서는 유사한 침략과 억압이 진행됐지만 철저히 소외됐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누가 목소리를 내는가’를 되묻게 한다.
최근 세계적으로 관심을 모은 후계자 문제에 대한 입장도 명확히 밝혔다. 달라이라마는 “제도의 존속 여부는 티베트인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며 “(그들이) 필요하지 않다면 그 제도를 끝낼 수 있으며 만약 전통이 이어진다면 제15대 달라이라마는 중국이 아닌 자유세계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달라이라마는 회고록에서 과거의 기억에 머물지 않고 언어·문화 상실의 위험, 티베트 고원의 군사화와 환경 파괴, 디아스포라 2‧3세대의 정체성 위기 등 현재의 위기들을 진단한다.
5권째 달라이라마 책을 펴낸 배정화 하루헌 대표는 “이 책은 가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 수행자의 마음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며 “분열과 갈등에 직면한 우리 사회에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을 옮긴 안희준 번역가는 달라이라마 한국어판 공식 홈페이지 번역과 감수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원문의 의미와 어조를 섬세하게 전달했다.
달라이라마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티베트인들이 자신의 조국에서 자유롭고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대화를 통해 티베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평생 애써 온 저의 노력이 이 책에 담겨 있다”며 “이 책이 티베트 민족의 자유를 향한 여정, 그리고 비폭력과 대화의 메시지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