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를 보고 일어나는 마음도 내 마음 가운데서 다스릴 줄 알아야
한 점의 마음에는 우주 섭류의 그 근원이,
약뿐만 아니라 전체가 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딴 데 가서 헤매고 있습니까.
그렇게 방황하고 고에서 휘달리고 앨 쓰지 마세요.
치병의 도리에 대해
질문 저는 어디가 아프다 싶으면 병원을 가기보다 자연 치유가 되도록 노력하는 편입니다. 스님 법문 중에 치병의 도리에 대해 읽은 적이 있는데 과연 이 육신의 병을 마음으로 치료할 수 있는지요?
답변 예전에 상대방은 영 모르니 할 수 없이 이렇게도 한번 해 본 예가 있습니다. 도대체 예전에는 왜, 뭐? 그걸 이름을, 뭐더라? 꽃이 일어났다 그러던가요? 그것만 일어났다 하면은 예까지 차면 죽는다고 합디다. 그, 빨갛게 전부 그냥 두드러기처럼 일어나면서 진물이 나면서…. 몸뚱이가 또 하얗게 백목이 먹어서 들어가는 것도 있고 여러 가집디다. 나는 그런 거를 너무 많이 봐 왔습니다. 근데 그거 한 가지만 해도, 지금 의사들이 말하는 하나 가지고 그냥 여러 가지 종류가 이름이 많고 그것이 어디에서 오고 어디에서 오고 어디에서도 오고 어디에서도 온다 이럽니다. 근데 귀찮아서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이루종차 거기에 끄달려서, 한번 죽기는 마찬가진데 예기랄 거, 그냥 거기에 끄달려서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이게 여기에서 일어난 거다 저기에서 일어난 거다 이럭하고선 찾다 보면 사람은 지칠 대로 지치고 살기가 고달프고 참 막연하고 어처구니없을 때가 있죠.
여기에서도 아는 사람은 압니다마는 저 미국으로 간 오 중령이라고 있습니다. 그 아들도 그 병을 얻었죠. 그래서 이 잔등이로 배로 어디로 뭐, 하나 성한 데 없이 그것이 나면서 숨이 차올라 오면서 정신은 자꾸자꾸 희미해 갔습니다. 그때 그 집은 병원으로 찾아다닐 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딴 데 가서 병원 의사, 박사한테 물어보면 이것이 여기서 생기고 저기서 생겼으니까, 병원에 와서 약 치료를 하는데 그것도 고 자리 한 자리라야 어떻게 해 볼 텐데 여러 자린데, 또 그것을 따고 물을 빼고서 약을 발라 주면 얼마 안 있어서 딱젱이가 앉으면서 그 속에 또 물이 앉는 겁니다. 그러니 이거를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서도 이게 뻘겋게 일어나는 겁니다, 아주 뻘겋게 그냥. 그래 가지고 예까지 차면 죽는다는 겁니다.
그게 옛날에 이름이 있었습디다. 모두 지금은 새 이름을 붙여서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귀찮아서 알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 엄마가 나한테 와서 이렇게 벗겨서 보이는데 엄청나요. 이거는 뭐, 거기에 안으로 들이 긁기만 하면 뭐 꼼짝없이 그냥 죽겠어요. “엄마의 마음에 달렸어. 이 약의 종류가, 어디든지 이 약이 있어. 그런데 이 산천초목에 그 약이 없을라고. 주인공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죽이든지 살리는 건 여기에 매였다고 맡겨 놔 버려.”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가서, 그날 저녁에 불이 나가서 촛불 켜 놓고선 그냥 앉아서 밤을 새다시피 잠을 자려니까 의사 셋이, 하얗게 소복한 의사 셋이 들어오는데 한 분은 스님이고 한 분은 또 간호원이고 한 분은 그 기계 가방을 들었더랍니다. 들어와서 전부 이 가방 속을 탁 여는데 보니깐 전부 풀뿌리에 싹이 난 그거더랍니다. 그런데 한 가방인데 풀어 놓으니까 그냥 너도 나도 전부 일어나더랍니다, 이렇게. 전부 살았더랍니다. 그래 가지고 스님이 있다 하는 말이 “너희들은 다 들어가고 이 한 이파리만 나와도 되느니라.” 하고 말을 하니까, 그 이파리가 나와서 거기 전부 아픈 데 가서 붙더랍니다. 그러더니만 그 이파리가 붙는 게 아니라 그 이파리가 그저 붙어서 진을 묻히고 진을 묻히고 이럭하곤 돌아가더니만 가방 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그러니까 가방 속이라고 그런다고 가방인 줄 알지 마세요. 전체 우주 삼라만상 한데 합쳐진 가방이라고 보세요. 그렇게 하고 가더니 그 이튿날 아침부터 그게 꾸득꾸득하더니 그냥 씻은 듯 부신 듯 나았더란 얘깁니다. 