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길을 묻는 이에게] 물질세계와 내면세계가 둘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매사 일체 만법을 움죽거리는 것을 어떤 놈이 하고 있나

모든 걸 다스려서 ‘주인공, 너만이 잘 이끌어줄 수 있어.’하고 
되돌려 놓으란 말입니다. 모든 걸 그놈이 하는 거니까요. 
잘하든 못하든, 울든 웃든, 죽든 살든 그놈이 하는 것입니다.

그림 최주현
그림 최주현

마산 법회를 위해서 큰스님께서 아주 극치의 설법을 해 주셨다고 봅니다. 그리고 불교연합회의 총무부장 스님께서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한자리를 하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첫째, 불교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부터 잘 아셔야 됩니다. 불(佛)이라는 것은 곤충,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근본을 불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말로 전달을 하지만 일체 만물만생이 다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을 하고 돌아갑니다. 무전통신 또는 통신으로 전달을 하고 돌아가고요. 이렇게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하고 돌아가는 찰나의 이 진리를 볼 때에, 보이지 않는 세계나 보이는 세계에 전달과 전달을 하는 것을 교(敎)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란 그렇게 미묘하고 광대하고 어느 곳에도 걸림이 없는 겁니다. 어느 종교라도 불교 안에 들어 있지 불교 바깥에 달리 있는 게 아닙니다. 머리 깎고 스님 노릇 하는 사람들만 불교가 아니라 이 세상 모두가, 일체 만물만생이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불교입니다. 바로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도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고등 동물로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가 다 지수화풍으로 바탕이 돼 있습니다. 그 바탕으로 인해서 바로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각자 우리한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지수화풍으로 뭉쳐져서 지수화풍을 먹고 삽니다.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지수화풍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걸로써 모두…, 지금 전력도 물에서 얻죠? 지수화풍의 바탕이 있기 때문에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히 우리들한테 주어져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자기가 자기를 안다면 천차만별의 모든 용도에 따라서 자유자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마음의 근본과 마음을 내는 거와 육체가 움죽거리는 삼합이 하나로써 함께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써 육체를 다스리면서 또 마음은 마음을 내게 할 수 있는 근본과 더불어 삼합이 한데 합쳐서 찰나에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그걸 주인공이라고 이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도 이름이요, 자아도 이름이요, 불성도 이름이요, 주인공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 아닌 이름이라면 정말 그 길을 손살피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나기 이전 그 자체가 바로 나의 마음의 근본이라고 할까요? 한마음의 근본! 영혼의 근본이라고도 하죠. 즉 뿌리 말입니다. 뗄래야 뗄 수 없는 자기 뿌리. 나무가 뿌리로 인해서 모든 영양을 흡수해서 푸르르게 살고 있듯이 여러분도 영혼의 근본 뿌리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기 이전 그 자체, 영혼의 근본이 자기를 형성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물론 차원에 따라서, 그릇에 따라서겠죠. 차원에 따라서 모습을 들고 나오게끔 형성시키는 것도 자기의 그릇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의 자기가 영혼의 근본으로서 자기를 형성시키기 위해서 아버지의 뼈를 빌리고 어머니의 살을 빌려서, 지금은 정자 난자라고 그러죠? 자기 그릇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같은 그릇의 한 부부, 즉 인간의 부부라든가 개, 짐승의 부부라든가 곤충의 부부라든가 어떠한 부부에게 들어가서 자기를 형성시키는 겁니다.

형성시켜서 나오는데 말입니다, 또 한 가지 붙어 돌아가는 게 있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단 말입니다. 영혼은 근본이 아닙니다. 영혼은 바로 업식에 의해서 또 그림자처럼 붙어서 형성이 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올 때 벌써 몸에 결부가 돼서 나오죠. 이게 생각하면 아주 복잡합니다만 복잡하더라도 잘 들어 보세요. 그렇지만 그 업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탄생을 했으니 이 몸뚱이는 그 업식의 집합소란 말입니다. 

