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대로 주인공에 되돌려 놓는 것이 나를 발견하는 지름길이다
여러분이 자유스럽게 마음으로써 탈피하고 벗어나지 못한다면
항상 그렇게 노예 생활에서,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울산의 여러분과 더불어 스님들을 모시고 이렇게 한자리 하게 된 것을 정말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일체 만물만생이 말은 하지 않아도 전부 우리의 스승 아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 철 나면서 너희들 마음대로 가지고 살고 너희들 맘대로 하고 살아라. 그러나 떠날 때는 너희 몸뚱이까지도 다 놓고 가거라.’ 이렇게 우리 인생은 말하고 있습니다. 말을 해야만이 듣는 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다 놓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기간 동안에, 한 철 걸망 짊어지고 캠핑 나와서 놀다가 헤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아웅다웅하고 네 탓 내 탓을 다투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 성질 때문에 집안이 홀딱 망하는 수도 있고 파산이 되는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일체 만물만생도 역시 우리의 스승 아님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이 흐르는 걸 봐도 그렇습니다. 물은 그 안에 만 생명을 넣고 굴림을 굴리면서 리드해 나가는데도 걸림 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물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면 ‘아, 물이 말을 하는구나. 물이 나같이 살라고 말을 하는구나.’ 하게 됩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나뭇가지가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이쪽으로 흔들리고 저쪽으로 불면 저쪽으로 흔들립니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그냥 길을 가듯이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대로 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도 ‘저 나무들도 모두 자기와 같이 살라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든 생명들이, 돌이나 산천초목들도 다 살아 있고 움죽거리고 찰나찰나 화하면서 이렇게 돌아갑니다. 정신세계 50%에서 쉴 사이 없이 돌아가면서도 물질계의 50%와 더불어 같이 상응하고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생명들이, 그 모습들이 서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날아가는 새들도 말입니다.
우리 사람의 살림살이와 동물과 생물, 일체 만물의 살림살이가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차원만 다르고 모습만 다르다 뿐이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부처님 속에서 중생이 나고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니 어디 그게 둘이겠습니까? 만물만생이 다 나같이 살라고 한다면 나 또한…, 그도 나도 모두가 나투면서 찰나찰나 화해서 돌아가니 둘이 아닐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이 모두가 둘이 아니니라. 모두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당신 혼자만 높다고 하신 게 아닙니다. 모두가 당신 아님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당신 아님이 없이 제가끔 높다는 겁니다. 농사꾼은 농사꾼대로 높고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높고 거지는 거지대로 높고, 일체 만물만생이 다 제가끔 높으니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말씀을 하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래라는 이름은 부처님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체 여러분이 부처요, 여러분이 그대로 쉬는 것도 없고 쉬지 않는 것도 없이 여여하다는 걸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자재로 살 수 있는 그 자체를 보고 여래의 집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우주의 근본도 여러분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 자체가 바로 근본에 가설이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그냥 여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의미는 만물만생의 생명, 그 근본이 불(佛)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에 일체가 다 같이 통하고 교류하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교(敎)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그 자체는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게 아니라 전체가 돌아가는 진리인 것입니다. 모두 불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말입니다.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각자 생명의 근본이 있고, 말을 해서 서로 교류하고 전달하면서 돌아가니 모두가 불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이 자체는 너무나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 없이는 세상에서 창조력을 기를 수도 없고 창조를 해낼 수도 없고 발전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있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전부 자기가 태어났으니까 상대가 있고 잘못됐든 잘됐든 부딪침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상대도 없고 부처도 없고 모두가 무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부터 믿고 너부터 알라. 너부터 알아서 너를 깨달아서 본다면 모든 중생과 부처가, 일체가 다 둘이 아닌 도리를 알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갑니까? 애고든 병고든 천차만별의 문제가 닥치면 닥치는 대로 밖으로만 찾습니다. 명이 짧다 하면 칠성님한테 빌고, 가난하고 일이 생겼다 하면 관세음보살 부르고, 좋은 데로 못 간다 하면 지장보살 찾고, 병이 들었다 하면 약사보살 찾고, 물에서 위험할 듯하면 용신을 찾고, 길을 가다가 위험할 듯하면 지신을 찾고…. 여러분, 한마음을 가지고도 자유스럽게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것을 오는 대로 어떻게 타의에다가 상대를 두고 빕니까? 상대를 두고 빌어 봤자 공덕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결도 나지 않으며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발견해 낼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항상 노예로서 세세생생 끄달리면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모든 것은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세상하고도 가설이 돼 있다 이겁니다. 우주간 법계의 근본이 바로 여러분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고 가설이 돼 있단 얘깁니다. 알기 쉽게 말을 하려니 이렇게밖엔 말할 수가 없군요. 그러니 병고가 오면 ‘야, 내 깊은 한마음 속에서, 바로 거기에서 병고도 나온 거니까 낫게 하는 것도 거기 아닌가. 네 시자를 네가 건강하게 끌고 다녀야지.’ 하고 거기 놔야 이치에 맞다고 봅니다. 또는 명이 짧다 하면 안에서 칠성이 됩니다. 금방 화해서 칠성 부처가 돼요. 여러분, 이해가 안 가면 한마디 할까요? 가정에서 살면서 때에 따라서 금방 아버지가 됐다가, 금방 남편이 됐다가, 금방 아들이 됐다가, 금방 형이 됐다가, 이렇게 아주 자동적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여보!” 그러면 “왜 그래?” 하고 그 행동과 말과 뜻이 그대로 남편 노릇을 한단 말입니다. 그랬다가도 “아버지!” 하면 금방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부처님 마음이라는 것이, 여러분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돌아가듯이 그대로 나투는 것입니다.
