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의 교감, 경계를 넘다
술로 사람·바다 사이 벽 허문 시인
마음의 그림자로 바라봐 유식 닮아
대상과 주관 모두 깨져 하나 된 경지
미술이나 문학, 음악 등 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유독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알코올이 창작 활동에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는 등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가들의 낭만적 감성을 끌어내는 데 이만한 것도 없다. 술을 빌려 글을 쓰고 그림 또한 ‘주력(酒力)’으로 그린다는 이야기도 농담처럼 자주 오르내린다. 일반인이 술 마시고 떠들면 주정(酒酊)이 되지만, 술에 취한 시인의 말은 ‘아포리즘(aphorism)’, 즉 잠언이 된다. 그래서인지 술과 관련된 시나 명언도 적지 않다.
어느 주점 벽에서 발견한 글이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 내가 옷 사 입나 / 술 사 먹지.” ‘술타령’이란 제목의 작품인데, 주당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은 시다. 그 추운 날씨에도 옷 대신 술을 택한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을 잊게 한다. 어쩌면 술과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리야 센얀이라는 일본의 선승은 유언으로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 술통 밑에 묻어 줘. / 운이 좋으면 / 밑동이 샐지도 몰라.”
류시화 작가가 엮은 잠언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에 나오는 ‘술통’이란 작품이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이런 임종게를 남길 만큼 해학과 기개가 높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술을 불교에서는 경계한다. 불자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五戒] 가운데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는 대목이 있을 정도다. 다만 이 조항은 다른 네 가지 계율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살생과 도둑질, 사음, 거짓말을 금하는 계율은 성계(性戒)라고 해서 이를 어기면 교단에서 추방됐다. 이에 비해 불음주계는 다른 계율을 제어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술을 마시면 깨어 있는 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서 네 가지 계율을 어길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를 막기[遮] 위한 장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불음주계다. 이를 가리켜 ‘차계(遮戒)’라고 부르는 이유다. 술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약간의 여지가 생긴 셈이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시면 괜찮지 않겠냐는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늘 소개할 이생진 시인의 ‘술에 취한 바다’에도 제목처럼 술이 등장한다. 술을 통해 사람과 바다 사이의 벽을 허문 시인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라는 시집으로 유명하다. 1978년 초판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사랑 받아 온 작품이다. 시인은 천여 곳이 넘는 섬을 찾아다니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섬 시인’이라 불릴 만큼 섬과 바다를 사랑한 이생진은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사연을 원고지에 담아냈다. 〈섬에 오는 이유〉, 〈섬마다 그리움이〉, 〈먼 섬에 가고 싶다〉,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등의 시집이 바로 그것이다.
이생진은 196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대표작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리운 바다 성산포〉다. 여기에도 술과 관련된 시들이 많이 실려 있는데, ‘섬 묘지’라는 시의 한 구절을 잠깐 소개한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 죽어서 시원하라고 / 산 꼭대기에 묻었다 //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 섬 꼭대기에 묻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은 죽어서라도 시원하라고 산의 꼭대기에 묻은 것처럼, 술 좋아하는 이는 섬의 꼭대기에 묻으라는 것이다. 흔들리는 파도를 보면서 술에 취한 느낌을 만끽하라는 뜻인 것 같다.
‘술에 취한 바다’ 역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에 실린 작품이다. 이 시집은 특히 시 낭송으로 많이 소개됐는데, ‘술에 취한 바다’는 웬만해서는 빠지지 않는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라는 구절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 시를 모르는 사람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대목이다. 특히 주당들에겐 술을 부르는 시이기도 하다.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성산포에서는 / 남자가 여자보다 / 여자가 남자보다 / 바다에 가깝다 / 나는 내 말만 하고 / 바다는 제 말만 하며 / 술은 내가 마시는데 /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 성산포에서는 / 바다가 술에 / 더 약하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바다가 취한다고?
이 시를 읽으면서 성산포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올랐다. 제주도의 이국적인 풍경도 좋았지만, 성산포에서 바라본 바다는 압도적이었다. 그런 멋진 바다를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 당시 소박한 한낮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이곳 바닷가에서 슈퍼마켓을 하면 매일 바다를 볼 수 있어서 참 좋겠다고. 그만큼 마음에 들었던 바다였다.