몸뚱이가 자기라고 생각하면 아주 어리석죠. 몸뚱이는 마음의 심부름꾼이자 관리인이자 바로 자기 자생 중생들이 있는 집합소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업식이 주어지는 거니까 누구 탓을 할 것 없고 증오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오니까 그 업식 속에서 뭐든 자기가 한 대로, 즉 말하자면 세균성이나 영계성, 업보성, 인과성, 유전성 이 모두가 합쳐져서 차례차례 나오는 겁니다.

이런 게 있죠. 인간에게는 자동적인 컴퓨터가 있습니다. 인간의 컴퓨터는 오신통으로 인해서 자동적인 컴퓨터가 됩니다. 오신통이란 자기를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고 그 구덩이에 빠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동적인 컴퓨터에 다 입력이 돼 있습니다. 입력이 돼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업식이란 말입니다. 업식에 의해서 지금 현실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만 과거가 아니라 어저께도 과거요, 아까도 과거요, 한 시간 전도 과거요, 일 초 전도 과거란 말입니다.

몸속에 자생 중생들이 있다고 한다면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자생 중생들과 더불어 한마음이 돼야 되지 않겠습니까? 위로는 일체제불의 마음 자체가 바로 내 한마음 속에서 들고 난다 이런 뜻이고, 그러니까 위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기 자생 중생들을 다스려서 제도하라 이런 뜻입니다. 다스려서 제도를 안 하면 항상 번뇌 망상과 모든 것에 끄달리게 되니까 제도를 해서 그 끄달리는 굴레에서 벗어나야죠.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 있으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바로 상대가 있는 거고 세상이 벌어졌고 우주가 있는 거고, 우리가 모두 불교를 숭상하게도 됐다 이 소립니다.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나부터 알아야 하고, 먼저 나부터 믿어야 하고, 먼저 나부터 발견해서 자기의, 즉 이전 부(父)와 현재 자(子)가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해야만이 우리가 자유자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두 관습이나 업식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마음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을 너희 마음대로 쓰라 하고 가르쳐 주셨는데도 그렇게 하질 못해요. 아니, 내 마음을 가지고, 주어진 마음을 가지고도 마음대로 못 해요. 마음대로 하고 살라고 그랬는데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 한다면 중생이고, 내 마음대로 하고 산다면 부처라고 했던 것입니다. 부처라는 이름은 어떤 개별적인 하나를 세워 놓고 부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일체제불 속에 일체 중생이 들어 있고 일체 중생 속에 일체제불이 들어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한마음이라고 일컫는 것이고 그 한마음조차 공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사회에서도 그렇고 가정에서도, 부모자식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그렇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가정에서 자식이 잘못했다, 자식이 나가서 안 들어온다, 자식이 공부를 못한다 이런 문제가 있더라도 말로다가 몸을 붙들려고 한다면 절대로 붙들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붙들어야만 절대적으로 둘이 아니게 되고, 둘이 아닌 불이 들어올 뿐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과 같이 둘이 아니게 착하게 됨으로써 바로 물리가 터지고 마음의 발전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자식들이 될 겁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마음을 붙들어야 육체가 따라오지, 마음으로 붙들지 않고 말로다가 이놈 저놈 하고서 욕을 아무리 해 봤던들 더욱더 차게만 느껴지고 더욱더 멀어만지지 절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불교라고 하는 이 자체가 얼마나 위대하고 위없는 가르침이고 진실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여여하게 깨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대신 밥 먹어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절에 가서 스님네들이 하는 염불을 들어 보면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하죠? 이 다섯 가지를 잘 판단하신다면 우리는 아주 그지없이 깨칠 것입니다.

