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길을 묻는 이에게] 상대와 나를 위한다면 안으로 불을 켜세요

내면에 놓고 들어가는 작업이 정에 드는 방법이다

여러분이 위로는 일체제불과 둘 아닌 마음을 지니고서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아래로는 그 믿는 마음으로써 채찍질을 한다면
아래 내 몸속의 중생들은 스스로 제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림=최주현 작가
그림=최주현 작가

이렇게 더운데도 불구하고 또 한자리를 하게 됐습니다. 세상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걸 보면, 그것이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한시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같이 돌아가면서 하나로 살고 있지만 모습은 다 각각이니만큼, 또 만났다고 하고 또 헤어졌다고 합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아들이 됐다가 이렇게 순간순간 바뀌면서 돌아가듯, 우리가 헤어졌다 만나고 만났다 헤어지고 하는 도리가 바로 그 도리입니다. 둘이 아니면서도 항상 둘로 나누어지고, 둘로 나누어졌다가 또 하나로 뭉치고 이렇게 작업이 계속되는 이치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디서 왔는지를 필연코 알아야만 하겠죠. 물론 그 말을 하자면, 부모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말을 또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체 생명들을 막론하고 물주머니에서 나와서 물주머니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런 소리를 들어 놓으면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겠지만, 들어 보지 못했다면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것을 듣고 자기 마음의 진로를 넓히든지 좁히든지 작용을 할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더운데도 불구하고, 바쁜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나와야 되는지 잘 생각해 보셔야 될 겁니다. 우리는 지금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증명하건대 우리가 공기 주머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서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니까 우리가 이 도리를 알고 배우고 증득해서 그 어항 속을 벗어나야만이 자유롭게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지금 세상에는 텔레비전도 보고, 듣는 것도 많고 보는 것도 많아서, 모두 너무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이 공부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봅니다. 좀 모르는 듯 하고 어리석은 듯 해야, 옛날의 선지식들이 화두를 주면 그냥 무지막지하게 밀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화두선이 그렇게 빛을 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해도 내가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물질로다 치닫는가 하면 형상으로 치닫고, 형상으로 치닫는가 하면 모든 점에서 정신세계는 무시하고 돌아가는 경향이 많다 이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이 만물만생은 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또 우리 인간은 말과 말로 전달을 하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통신으로 전달을 하면서 살아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되는 도리를 여러분이 하나도 몰라요. 그저 조급하게 불끈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해치워 버리고 그냥 말해 버리는 경향이 많이 있거든요. 자기를 자기가 구워 먹고 삶아 먹고 찢어 먹고 갈갈이 뜯어 먹고 하는 경향이 그런 데서 벌어진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도 걸림이 없이, 돌 위에 세워 놔도 살 수 있는 법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긁어서 고(苦)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애고를 만들고, 자기가 긁어서 모든 병고를 만들고 이럽니다. 그러니 이 노릇을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대육신은 지수화풍으로 한데 합해져서 이 세상에 나왔는데 지수화풍으로 뭉쳐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지수화풍을 또 내놓습니다. 먹는 대로 내놓습니다. 그럼 내놓는 것 가지고 어떻게 활용이 되느냐? 바로 증발이 되고 모두 화해서 일체 만물만생에게 도로 전달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전달한 까닭에 다시 또 먹습니다. 그러니 내놓으면 먹게 되고, 먹게 되면 내놓고 이러는 작업이 계속되죠. 이 도리를 우리가 상세히 알아야지, 목탁 치는 것만 불교가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과거에 살던 것, 미래로 인해서 오늘 현실에 오는 것, 이 전체를 삼라만상이라고 합니다. 삼세라고 그러죠. 또 삼심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또 삼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굴러 오면서 교차하면서 살아나온 그 자기의 인과 업이, 선하게 행을 했다면 선행의 업이 있을 거고 악하게 행을 했다면 악행의 업으로서 진행되는 것이 여러분 몸속에 다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들로 구성돼 있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여러분한테, 그 구성원들을 교화를 시키는 데 여러분의 마음의 채찍이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위로는 일체제불과 둘 아닌 마음을 지니고서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아래로는 그 믿는 마음으로써 채찍질을 한다면 아래 내 몸속의 중생들은 스스로 제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도 그런 뜻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부처가 되느냐 중생으로 그냥 남느냐가 결정이 됩니다. 여러분이 내 마음을 깨닫는다고 합시다. 그거를 돈오라고 한다면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이 자생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점수가 또 들어갑니다. 나를 깨치는 거는 쉬워도 둘 아닌 도리와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포착하려면 그만큼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자생 중생들은 내가 바깥으로 끄달리게 되면 제도할 수 없습니다. 안으로 놓고 들어가야 통신이 돼서, 마음과 마음이 전달이 돼서 따라가서 제도가 되는데, 바깥으로 끄달리면 절대로 통신이 되질 않아서 제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안에서 제도가 못 되는데 어찌 내가 제도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정에 들어야 한다.” 이 뜻이 뭐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틀고 앉아 있으면 정에 드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양면을 다 작용하면서, 우리가 지금 내면에다 놓고 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것이 정에 드는 방법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전달돼서 작용하는 그 묘법과 그 묘용과 그 광대무변한 법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으로 화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전 세계에서 알면 좋겠는데, 가만히 보면 전부 타의에다가 기도하고 상대에다가 빌고 잘되게 해 달라고 하지, 자생을 제도하면서 자기를 자기가 채찍질하면서 자기완성을 하려고 작업을 하는 사람은 아주 적어요. 한다고 해도 그렇게 직접적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요. 