이거는 우리가 그렇게 복잡하게 이름을 알려고 그러고 또는 종류를 쫓아다니며 끄달리고 이러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지금 하나하나 보고 하나하나 듣고 남한테 끄달리기 때문에 괴로운 거지, 내 이 주인공에 모든 것을, 내 마음 한 점이 이게 가방 하나라면 우주 전체 대천세계에 가방 하나라면, 그렇다면 끄달릴 거 하나도 없죠. 죽는다 하더라도 끄달릴 것 없고 산다 하더라도 끄달릴 게 없고 거기에 뭐가 끄달릴 게 있습니까. 종류에 끄달려, 이름이 끄달려? 만약에 생각으로 한생각이면 배가 부르고, 한생각이면 그 어디 아픈 게 낫고, 한생각이면 저기 가고, 한생각이면 여기 오고 이럴 정도라면 우리는 살맛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고달프게 살지 않고 말입니다.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도리를 모르면 영원히 또 그렇게 이렇게 끄달릴 거라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끄달리는 이 자체가 한 점의 마음에 달렸으니 천 가지 만 가지 나오는 거, 천 가지 만 가지 보는 거, 천 가지 만 가지 듣는 거, 천 가지 만 가지 활용하는 거 모두 일절 자기의 성품에 의해서 한 점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다 모든 걸 맡겨 놓는다면 자기가 그렇게 맡겨 놓는 반면에 거기에서 천 가지 만 가지가 다 약이 돼서 자기에 부당한 게 오는 게 아니라, 다 바로 거기에 맞는 약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왜 보이는 약만 생각하고 보이는 이름만 찾고 보이는 데서 방황합니까.
물도 병 종류에 따라서 물이 따라 줍니다. 물이 종류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마음 씀씀이에 의해서 종류에 따라서, 우리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물도 선약이 돼 줄 수가 있고 아주 또 그냥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에 나서 참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부질없고 모든 게 귀찮기만 하고 모든 게 종류도 많고 끄달리는 것도 한두 건이 아니고 사람 살아나가는 게 역사를 봐도 그렇고 모두 그 편편치가 못하고 귀찮았습니다. 지금은 모두 칫솔로 쓰시지마는 그때는 소금을 가지고 손으로 쓰는 분들이 많았죠. 근데 그때에 모두 빗이나 뭐, 이런 것도 때로는 외출을 할 때 가지고 다니지만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런 빗 같은 게 소용없지요. 그런데 인제 칫솔은 가지고 다녀야 할 텐데 칫솔도 다 소용없고 귀찮은 겁니다. 그래서 맨손으로 다니다 보니까 이빨이 좀 텁텁할 때는 항상 또 닦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개천 바닥에 가서 그 개천 앙금이 요렇게 앉은 걸 가지고, 고 아주 가느다란 앙금 모래를 가지고선 항상 닦았습니다, 다니면서.
그랬는데 거기에서 얻은 게 뭐냐 하면 ‘야, 여기에도 선약이 있고, 여기에도 독약이 있구나.’ 만약에 위가 헐어서, 즉 먹지 못해서 마른 데는 바로 이 느끼가 같이 포함돼서 한데 합쳐져서 이렇게 있으니 한번 그걸로 이를 닦으면서 모래는 뱉고 물은 삼켜 봤습니다. 왜 그것도 삼켰냐 하면은 물이 출출 흘러 내려가는 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라도 목을 축여야 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생각하기에 달려 있고, 모든 게 나에게 어떠한 독약이라도 바로 내 생각에 의해서 그게 독이 빠질 수도 있고 독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겁니다. 물이 얼음이 되고, 또 종류가 암모니아도 되고 모든 가스도 되고, 그 석유 기름이 모두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고, 이 진흙도 항생제의 역할도 하는데 모든 그 폐의 근원도 없앨 수 있는 그런 항생제 역할도 한다 이겁니다. 돌에도 이 생명이 있고 약이 되고 모두가 약이 아니 되는 게 없는데 왜 그 종류를 찾아서 그렇게 헤매야만 합니까.