어떠한 애고에 대해서 모든 거를 놓을 때는 자동적으로 산신도 되고 칠성도 되고, 병고가 있어서 거기에 되돌려 놓을 때는 바로 약사가 되고, 좋은 데로 가지 못해서 놓을 때는 바로 지장이 되고…, 그 한군데서 그렇게 일체 만법을 굴리면서 돌아가는 겁니다. 그것을 바로 이름해서 수레공법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거기다가 되돌려 놔야 됩니다.
내가 한번 비유를 해 볼까요? 오신통에 숙명통이라는 게 있죠. 그게 있기 때문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현실에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거를 컴퓨터라고 말해도 됩니다. 물질적인 컴퓨터는 입력을 해야만이 나오지만 마음의 컴퓨터는 자동적인 컴퓨터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악업이든지 선업이든지 자기가 그 업식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왜 나오는 대로 주인공에 되돌려 놓으라고 하느냐 하면, 주인이면서도 주인이 없고 그냥 돌아가는 그 자체가 이름해서 바로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가 되돌려 놓아야 됩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일체가 다 나지 자기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부딪침도 있고 화도 나고, 애고도 생기고 병고도 생기고,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는 그런 이치가 생기죠. 그렇다면 그것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서 나오는 거라면, 바로 되돌려서 거기다가 놓는다면 새로이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입력된 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오는 그 생각 생각을 망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망상이라고 그러는데, 생각이 없다면 목석일 것이고 그걸 망상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정말 망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이 나오는 대로 생각을 하는 거지 어찌 목석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자기를 수행시킬 수 있는 과정, 바로 인간 수행의 길이라고 봅니다. 망상이기 이전에 몸뚱이가 없으면 무효요, 생각을 못 하면 목석이요, 생명이 없으면 그것도 무효입니다. 그러니 망상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모든 거를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여러분이 돼야 되겠습니다.
다 놓으란다고 해서 뭐, 재산도 뭣도 다 버리라는 게 아닙니다. 놓지 않고도 놓을 수 있고, 놓았다면 가지고 있어도 자기 게 아니니 자긴 관리인이 되는 거죠. 그러니 영원히 자기 것도 아니요 영원히 붙들고 있을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인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되돌려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카세트에 노래를 녹음했다가 다시 노래를 녹음하면 그 앞서의 노래가 지워지듯이, 되돌려 놓으면 먼저 것이 지워지면서 입력이 다시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자기를 발견하는 지름길이며 그대로 여여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이게 뭣고?’ 하고 있는데 뭐긴 뭡니까? 자기가 있으니까 자기 나오기 이전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작년 씨를 올봄에 심었더니 싹이 돼서 화했더라. 그 싹에서 수박이 열려서 씨가 그 안에 있으니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없고, 수박씨는 현재 자기한테 있으니 바로 수박을 그냥 쪼개서 맛을 보고 씨를 알아야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게 뭣고?’ 하고서 10년 20년이 가도 도대체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 생각으로 과거 씨를, 내가 나오기 이전을 찾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다 들어 있으면서도 둘 아니게 공하여 화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역력히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될 것입니다.
몸 안에 악업 선업이 수십억이 들어 있습니다. 수십억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런 얘기 다들 아시지요? 어느 수좌가 동짓날 팥죽을 쑤는데 팥죽 방울이 수없이 나오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주걱으로 쳤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것을 왜 주걱으로 그렇게 쳤는지, 무슨 까닭으로 “문수다! 문수다!” 했는지 그 뜻을, 그 뒷면을 아셔야 될 겁니다.
지금 되돌려 놓으라는 그 뜻도 그와 똑같습니다. 망상이든지 뭐든지, 우리의 마음이, 안에서 나오고 바깥에서 들어오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딴 데서 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 일어나듯 하는 겁니다. 딴 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이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 이것도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 하고 주걱으로 치듯이 놓아야 합니다. 왜냐? 팥죽 방울이 올라오는 게 바로 마음 일어나는 것, 생각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 일어나는 것이 팥죽 방울 일어나듯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그 팥죽 방울은 딴 데서 온 게 아니라 팥죽 솥에서 나온 거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몸이 팥죽 솥이라면 바로 팥죽 방울이 망상이라고 할 겁니다. 근데 그게 망상이 아닙니다. 이것도 법, 저것도 법, 그것도 법이다 이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생각을 냈으면 법신이요, 움죽거리면 바로 화신입니다. 즉 말하자면 그건 자기가 뜻을 이루어서 그거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한테 귀감이 되고 여러분한테 법을 전한 것도 됩니다.