우리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지만 죽으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 어차피 이렇게 나온 거 아무렇게나 하더라도 잘 먹고 잘 입고 살면 되지.’ 이러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옷을 입었다가 더러우면 벗어 버리고 다시 새 옷을 입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몸뚱이도, 젊어서 병이 들든 늙어서 병이 들든 옷이 다하면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게 돼 있습니다. 새 옷만 입을 뿐이지, 즉 말하자면 싹만 없어졌다 뿐이지 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소립니다. 봄이 오면 새 풀이 또다시 나듯이. 그 뿌리가 죽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불씨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이 다 그러하며 저 별성이나 혹성이나 다 그렇습니다. 수명이 짧고 길고 그럴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소리는 아예 하지도 말아야죠. 

우리 이 육체 자체도 실상이며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게 있습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옷이 주어집니다. 세련되고 아주 좋은 옷으로 입느냐, 또 나같이 이렇게 못나 빠지게 옷을 해 입느냐, 하하하…, 그렇지 않으면 짐승의 탈로써 옷을 입느냐, 독사의 옷을 입느냐. 그 여러 가지 옷이 많고 많은데 그것은 자기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살고 있는 경험대로 주어지는 거거든요. 

우리가 탤런트로서 어떠한 배역을 맡을 때, 평상시에 잘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와 같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마음을 썼느냐에 따라서, 무슨, 가난하고 부자로 살고 이래서가 아니라 없든 있든 자기가 어떠한 생각을 했고, 어떠한 행을 했고, 어떠한 말을 했고, 상대성 원리로써 폭넓게 살았느냐 폭넓지 못하게 살았느냐, 악하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 이런 것대로, 자기가 산 대로 심은 대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그렇게 배역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불교다’ 한다면 그것도 이름입니다. 애당초에 불(佛)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불로 하여금 우리는 바로 생산처를 개발하게 됐고, 교(敎)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마음과 마음을 전달하고, 말과 말을 전달하고, 통신을 하고 나가는 그 자체입니다. 개미들도 자기네들끼리 속삭거리고, 아주 말들을 잘합니다. 개미뿐만 아닙니다. 개미도 약은 것들은요, 아주 얍삽한 것들은 굴에서 흙을 파 가지고 나와서 그 앞 턱에다가 탁탁 놓습니다. 그러나 좀 듬직하고 앞을 내다보고 사는 개미는 앞에다 놓지 않고 쓱 나와서 멀찌감치 놓고 들어갑니다. 그와 같이 인간 자체도 그렇게 얍삽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능수능란하고 지혜롭게, 듬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면 똑같이 진실하게 살지 못하느냐? 이건 마음 탓입니다. 앞뒤를 생각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앞뒤를 들어 봤어야 알지, 앞뒤를 들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겠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먹어 봐야, 마셔 봐야 맛을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종교라는 이름 이전에 생활이 종교라는 겁니다. 우리 생활이 종교니까 그대로 생활 속에서 지혜를 넓히려면, 아주 못생긴 사람이든지 얕은 사람이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하여간에, 애라도 똑바른 말을 하면 귀담아듣고 그것을 흘리지 말라 하는 거죠. 사람만 스승이 아니라 일체 만물만생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저 나뭇잎들도 봄이 되면 피어났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어서 떨어집니다. 그래도 나무는 겨울 내내 하얀 눈과 비를 다 맞고 그 비바람에 조금도 끄떡없이 인내롭게 봄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이 마음을 보는 듯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참는 게 있고 기다리는 게 있고 여유가 있어야 빛을 볼 수 있고 화목을 가져올 수 있고 복을 받을 수가 있지, 그 인내로움이 없고 불끈불끈 그냥 화나는 대로 해 버린다면 그거는 포근한 화목을 가져올 수도 없거니와 재물을 늘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재물도 생각이 있거든요. 들어오려고 까딱까딱하다가 말입니다, 그 집이 시끄러우면 ‘에이! 이 집에 들어가 봤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고 그러니까 귀찮다.’ 그러곤 딴 데로 가요. 