그래서 그 포천에 지금도 계시지만 아, 그 집의 영감님은 아, 벽에 그 저 뭡니까? 진흙, 그거를 만날 그냥 맛있게 먹었거든. 맛있게 먹은 게 먹은 게 아니에요. 폐가 너무 망가졌으니까 그걸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숯도. 숯은 왜? 이거는 숯이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탄 거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탄 거기 때문에 끓는 물에다가 갖다가 넣어서 다시 그 물을 식혀서 먹으면 열이 내린다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생물도, 말하자면 메뚜기나 메뚜기같이 생긴 오줌싸개나 이런 것도 다 선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거를 우리가 일일이 종류를 쫒아다니면서 이름 찾고 뭐 찾고 종류 찾고 이럴 게 없습니다. 한 점의 마음에는 우주 섭류의 그 근원이, 약뿐만 아니라 전체가 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딴 데 가서 헤매고 있습니까. 그렇게 방황하고 살고 고에서 휘달리고 앨 쓰지 마세요. 내 마음에 달렸다는 겁니다, 고도. “고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닌 거다.” 이렇게 그냥 가볍게 말할 게 아닙니다. 진짜 내가 체험하고 진짜 우주의 모든 근본이 여기 한 점에 있다는 거를 알게 되면 거기에서 다 내가 아쉬울 대로 꺼내 쓸 수 있으니 뭐가 급한 게 있고, 뭐가 겁나는 게 있고, 뭐가 걱정되는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나 아님이 없으면서 항상 겸손하면서도 그렇게 그 도도하게 흐르는 물과 같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사랑받는 며느리 되고 싶어요
질문 저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결혼하면 시부모한테 효도하고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살림을 하다 보니 시부모의 생활 방식과 충돌을 하게 되고 마음이 일어나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과 한마음 되어 잘 모시고 싶은데 어떻게 마음 살림을 이끌어 나가야 할는지요.
답변 여러분이 공부한다, 부처가 됐다 이러더라도 그 부처가 되기 이전에, 수억겁을 거치면서 공부하면서 나올 때에 뭔 짓은 안 했겠습니까? 과거에 강도질을 했는지 살인을 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 몰랐을 때 내 모습, 잘못했을 때 내 모습, 내가 알기 이전에 몰랐을 때 내 모습으로만 모두 본다면 밉고 곱고가 따로 없죠.
지금 내가 배우고 가는 내 기준으로 보지 마세요. 항상 자식들도 내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탈이 나는 겁니다. 자녀들 속에 들어가서 내가 자녀로서 한마음이 된다면 폐단이 올 일이 없습니다. 부모한테는 부모한테로 들어가서 부모가 돼 버리면, 그 기준에 선다면 폐단이 올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 기준에서 항상 얕보고 “너는 이렇게 해야 된다, 이렇게 안 하면 넌 밥 빌어먹는다.” 부모더러는 하는 말이 “당신네들 옛날 방식으로 그렇게 살아나가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렇게 하면 어찌 한마음으로 이 우주 천하를 통일을 하겠습니까? 허허허, 한마음으로 말입니다.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차원도 다르고 그렇지만, 그 모든 그 마음들은 본래부터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잘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나오다 보니까 물질에 끄달리고 먹고 사는 데 끄달리고 애착에 끄달리고 욕심에 끄달리고 모두 그러다 보니깐 잘못된 거지, 애초부터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러니 부처님도 자기가 부처님이 되기 이전에 어떻게 굴러왔다는 거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모두가 얕은 것도 높고, 높은 것도 높고 평등하다는 거죠.
여러분이 모두 잘못되는 거를, 고통을 알아야 고통이 고통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목마르고 춥고 떨릴 때 뜨거운 엽차를 한잔 마셔 보십시오. 춥고 떨릴 때 말입니다. 엽차를 마실 때에 뜨겁고 시원하고 그렇죠? 뜨거운 걸 알기 때문에 시원한 겁니다. 뜨거운 걸 모르면 시원한 것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생활하시면서 어떠한 고가 닥치고, 애고가 닥치고, 병고가 닥친다 하더라도 그걸 재료로 삼아야지 허공을 허우적거리듯 ‘나는 인제 죽었다.’ 하고 신경질을 내고 온통 이 야단들을 치면 몸 상하고 집안 망하고, 식구들이 전부 제각기 헤어집니다, 마음들이 말이에요. 이 한 사람의 마음이 잘못됨으로써 식구가 다 망가진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병든다는 것을 아셔야 하고, 가난해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름에 끄달리지 맙시다. 모두가 이름에 끄달리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정말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여러분이 참 답답할 때가 많이 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허허, 너도 예전에 저렇게 몰랐었지? 