시인 또한 이 바다를 무척 사랑했던 것 같다. 성산포란 주제로 수많은 글을 쓰고 시집까지 냈으니 말이다. 아마 이곳에서 술도 제법 마시지 않았을까? 술 한 잔 마시고 바다를 바라보면, 평소보다 파도의 흔들림이 심하게 다가온다. 마치 술에 취한 내가 흔들리는 느낌이다. 순간 저 깊은 내면에서 충만한 감성이 흘러나온다. 술은 내가 마셨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한다고. 시인이 아니면 쉽게 나올 수 없는 불이(不二)의 언어다. 술에 취한 시인의 마음을 바다에 비유한 멋진 감성이다. 그 메타포의 절정에서 시인은 결론을 맺는다. 바다가 자기보다 술에 더 약하다고. 이쯤 되면 한 잔 더 마셔도 된다고 자위하지 않았을까?
이 시는 불교의 심리학이라 일컫는 ‘유식(唯識)’을 닮아 있다. 유식이란 오직[唯] 마음[識]이라는 자신만의 거울을 통해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는데, 유식은 그런 우리를 향해 착각이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그림자를 통해 바라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원을 산책하다 벤치 위에서 소변보는 강아지를 보았다고 해 보자. 우리는 그 벤치를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고 해도 쉽게 앉지 못한다. 마음속에 강아지가 소변보는 장면이 입력되어 더럽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무의식 깊은 곳에 편견과 선입견이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벤치를 아무리 예쁘게 가꿔도 그에게는 더러운 의자로 보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유식에서 말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오직[唯] 마음[識]에 비친 더럽다는 편견만 있을 뿐, 벤치라는 대상[境] 자체는 의미가 없다[無]는 뜻이다. 적어도 마음속 편견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내용과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시인 역시 유식의 시선으로 성산포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바다가 그저 아름답고 좋았는데, 한잔 술에 취해 바라본 바다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출렁이는 파도가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이때는 오직[唯] 시인의 마음[識]에 비친 술 취한 바다만 있을 뿐, 넘실거리는 파도 위에 갈매기 나는 바다[境]는 없었던[無] 것이다. 그리고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고 한 것을 보면 시인은 아직 만취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술에 취한 자신보다 파도가 더 많이 흔들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은 술에 취해 바다를 멋지게 희롱하는 시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시는 술꾼의 말이 아니라, 감성 충만한 시인의 고급 언어다. 시인은 처음에 “나는 내 말만 하고 / 바다는 제 말만” 한다고 했다. 시인이라는 주체와 바다라는 대상 사이에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둘 다 자기 말만 한 것이다.
그런데 바다와 교감하면서 가로막혔던 벽이 깨지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인의 말을 바다가 알아듣고 바다의 마음을 시인이 이해하게 됐다. 그야말로 시인과 바다가 둘이 아닌[不二] 하나가 된 것이다. 흔히 말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바로 그것이다. 대상과 하나가 되었으니 내가 술을 마셔도 바다가 취한다. 바다가 아프면 시인의 마음도 아프고 바다가 기쁘면 시인 또한 기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상과 내가 모두 깨져야 한다. 이를 가리켜 유식에서는 ‘경식구민(境識俱泯)’이라 한다. 대상[境]과 주관[識]이 모두[俱] 깨져[泯] 하나 되는 멋진 경지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흉터라고 하는데, 남편 눈에는 예쁜 보조개로 보인 것이다. 사랑하면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다. 나태주 시인도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산포 앞바다도 그렇다. 이생진은 술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산포를 사랑한 시인이다.
시인의 말처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 그러니 그곳에 가거들랑, 술에 취해 바다를 함부로 대하지 말자. 취객이 버린 깨진 소주병에 바다도 다친다. 바다에 버려진 각종 쓰레기에 성산포도 앓고 있다. 그 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자. 성산포와 나는 한 몸[同體]이니까.
그곳에 가고 싶다.
지난 9월 19일 세상을 떠난 이생진 시인의 극락왕생을 발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