이 만물이 다 그러해서 스승이 아닌 게 없습니다. 나무를 봐도 스승이요, 풀 한 포기를 봐도 스승이요, 물 흘러가는 걸 봐도 스승이요, 집들을 올망졸망 짓고 사는 것도 스승이요, 비가 오는 것도 스승이요, 비가 안 오는 것도 스승이요, 모두가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그걸 보고 모두 배우라고 하는 게 팔만대장경 아닙니까? 책에 쓰여 있는 것만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지금 듣고 보고 행하고,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이 자체 모두가 스승이자 팔만대장경입니다. 

그러니 보십시오. 망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망상을 칼로 자르듯이 끊는다면 망상이 끊어집니까? 그것을 물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말없이! ‘흘러가는 물을 너희들이 아무리 잘라 봐라, 잘라지나.’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공생으로서 돌아간다는 그 자체를 알고,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돌아간다는 걸 알면 망상이라고 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얘깁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인연이 돼서 내 몸뚱이 속에 있으니, 그것을 불가에선 숙명통이라고 합니다마는, ‘숙명통’ 하면 그게 다섯 가지가 한데 합쳐진 컴퓨터입니다. 

컴퓨터는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자동적인 컴퓨터가 다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 컴퓨터에 입력이 된 대로 지금 현실에 자꾸 나오는 것을 망상이라고 한다면, 그 망상을 끊는다기보다는 그냥 그 나오는 데다 되입력을 시키면 앞서 입력된 거는 없어지지 않느냐, 이게 하나로 돌아가지 않느냐 이겁니다.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안 없어지는 것도 아닌, 즉 말하자면 일어났다가 꺼지는 거죠. 그런데 이거는 끊으려고 애쓰고 잠을 몰아내려고 애쓰니, 잠이 몰아내지는 것이며 망상이 끊어지는 겁니까? 그래서 물은 나같이 살라 하며 저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산천초목은 초목대로 나같이 살라 하고 저렇게 푸르르게 하고 있고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하면, 항상 얘기하지만 어떠한 애고나 병고, 즉 말하자면 세균성, 업보성, 영계성, 인과성, 유전성 이 자체가 전부 마음으로 해서 오는 거다 이겁니다. 이처럼 전자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 그렇게 오는 모든 거를 재료로 알고 몽땅몽땅 갖다가 집어넣어 입력을 한다면 그것들을 녹일 수 있습니다.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고 또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그러고 거기다 놓는 겁니다. 