허허, 내 모습 같구나!’ 이렇게 하면은 정말 진정코 애닯고 애처롭고 그렇게 되지, ‘저걸 몰라서, 저거 저렇다.’ 이렇게 되질 않습니다. 사실이 그렇고요, 또. 여러분이 지혜가 풍부해야 조건 없는 자비도 나오지 지혜가 풍부치 못하면 조건 없는 자비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위하고 부모를 위한다 하더라도 자유스럽게 놔두고 행해야지, 말로나 행동으로 억압하고 이렇게 한다면 마음이 넓어지려야 넓어질 수가 없습니다. 가만 내버려 두세요. 저 산천초목의 모든 푸르름도 가만히 보세요. 제 이파리가 져서 떨어지고 져서 떨어지는 것이 거름이 됩니다. 그런데 또 거기서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사람들이 오히려 망가뜨려 놓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니만큼 그것도 망가뜨린다고 할 수도 없죠. 잘못되고 잘되는 것은 물 흐름에 의해서 돌아가는 거니까요. 말하자면 마음들에 의해서 돌아간다 이겁니다. 마음 떠나서 계발할 수 없고 마음 떠나서는 원력을 세울 수가 없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가정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이 마음에 속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자동적으로 계발이 될 수가 없고, 창조력을 이룰 수가 없고, 발전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금도 장농 안에 가만히 넣어 두고 있으면 늘지 못한다, 금이 말이에요. 그러니깐 장롱 속에서 금을 꺼내서 자꾸 굴리는 겁니다. 그래 나중에는 금이 많아져서 모두 나누어 주게끔 되더랍니다. 그게 지혜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안에서 상대를 보고 일어나는 마음도 다 내 마음 가운데서 이거는 어떻고 저거는 어떻고 다스려서 이렇게 놓을 줄 알아야만이 정식으로 참선이 될 수가 있는 거죠. 내가 항상 얘기하죠. 앉아서 좌선하는 것만이 참선이 아니다. 모두가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데, 아버지가 됐을 때 아버지라고만 고집하면 아들 노릇은 어떡하며 친구 노릇은 어떡하며 남편 노릇은 어떡하느냐 이 소립니다.
그와 같이 이 마음 자체가 천차만별로 보고 듣고 행하고, 모든 거를 들이고 내고 하는 것을 그냥 마음 가운데다 척 놨을 때에 마음이 편안해야, 일하면서도 편안하고 서서 가다가도 편안하고 앉아 있는데도 편안하고 똥을 눠도 편안하고 이래야 좌선입니다. 이게 좌선이자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생활에서 고통이 오는 것을 그 고통만 가지고 허우적거리지 마시고, 이 고통이 어디서 온 거를 안다면, 아까 뜨거운 것을 알아야 시원한 것을 안다 이랬죠. 그와 같이 그냥 시원하게 대치를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디서 온 걸 모르니까 허우적거릴 수밖에요. 그러니까 어디서 온 거를 알려 주기 위해서 관법을 정했는데, 그 관하는 거는 그냥 ‘아이, 주인공! 주인공이 잘해 주시오.’ 하고 말로만 이럭하고는 거기 근처도 안 가는 거예요.
진짜로 인간이 어디서 오고, 어떡해서 이렇게 끌려서 돌아가는지, 이 모든 것이 그 운명 팔자가 어디서 오는지 그것을 안다면 대치를 할 수가 있죠. 그런데 그게 어디서 오느냐는 것을 일러 줘도 대치를 못 하는 겁니다. 모든 거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과 이 사람의 마음 근본을 한데 합쳐서 ‘주인공이다’ 이랬는데도 그 주인공을 믿고 놓을 생각은 안 하는 겁니다.
그냥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그냥 ‘너 알아서, 너밖엔 할 수 없다.’ 하고 거기다가 맡겨 놔야 되는데, ‘해 주시오’ 해 놓고는 그냥 바깥으로 막 그냥 난장판이 되는 거죠. 그렇게 난장판이 되니까 이 속에서도 의식들이 난장판이 될 수밖에. 나뭇가지를 갖다 여러 개를 모아서 놓으면 부러뜨릴래야 부러뜨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거든지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헤어지면 그냥 부러지게 돼 있습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지금 편안함이 내생에도 이어질까요
질문 마음공부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편한함이 내생에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답변 오늘 만약에 남을 도와서 좋은 일을 하고 내 마음이 즐거웠다면 내일까지도 즐겁죠. 그런 인연을 맺었다면 더불어 같이 보이지 않는 데서 모두 빈손으로 돌봐 주게 되고, 없는 손이 와서 돌봐 주게 되고요. 또 없는 손이 있는 손으로 둘이 아니게 포함이 돼서 귀인이 돼 가지고 다 돌봐 주고, 가는 족족 이렇게 돌봐 주게 되죠. 이거는 기정사실입니다, 모두 모르셔서 그렇지.
그러니까 일체가 다 음파가 통해서 나를 도와주게끔 되는 거죠. 내가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러고도 내 마음의 다스림이 이 육체 안의 모든 생명의 의식들에게 통해진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쁘게 통하게 하지 마세요. 모두가 인의롭고, 자유스럽고, 슬기롭게 대치할 수 있는 그런 과감한 용기와 그 믿음을 가지고 해 나가실 수 있다면 여러분에게 어떠한 병고가, 죽을 병고가 온다 하더라도 그건 대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