우리가 모습만 보고 이름만 듣고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오신통이라는 통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통 안에서 벗어나야 되겠기에 모든 것은 마음에다 되돌려 놓고, 남을 원망하지 말고 남을 증오하지 말고 남의 탓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죠. 가정에서 남편이나 자식이 어떠한 잘못을 한다 할지라도 말로 그 몸뚱이를 잡으려 할 게 아니라 마음으로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는 그런 여건을, 심력을 키우는 것만이 해결 방법인 것입니다. 전깃줄과 전깃줄이 맞닿아야 불이 번쩍 들어오듯이, 내 주인공에다가 되돌려 놓으면, 모두가 가설이 돼 있으니까 거기까지 불이 들어옵니다. 부부, 자식, 부모라고 알고 있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주인공에다가 모든 거를 맡겨 놓으면 거기까지 불이 들어와서 서로가 밝게 살 수 있는 여건이 생깁니다.
내 몸속에 그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들어 있는데 어떤 문제가 안 나오겠습니까. 그거를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삼아야지 일일이 바깥으로 끄달리고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길을 걷다가 엎어지면 어딜 짚고 일어나십니까? 그 땅을 짚고 일어나야만 일어나지죠?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가 있어서 나한테서 나온 거라면, 나한테 부닥치는 거라면 나한테다가 되놔야 되는 거죠. 그래야 절름발이가 되지 않고 그 땅을 딛고 일어날 수 있고 그렇지, 아니 바깥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그게 일어나질 것 같습니까. 우리는 귀머거리에 절름발이입니다. 그러니까 제 땅에서 걸어가다가 엎어졌으면 제 땅을 짚고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상대를 두고 믿는 것은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달마 대사께서도 양 무제한테 이렇게 말을 했었죠. 당신이 시주를 아무리 했어도 공덕이 없다고요. 그로 인해 죽임을 당했지만 죽었으면서도 죽지 않고 지금까지 내내 법을 설하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셨다고 하지마는 부처님께선 오신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가신 자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전부 부처님 아님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계신 한 그대로 여기 이 자리에 계신 겁니다.
어저께도 과거요, 아까도 과거요, 일 초 전도 과거입니다. 지금 지구가 버스라면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그 버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 안에서 네 자리 내 자리, 네 거 내 거 하면서 뺏고 싸우고 야단법석들입니다.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멀고 가까움도 없으니 이 지구를 훌떡 벗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묘하고 광대무변하고 자유자재해서 이리 갈 수도 있고 저리 갈 수도 있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업식으로 인해서, 관습으로 인해서 ‘이거를 하면 안 되지. 이거는 안 될 거야.’, ‘이거는 꼭 될 거야. 땅 짚고 헤엄치기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유스럽게 마음으로써 탈피하고 벗어나지 못한다면 항상 그렇게 노예 생활에서,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죽을 건덕지가 없기 때문에 죽는 것도 없고 또는 산다고 할 것도 없기 때문에 사는 것도 없습니다. 옛날에 두 친구가 있었는데 한 친구는 스님으로서 입산을 하고 다른 친구는 집에서 살았더래요. 그런데 집에서 사는 친구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입산한 친구 스님을 청해서 “우리 어머니 좋은 데로 가게 해 주오.” 하고 부탁했더랍니다. 그랬더니 “아휴, 이 세상에 오지나 않았더라면 갈 것도 없을 걸 갖다가 그랬어.” 하고 그냥 나가더랍니다. “오지나 않았으면 갈 것도 없지.” 하고 말입니다. 허허허….
그 뜻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이 어찌 어저께가 따로 있고 오늘이 따로 있고 내일이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우리가 마음을 잘못 씀으로써 자동적으로 입력이 되어 업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죽으면 아무것도 못 가져가지만 꼭 한 가지 가져가는 게 있습니다. 업식 말입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게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에 모두 그 무명을 쓰고 나옵니다, 어떤 무명이든지.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의 무명만 쓰고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독사같이 살았으면 독사의 무명을 쓰고 나올 것이고, 개구리같이 살았으면 개구리 무명을 쓰고 나올 것이고, 짐승같이 살았으면 짐승의 무명을 쓰고 나올 것이고…. 그걸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땅속의 벌레로 무명을 쓰고 나오기도 하고 사람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사람도 천차만별입니다. 사람도 금 사람이 있고 깡통 사람이 있고 넝마 사람이 있고 천차만별이죠.
그러니 과거에 어떻게 마음을 썼고 어떻게 행동을 했고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재 닥쳐오는 것이고, 현재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올 것입니다. 미래의 오늘! 그래서 과거도 오늘이요 미래도 오늘인 것입니다. 영원한 오늘입니다. 그러니 지옥이다 천당이다 하는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도 천당도 이 자리다’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더 어렵고 무서운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알아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모습을 쓰고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2년 10월 11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을 정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