첫째, 계향이니 말입니다, 계향이라고 해서 계를, 280계나 350계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할 게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을 사는데 왜 꼭 그렇게만 지켜야 합니까. 만약에 계법을 지킨다고 한다면 단 십계도 못 지킵니다. 단 오계도 지키기 어렵죠. 그런데 첫째, 계향이라고 했으니까 일체를 내 탓으로 돌리고 누가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집을 지으려면 처음부터 기초가 잘되어야 집이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처음 먹었던 마음이 부처라는 뜻도 되죠. 그러나 이게 처음부터 직선으로 들어가야지 만약에 잘 지키는 것만 계라고 가르친다면 이거는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계향이니, 내 탓으로 돌리고 또는 부처님께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은사 스님에게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자기에게 누가 되게 해서도 절대 안 된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자기 탓으로 돌린다면, 내가 이 세상에서 잘하든지 못하든지 내 탓으로 돌린다면 화목을 가져오죠, 미움이 없어지죠, 증오가 없어지죠. 그렇게 하니까 사형 사제들이 모두 화목하게 되고 가정에서도 한 형제들 간에, 부모자식지간에도 화목을 가져온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해서 계향 아닌 계향을 지킨다면, 돌아가는 용도에 따라서 일체 모든 것을 ‘너만이,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거기에다가 놓았을 때 비로소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정향이니, 이것은 물질세계와 내면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있기에 물질세계고 나를 다스리는 자가 있기에 바로 내면세계다 이겁니다. 내면세계와 물질세계가 둘이 아닌 까닭에 내가 있으니까 내 내면에 선을 세워 놓고, 즉 주인공을 세워 놓으란 말입니다. 마음을 내는 것과 몸이 움죽거리는 것, 그리고 마음을 내게 하는 놈, 이 삼위일체가 같이 합동으로 돼서 찰나에 돌아가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주인공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자체가 자기 껍데기다 아니다 할 것도 없이 주인공입니다, 그냥 그대로!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너만이 이끌어 갈 수가 있고, 너만이 해결을 할 수가 있고, 병고도 네 몸이니까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는 것도 너뿐이다.’ 어떠한 상대가 나를 때리고 찢고 찍고 정신을 뺏어 먹으려고 애를 쓰더라도 ‘둘 아닌 까닭에 저 사람이 저렇게 안 하게끔 할 수 있는 거는 너밖에 없다.’ 하고 놔 버린다면, 바로 그것이 정향이자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패기를 잃지 않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그렇게 귀하고도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정향’ 할 때에 우리가 문을 찾아서 다니는 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광대합니다. 지구 바깥에도 벗어날 수 있고 우주 밖에도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건 문을 찾아서 다니는 게 아니고, 벽도 봇장도 우주도 대기권도, 땅속도 물속도 물론 여지없이 통하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의 선을 세워 놓고 ‘주인공,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할 때 그 말이 한데 떨어지지 않고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은 바로 그렇게 하는 그 마음을 통해서 나투는 까닭입니다.

또 ‘혜향’ 했습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둘로 보지 않는, 바로 지켜보는 마음과 그 마음으로 다스리면서 실험하면서 체험하면서 이렇게 밝게 돌아갈 수 있는 마음이 혜향입니다. 둘로 보지 않는 마음, 관찰하는 마음, 실험하는 마음, 체험하는 마음, 이 마음이 바로 혜향입니다. 매사 일체 만법을 움죽거리는 것을 어떤 놈이 하고 있습니까? 잘하든 못하든 말입니다. 잘한다는 데서 끄달리고 못한다는 데서 끄달리고 회개다 해서 끄달리고, 이거는 뭐 끄달리는 데 아주 난장판이 돼 있어요.

‘혜향’ 했으니 다음에 해탈향이 있죠. 만물만생의 무명 굴레에서 아주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벗어나서 밝은 마음으로 여여하게 다스리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해탈향입니다. 외부의 모든 중생들이나 내면의 자생 중생들이 바로 무명에서 벗어나는 시기입니다. 굴레에서 벗어나서 밝게 다스리고 여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계향에서부터 잘해 나가신다면 계향은 정향에 하나가 되고, 혜향이 잘되면 정향에 또 하나가 되고, 정향과 해탈향, 해탈지견향도 모두가, 다섯 가지가 모두 하나의 정향으로 귀결이 되는 것입니다.

