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5-11-26 11:37 (수)

[진우 스님의 Weekly 선명상] 25. 삼독심서 자유로워지기

기도·보시로 마음의 업을 녹여라

내게 생기는 모든 일들은 
업 모양에 따라서 나타나
업 클수록 악연도 따라와
기도, 삼독심 줄이는 수행

해당 콘텐츠는 조계종 미디어홍보실의 후원을 받아 AI불교음악 크리에이터 곰딴이 제작했습니다.

[오늘의 명상]
무지개 화려해도 허공은 물들지 않고
관운장 검이라도 물은 베지 못하네.
허공같이 물같이 이 마음 그러하면
밉고 싫은 자국일랑 남을 리가 없으리.

평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수많은 인연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이 인연에는 필연(必然)의 법칙이 숨어 있습니다. 사주팔자라는 역학도 결국 이러한 인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한 방법일 뿐입니다.
불(佛)과 보살의 마음에는 밉고 고운 감정이 없습니다. 무정(無情)한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미움과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은 업(業)의 분별심에서 자유롭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니 이를 중도(中道), 적멸(寂滅), 반야(般若), 대자비(大慈悲)라 부를 수 있습니다.

반면 중생의 마음은 정(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좋은 마음, 나쁜 마음, 기쁜 마음, 슬픈 마음이 동전의 앞뒤처럼 함께 따라다닙니다. 이 감정들은 중생의 업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마다 업의 무게가 다릅니다. 업의 양이 적은 사람은 좋은 업을 가지고 있어 마음이 평온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됩니다. 반대로 업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무거운 업보를 짊어지고 살아가며, 즐거움과 괴로움의 강도 또한 크고 깊습니다.

좋은 사람이나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은 자신의 좋은 업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며, 나쁜 사람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자신의 나쁜 업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업의 결과를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화를 내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와 시비를 벌이고 화를 낼 때, 우리는 사실 자신의 업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업과 싸우며 괴로움을 키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악인을 만난다 하더라도 업이 없는 불(佛)의 입장에서는 그가 악인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재세시(在世時) 마왕 파순과 제바달다의 방해를 받으셨지만, 조금도 감정이나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을 내지 말라, 감정을 일으키지 말라”고 가르치신 이유는 명백합니다. 감정을 일으킬 때마다 새로운 업이 쌓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화를 내면 화를 낼 일이 다시 생기고, 싫은 감정을 내면 그것이 업이 되어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탐진치(貪嗔痴),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삼독심(三毒心)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게 생기는 모든 일은 내 마음의 업 모양에 따라 나타납니다.

마음의 업이 작을수록, 즉 삼독심이 작을수록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이 생깁니다. 반대로 삼독심이 많을수록 만나는 사람과 일이 나쁜 인연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 나의 삼독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와 보시는 삼독심을 줄이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마음의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나누는 기쁨을 실천하면 내 마음의 업이 정화되고, 좋지 않은 장애가 스스로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기도와 보시로 마음의 업을 녹이고, 삼독심에서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해 보십시오. 좋은 인연과 좋은 일이 찾아오는 길은 마음의 업을 줄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해당 삽화는 진우 스님 선명상 게송을 생성형 AI에 입력해 제작됐습니다.
해당 삽화는 진우 스님 선명상 게송을 생성형 AI에 입력해 제작됐습니다.

[오늘의 명상]
마음이 그물에 걸렸을 때는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말라.
움켜쥔 것을 놓고 놓아 비우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되리니.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유위(有爲)라 합니다. 유위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업(業)의 결과입니다. 하지만 유위는 무위(無爲)의 반대 개념이니, 공(空)을 깨닫지 못하면 그물에 걸린 마음과 같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유위와 무위의 양변을 떠난 것을 이름하여 공(空)이라 하는데, 말이나 문자로 이를 표현하려다 보니 억지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공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공 아닌 것이 또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야(晝夜)가 바뀌듯 서로 교차하며 윤회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마음, 두 감정이 서로 엇갈리며 업의 작용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끝없이 반복됩니다. 전지전능한 힘도, 권력과 명예도, 부와 아름다움도 이 반복의 그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욕심을 낼수록 더 빠르게 돌기만 할 뿐,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존재 그 자체가 그물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감정 또한 이 그물에 걸려버립니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은 이성을 따라가려 하지만, 감정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수억 겁에 걸쳐 쌓아온 업장(業障)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장의 해결만을 바라며 몸부림친다면, 아래턱을 빼서 위턱에 맞추는 격이니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집착을 버리고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마음이 얽히고 혼란스러울 때, 놓음(방하착) 선명상을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는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내려놓는 연습으로, 결국 공(空)한 상태로 돌아가게 합니다. 집착과 욕심이 사라지면 그물에서 벗어난 바람처럼 자유로운 마음 상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옹 선사께서도 비우고 놓아버리는 삶을 다음과 같은 시구로 가르치셨습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욕심을 내려놓고 고요히 살아가는 것은 세상의 시비(是非)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입니다. 성냄도 내려놓고 탐욕도 비워야 합니다. 욕심과 감정은 마음을 얽어매는 족쇄가 되기 때문입니다.

聊無怒而無惜兮 (요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 (요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으라.

이런 마음의 상태는 물과 같고 바람과 같습니다. 모든 존재가 공(空)하고,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나의 감정과 집착을 흘려보내고 공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무심(無心)한 마음을 유지하면 세상의 유위(有爲)에 얽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이 던지는 그물이 아무리 촘촘하다 한들, 바람은 그 속에서 흔들림 없이 자유롭게 흐릅니다.
오늘도 기도와 명상으로 마음의 그물을 내려놓고, 바람처럼 가볍고 물처럼 고요한 하루를 만들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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