나무뿌리가 말입니다, 제 나무의 뿌리가 제 나무를 돕지, 딴 나무의 뿌리가 도와주는 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기복으로 만날 딴 뿌리에다가 달라고 빌어도 그것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제 뿌리에다가 ‘나, 지금 수분이 적어.’ 한다면 이 뿌리는 수분을 흡수해서 올리지만, 딴 뿌리에다가 ‘나, 목이 말라.’ 한다고 그게 목을 축이게 해 줍니까? 그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빌지 말아라. 상대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궁색하게 노예가 되지 말아라. 지금 노예 노릇을 하면 세세생생에 노예가 된다. 내 뿌리에서 나온 싹이니까 내 뿌리만이 이 싹이 병통이 나도 고칠 수가 있다.”라는 거죠. 이 인간의 뿌리는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뿌리를 못 보듯이 나무도 흙에 덮여서 자기 뿌리를 못 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뭐가 덮여서 못 보느냐? 무명이 덮여서 못 본다 이겁니다. 

나는 어떤 땐 길을 걷다가도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야, 이 광대무변하고 말로는 알게 할 수 없는 이런 도리를, 말로 할 수가 없는 이런 광대한 법을, 말로는 가르칠 수가 없는 이런 거를 어떻게 책에다 쓰고 어떻게 말로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한테 그 도리도 어떻게, 왕창 한꺼번에 가르쳐 줬으면 좋겠는데, 허허허…,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길을 가다가도 고개가 푹 떨어집니다. ‘내가 너무 부족하구나.’ 해서 말이죠. 부족해서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아요. 껄껄 웃다가도 말입니다. 웃음이 그냥 훤떡 들어갈 때가 있거든요. 

여러분 한 분 한 분, 일체 생명들 모두가 이렇게 공용을 하고 공생으로서 돌아가는 거를 가만히 생각한다면 나 아님이 하나도 없는데, 그 도리를 어떻게 여러분에게 다 이해를 시킬 수가 없어서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곤 하죠. 그럴 때는 웃다가도 ‘내가 이렇게 웃을 수 있는가?’ 하고 그냥 멈칫해지고, 걸음을 걸으면서 좀 싱그럽게 이렇게 이렇게 하다가도 ‘어이구! 부족한 내가 이렇게 싱그럽게 웃을 수 있을까? 싱그러운 마음으로써 아주 즐거운 생각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쯧!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나? 그릇대로 담아 줄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런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나?’ 그러고선 옆도 쳐다볼 수가 없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선 생각을 하면서 가다 보면 저 돌부리에 차이기도 하구요, 이럴 때가 많이 있죠. 

사람이 자기 혼을 다 불어넣어서 진실하게 하지 않으면 신검을 만들지 못하듯이,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여러분한테 이익이 하나도 없어요. 여러분한테 이익을 줬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이익이 없죠. 알고 본다면, 그저 부처님 앞에 가서 빌어도 나를 위해서지 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죠.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빈다 하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그러지 그 상대를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죠. 내가 보기가 안됐고 내가 살기가 어지럽고 내가 당장 좋지 못하니까 비는 거죠. 

그렇듯이 정작 그렇게 상대와 나를 위한다면 안으로 불을 켜세요. 우리 한 식구가 열 명이라도 가설이 다 돼 있습니다. 마치 한 집안에 불을 켤 수 있게끔 가설이 된 것처럼요. 그런데 가설은 다 돼 있지만 스위치를 눌러야 불이 켜지죠. 그러니까 바깥으로 불을 켜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러면 불은 안 들어와요. 스위치가 눌러지지 않으니까요, 통신이 되지 않으니까요. 

내 마음 깊은 속에 주인공이라는 것은 바로 불씨와 에너지라고 할 수 있죠. 그 불씨로 인해서 마음을 내게 되죠. 마음을 내면 육신이 움죽거리죠. 이 삼합이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의 주인공을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을 못 믿어도 자기를 못 믿는 게 되니,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오고부터 모든 게 벌어지고 아는 거지 자기가 없이 뭐가 있습니까? 자기가 있기 때문에 식구들도 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생활도 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종교도 있는 거지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뭐, 내 주먹만 믿으라는데 여길 가면 뭘 해?’ 이러지만요, 그것도 아니에요. 내 주먹만 믿으란다고 학교에 가지도 않고 교과서만 놓고 배운다면 그거는 안 되죠.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합류화가 될 수가 없죠. 지혜가 넓어질 수도 없구요.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3년 9월 5일 법형제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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