해탈지견향, 그것은 우주 일체 만물만생을 다 밝게 보고 보살피며 바로 걸림 없이 여여하고 구족하게 다스리면서, 밝게 조건 없는 자비로써 많은 중생들을, 모든 일체 만물만생들을 응신으로서 보답하는 것입니다. 죽은 중생이나 산 중생이나, 보이지 않는 중생이나 보이는 중생이나, 말이 있는 중생이나 말이 없는 중생이나 모든 중생들에게 조건 없는 자비로써 무주상 보시를 할 수 있는 천백억화신으로서 나투는 까닭입니다. 천백억이다 함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뜻을 잘 받아들이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내 몸 안의 자생 중생들을 다스려서 한마음에 나라는 것이 없다면…, 즉 말하자면 여러분의 자생 중생들이 그렇게 많은데, 생명체들이 그렇게 많은데, 의식이 그렇게 많은데 한 부분 부분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작용을 하는데, 어떤 거 작용을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몸뚱이 하나가 여러분인 줄 알지만 여러분 몸뚱이 속에 정말 천백억이라는, 아니 천차만별의 생명과 모습과 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의식 하나하나가 바로 나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몸 안에 들어 있는 거지 나가는 것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자기한테서 자기가, 팥죽 솥에서 팥죽이 끓는 거와 같습니다. 딴 데서 나온 게 아니죠. 팥죽 솥에서 팥죽이 끓는 것뿐이죠. 그래서 ‘요것도 문수 조것도 문수’ 했다는 얘기가 있죠.

그러니까 그 업식이 나오는 대로 거기다가 되돌려 놓는다면, 앞서 입력됐던 것이 현실에 나오는 것을 나오는 데다 되입력을 한다면 과거에 입력됐던 게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모든 걸 다스려서 ‘주인공, 너만이 잘 이끌어 줄 수 있어.’ 하고 되돌려 놓으란 말입니다. 모든 걸 그놈이 하는 거니까요. 잘하든 못하든, 울든 웃든, 죽든 살든 그놈이 하는 겁니다. 죽어서 다시 형성을 시켜도 그놈이 하는 거, 또 죽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 껍데길 벗겨 버리는 것도 그놈이 하는 겁니다, 다.

그러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서 마땅히 ‘내가 내가 아니구나. 나와 더불어 같이 있는 부처는 중생 속에 들어 있는 것이요, 중생 속에는 부처가 들어 있다. 모두가, 시발점도 종점도 둘이 아니구나.’ 하는 걸 아셔야죠. 타는 것도 내리는 것도, 시발점도 종점도 따로 없습니다. 그와 같이 내 정신계와 물질계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르다고 여기지 말고, 모든 것은 내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 모두가 동심으로서 모든 걸 했다고 할 수 있겠죠. 동심으로서 동참을 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내 몸뚱이 속의 자생 중생이 바로 자성 부처를 상봉해서 잘 안다면 이 세상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 대천세계의 근본이 내 마음의 근본이요, 이 세상 사바세계의 모든 것이 내 마음에 가설이 됐다 이 소립니다. 가설이 돼서 돌아가니까 남이 모른다 하더라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거죠.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우주간 법계에서 일체 만물만생이 다 스스로 알고 있으니까요. 일체제불의 마음이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요만큼이나 에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요만큼이나 어찌 거짓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끼면 빼고 뺐으면 끼고 이러지 마시고 좀 지혜롭게 물리가 터지면 정말로 남을 위할 수 있습니다. 남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거는 지혜라고 합니다. 남을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지혜로운 마음이죠. 그러한 것도 지혜롭게 써야 된다 이겁니다. 싸움을 붙이거나 남을 나쁘게 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지만 남을 위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닙니다. 여기까지도 좀 지혜롭게 생각을 하셔야 될 겁니다. 사람 사는 바는 그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모든 생활을 해 나가는 데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께 내가 거짓말 안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이 아무리 잘못한다 하더라도 “여보, 당신 시장하지 않았소?” 하고 부드러운 말을 해 주고 아주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해 주고, 그리고 주인공에다가 ‘저 사람과 나와 둘이 아닌데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것도 너밖에 없어.’ 하고 맡긴다면 화목을 가져오고 그 마음도 밝아져서 둘이 아니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아주 자비로써 가정이 화목하게 이루어진다는 얘기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위 법문은 대행 선사 법문집 ≪허공을 걷는 길≫ 중 1993년 7월 24일 국내지원법회 법문의 일부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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